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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연재] 빼앗긴 ‘한국의 이튼스쿨’ 꿈 … JP, 서빙고 분실서 눈물을 쏟다

 
1968년 11월 김종필(JP) 전 공화당 의장이 일본 시코쿠 농장에서 감귤 재배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68년 정계 은퇴를 선언한 JP는 버려진 땅을 개간하고 목장을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학교 재단 설립을 위한 재원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제주 감귤농원은 68년 8월, 서산 삼화축산은 69년
1월 설립됐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 갇혀 있던 46일 동안 눈물을 흘린 적이 있다. 1980년 6월 18일 계엄사가 발표한 부정축재 조사 결과를 수사관으로부터 전해 들었을 때였다. 내가 216억4648만원을 축재한 것으로 돼 있었다. 운정(雲庭)장학재단에 출연한 농장·목장까지 내 개인 재산에 포함시켜 부풀렸다. 제주도 감귤농장과 서산 삼화축산은 나의 오랜 꿈과 땀이 녹아 있는 결정체였다. 그것이 한꺼번에 부정축재로 매도돼 무참히 짓밟혔다. 도대체 무엇이 부정축재란 말인가. 나는 살아오면서 운 적이 몇 번 되지 않는다. 79년 박정희 대통령 영결식장에서 울었고, 얼마 전 내 아내가 세상을 떴을 때 울었다. 80년 6월 서빙고 분실에서의 울음은 내 꿈과 야망을 빼앗겼기 때문이었다. 분노와 허탈, 회한과 좌절이 뒤범벅된 눈물이었다. 35년이 지난 일이지만 나는 감귤농장과 서산목장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다.

 
 

 
68년 5월 말 민주공화당 당의장이었던 나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모든 공직에서 물러났다. 나는 정치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국가에 봉사하겠노라고 마음먹었다. 중학교 2학년 때 읽은 서양사 책의 한 구절이 나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1815년 영국 웰링턴 장군이 워털루에서 나폴레옹을 격파한 뒤 “어떻게 그 유럽의 망나니를 이길 수 있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대답했다. “난 이튼 정신을 가지고 싸웠다. 워털루 전투의 승리는 이튼 교정에서 얻어진 것이다.” ‘이튼(Eton)’이란 말이 내게 깊이 박혔다. 그래, 한국에도 이튼 스쿨 같은 학교를 한번 세워보자.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갈 후학을 길러보자. 그것이 내 포부였다. 그래서 나는 대전사범 강습과와 서울대 사범대에 진학해 교육자가 되려고도 했다.
 
1979년 12월 8일 김종필 공화당 총재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서산 삼화축산을 운정장학재단에 출연하는 기증서를 재단 이사 박찬현 문교부 장관(오른쪽)에게 기증하고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학교를 경영하려면 재단을 운영할 재원이 필요했다. 나는 땅을 개척해 기반을 마련키로 했다. 68년 6월 제주도에 머물면서 서귀포 일대에 방치된 황무지를 돌아봤다. 내가 봐둔 땅은 농원을 만드는 데 적지(適地)가 아니라고 전문가들이 반대했다. 하지만 나는 농협에서 대출을 받아 남제주군 중문면과 서귀포 일대 황무지 13만 평(약 43만㎡)을 3250만원에 샀다(평당 250원). 쓸모없는 땅이라서 헐값이었다. 나는 거기에 감귤나무를 심기로 했다. 밀감이 귀한 과일이던 시절이다. 그해 겨울 제주도에 머물면서 기반공사에 매달렸다. 30㎝만 파도 단단한 바위 더미가 나오는 척박한 땅이었다. 포클레인을 동원하고 다이너마이트로 암반을 깨뜨려 걷어냈다. 거기에 너비 50㎝, 깊이 1m의 구덩이를 파고 객토(客土)를 채웠다. 겨울 내내 농장에 천막을 쳐놓고 밤잠 설치며 일했다. 제주도와 기후가 비슷한 일본 시코쿠(四國) 지방에서 2년생 감귤묘목 4만9840주를 사 와서(주당 110원) 구덩이에 심었다. 3년쯤 지나자 밀감이 열리기 시작했다.

시행착오가 많았다. 초기엔 돌담 옆에 심은 묘목이 거의 다 고사했다. 바닷바람이 돌담에 부닥치면서 주변 묘목에 소금기를 남겼기 때문이었다. 돌담을 옮기고 측백나무를 심었다. 처음 열린 밀감엔 두서너 알의 씨가 생겼다. 일본 전문가에게 물으니 “혹시 탱자나무가 있으면 다 없애라”고 했다. 탱자꽃 화분이 감귤꽃에 붙어 열매에 씨가 생긴다고 했다. 과연 탱자나무를 뽑아 없애니 밀감에 씨가 사라졌다.
 
