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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재의 시시각각] 헬조선시대의 현대판 음서

이정재
논설위원
조선시대, 아버지 잘 만나 뒷문으로 벼슬을 얻는 게 음서(蔭敍)다. 이때 아버지의 자격은 고관대작이다. 공신(功臣)이면 금상첨화다. 죄를 지어도 면해 줬다. 못된 전통은 왜 그리 질긴지. 헬조선 시대, 아버지 잘 만나 뒷문으로 취직하는 게 현대판 음서다. 이때 아버지의 자격은 국회의원·고위관료 등이다. 정권 실세면 금상첨화다. 기업이 알아서 모신다.

 지긋지긋한 대물림, 고위층 자녀 취업 청탁. 이번엔 감사원까지 나섰다. 감사원이 올 초 변호사 4명을 뽑았는데 3명이 전직 감사원 고위직 자녀 또는 전직 여당 국회의원 자녀였다고 한다. 감사원은 “우연”이라지만 믿기 어렵다. 평균 30대 1의 경쟁을 거쳤는데 “뽑고 나서 보니 다 전직 간부 자녀”란 게 말이 되는가. “전직 간부 자녀라고 떨어뜨리면 그게 역차별”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떳떳했다면 왜 국민 감사 청구는 거부했나. 백번 양보해 감사원의 변명이 다 사실이라 해도 자제했어야 한다. 감사원이 뭐 하는 곳인가. 공직사회의 기강을 바로잡는 게 본업이다. 감사원의 원훈(院訓)이 괜히 ‘바른 감사, 바른 나라’인가. 그야말로 오얏나무 아래에선 갓끈도 매지 않아야 할 곳이 바로 감사원 아닌가.

 하기야 어디 감사원만 탓할 일인가. 어제 오늘 일이 아니요, 우리만의 일도 아닌 것을. 그 잘났다는 G2, 미국·중국도 다르지 않다. 2년 전 JP모건은 중국 고위층 자제를 특채한 혐의로 미 연방 수사국의 특별 조사를 받았다. JP모건은 ‘아들과 딸들’이란 프로그램까지 운용해 조직적·전략적으로 ‘채용 장사’를 했다고 한다. 고위층 자녀 특채로 중국 사업의 이권을 챙겼으니 누이 좋고 매부 좋고다. 이런 거래는 넓고 깊게 은밀하게 퍼지되 쉽게 근절되지 않는 게 특징이다. 아니나 다를까. 2년이 지난 올 초 미 금융당국은 JP모건뿐 아니라 골드먼삭스·메릴린치·UBS·아서 앤더슨 내로라하는 투자은행들을 다 파헤쳐야 했다.

 한국도 당시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한국의 ‘특채 장사’도 일제 조사한다는 소식에 세계적 투자은행의 한국 지사에 입사했던 명망가 자제들이 우르르 사표를 내고 나갔다. 한동안 누구누구 아들의 특채 경위와 비교담이 여의도 찌라시를 도배질했다. 그때 한 기사에 달린 댓글이 지금도 짠하다. ‘누구나 자식을 위해 청탁하는 세상, 청탁할 힘이 없는 아버지들은 또 한 차례 반성문을 쓰며 자괴감에 시달려야 한다.’

 현대판 음서는 청탁 사회의 정점이다. 아무나 못한다. 족벌과 가벌, 금력과 권력, 지(地)·학(學)·혈(血)의 3연을 총동원해야 비로소 가능하다. 민초들은 꿈도 못 꾼다. 그러니 뒷문 취업에 성공하면 아비는 으쓱하고 자식은 당당해하는 것이다. 한 달 전 새정치연합 윤후덕 의원이 2년 전 자식을 LG 측에 청탁 취업시킨 게 뒤늦게 문제됐을 때 태연하게 “특혜라고 생각하진 않는다”고 말한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LG가, 감사원이 취업 청탁을 들어준 것도 단지 ‘압력’ 때문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짐작건대 LG는 친노(親盧) 실세 지역구 의원의 힘이 언젠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감사원은 퇴직 후 자기 자녀의 취업을 염두에 뒀을 것이다. 청탁 사회란 게 어디 단순한 갑을 관계만으로 되나. 센 자, 가진 자 간의 끈적끈적한 ‘주고 받음’ 없이는 불가능하다. “네 일이 곧 내 일”이라는 은밀한 호혜주의는 기본이다. 그러니 법을 바꿔 명단을 공개하니 뭐니 해봐야 구두선에 그치기 십상이다. 그렇다고 대책 없이 노블레스 오블리주, 고위층의 선처만 기다리기엔 배가 너무 고프고 아프다.

 청년 백수가 100만 명을 넘었다. 이런 일이 비일비재니 벼슬 없는 아비들은 백수 자식 앞에 괜히 죄인이 된다. 허름한 직장이라도 악착같이 붙들고 있어야 할 이유가 또 하나 생긴다. 자식들은 실력·능력 쌓으면 뭐하냐며 ‘호적 등본’ 탓부터 하게 된다. 그런데도 그런 건 나 몰라라 하며 장관부터 대통령까지 입만 열면 청년펀드다 뭐다 허울 좋은 청년 일자리 타령이다. 이래저래 헬조선 소리를 들어도 할 말 없게 됐다.

이정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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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