박정희 대통령이 제주도 감귤농원을 시찰할 때 써준 휘호 ‘억령위민(億鈴爲民)’. [중앙포토]
 72년 2월 박정희 대통령이 시찰차 제주도를 방문했을 때 감귤농원을 돌아보셨다. 나무마다 밀감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 것을 보고 흐뭇해하셨다. 박 대통령은 “큰일 해놨구먼”이라며 ‘억령위민(億鈴爲民)’이라는 휘호를 주셨다. 1억 개의 밀감 열매가 국민을 위해 달렸다는 뜻이었다. 그 글귀를 농장에 붙여놨다. 억령위민은 현실이 됐다. 제주도 곳곳에 감귤농장이 생겨났다. 70년대에 감귤나무를 대학나무라고 불렀다. 귤나무 한 그루를 키우면 자식을 대학에 보낼 만한 소득이 나온다는 뜻이었다. 이제 더 이상 일본에서 밀감을 수입해 올 필요가 없게 됐다. 제주도산 밀감은 가장 흔한 국산 과일이 됐다. 이를 부정축재로 몰아세운 신군부는 ‘위민(爲民)’의 뜻을 아는지 모르겠다.

 감귤농장과 함께 서산목장을 일궜다. 대규모 목장에 대한 구상은 박 대통령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68년 9월 호주와 뉴질랜드를 방문하고 돌아온 박 대통령은 낙농업에 진출하라고 기업인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선뜻 나서는 이가 없었다. 낙농은 투자자본의 회임 기간이 길 뿐 아니라 전망도 밝지 않았다. 그것은 누구도 하지 않았던 개척의 길이었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 그러나 누군가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내가 시범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대단위 목장을 할 만한 입지를 물색했다. 서산군 운산면 일대에 문화재관리국이 소유한 값싼 땅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입찰공고를 했으나 사려는 이가 없어 세 번이나 유찰된 땅이었다. 면적은 2143정보(640만 평)에 달하지만 경사가 심하고 토양이 벌겋게 산화해 있었다. 68년 말 2048만원을 6년간 분할상환하는 조건으로 이 땅을 불하받았다. 이듬해 1월 우리나라 기업목장 1호인 ‘삼화목장주식회사’를 설립했다.

 석회를 뿌리면 토양의 산성이 중화돼 목초를 심을 수 있다고 했다. 농림부가 무상으로 나눠주던 석회를 트럭으로 실어 와 눈이 온 것처럼 온 산이 새하얘지도록 세 번을 뿌렸다. 목초 씨앗은 이탈리아에 주문했다. 이탈리안라이그래스, 오처드그라스, 클로버 씨를 뿌렸다. 2년쯤 지나자 이탈리안라이그래스가 1m 높이로 키가 자랐다. 바람이 불면 목초의 파도가 넘실거렸다. 나는 그것을 녹파(綠波), 초록 파도라고 불렀다. 한우 송아지를 열 마리, 스무 마리씩 데려다 키웠다. 호주에서도 송아지를 구해 오고 임신한 소도 몇 마리 사왔다.

소를 키우는 일은 고되지만 보람이 있었다. 소들이 어떻게 추위를 견디는지 보기 위해 나는 파카를 뒤집어쓰고 한겨울 야외 사육장에서 밤을 지새우기도 했다.

한데 모인 소들이 서로 몸을 비비며 겨울밤 추위를 이겨내는 모습을 관찰했다. 암소가 새끼를 낳을 때는 내가 직접 손으로 새끼를 끄집어내 주기도 했다. 쌍둥이를 낳은 암소엔 꽃목걸이를 만들어 걸어줬다.
 
73년 8월 여름휴가를 맞아 서산 목장을 찾은 김종필 국무총리가 목장의 소들을 살펴보고 있다.
 목장엔 서울대 수의학과 학생들이 실습을 왔다. 교육을 맡은 육사 동기생 강창진은 소똥을 실습생들을 향해 던지면서 손으로 받으라고 했다. 소똥의 냄새가 고약하지 않고 구수하게 느껴져야만 비로소 소를 기를 자격이 된다고 가르쳤다. 이는 내가 낙농을 배우러 뉴질랜드를 찾아가 배워 온 것이었다. 목장에서 키우는 소는 점점 불어나 79년 말이 되자 1339두로 늘어났다. 전중윤 삼양식품 회장과 허채경 한일시멘트 회장은 서산목장에서 기술을 전수받은 뒤 대관령에 각각 삼양목장과 한일목장(현 하늘목장)을 세웠다.

 나는 목장에 심은 나무 하나에도 정성을 들였다. 히말라야시더(개잎갈나무)를 심으려고 하니 임업자들이 그 나무는 추풍령 북쪽에서는 잘 크지 않는다며 말렸다. 나는 남이 안 된다고 하는 일을 보란 듯이 성공해내고 싶었다. 히말라야시더 묘목 2000주를 심었다. 이른 봄이 되자 묘목 중 고사하는 것이 많았다. 물이 모자랐기 때문이었다. 나무 주변에 둥그렇게 구덩이를 파고 물을 퍼 날라 간신히 살려냈다. 지금은 그 히말라야시더가 울창하게 자랐다는데 나는 80년 이후로 가보지 않았다.

 신군부가 강탈해 갔을 때 감귤농원과 삼화축산은 내 개인 재산이 아니었다. 총리 시절인 74년 3월 운정장학재단을 세우고 감귤농장과 서산목장을 차례로 기증했다. 고재욱 동아일보 회장이 초대 이사장을, 최규남 전 문교부 장관이 2대 이사장을 맡았다. 이사는 서울대·고려대·연세대·이화여대·숙명여대 총장 같은 저명인사들이 맡았다. 재단 정관 제1조엔 “이 재산을 제공한 자는 앞으로 운영에 일절 관여하지 못한다”고 명시했다. 최규남 박사가 기증자의 이름만은 알리는 것이 좋겠다고 해서 내 호인 운정(雲庭)을 재단에 붙였다. 재단은 명실상부한 공익법인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5년간 전국 대학생 679명에게 2억6700만원의 장학금을 지급했다. 이튼 스쿨의 꿈이 영글어 가는 중이었다. 나를 부정축재자로 몬 계엄사는 제주 감귤농장이 28억원, 서산 삼화축산이 79억5623만원이라고 발표했다. 공익재단에 출연한 재산을 개인 재산으로 둔갑시키고 근거도 없이 평가액을 세 배 이상으로 부풀렸다. 몇 백원짜리 묘목을 사서 10년 넘게 공들여 키운 나무들이 한 그루에 몇 만원짜리로 계산됐다. 80년 말 감사보고서에 의하면 감귤농장 평가액은 9억9200만원, 서산목장은 26억950만원이다.

 훗날 많은 사람이 소송을 제기해 제주도 감귤농장과 서산목장을 되찾으라고 내게 권했다. 신군부의 재산 강탈이 부당하니 재판을 통해 찾을 수 있을 거라고 했다. 그러나 나는 환수 소송을 하지 않았다. 목장도 농장도 모두 대한민국 땅 위에 해놓았으니 그것이 누구 손에 넘어가더라도 대한민국의 재산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아쉬움이야 없을 수 없다. 한겨울 다이너마이트 터뜨려 가면서 내 손으로 일궈낸 농장과 목장이니 말이다. 하지만 소유자가 누구이든 이 나라에 이롭기만 하다면 나로선 유감이 없다. 그 혜택이 국민에게 돌아가기만 한다면 충분하다. 그것으로 나는 됐다. 하지만 해명은 들어야겠다. 올바른 역사 기록을 위해서라도 그것이 필요하다. 나는 나를 위해 재산을 만들지 않았다. 하물며 부정축재가 웬 말인가. 전두환이 나를 집권을 위한 희생양으로 삼으면서 왜 부정축재자로 몰아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사무사(思無邪)를 일생의 도리로 삼아 90 평생을 살아왔다. 35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신군부의 보안사령관 전두환은 해명이나 사과 한마디 없었다. 전두환도 권력에서 물러난 지 오랜 세월이 지났으니 이쯤에서 해명을 내놔야 한다.

● 소사전 이튼(Eton)스쿨=1440년 헨리 6세가 설립한 영국의 명문 사립 중·고등학교. 정식 명칭은 이튼 칼리지(College)로 런던 근교 버크셔주에 있다. 전교생은 1300명으로 남학생만 다닌다. 초기엔 가난한 학생이 위주였지만 점차 귀족 사립학교로 변모했다. 졸업생의 3분의 1은 명문 옥스퍼드대와 케임브리지대에 입학한다. 데이비드 캐머런 현 영국 총리를 포함해 19명의 총리가 이튼 출신이다. 윌리엄 왕세손과 해리 왕자, 작가 조지 오웰과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도 이곳을 졸업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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