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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점 연재] “나를 건드리면 내 시체를 먼저 보게 될 것이다”…JP, 보안사에서 나폴레옹의 최후를 떠올렸다

1980년 7월 2일 저녁 보안사 서빙고 분실에서 신당동 자택으로 돌아온 김종필(JP) 민주공화당 총재(가운데). 부인 박영옥 여사(왼쪽)와 딸 예리씨(오른쪽)가 JP를 부축했다. JP는 보안사에 연행돼 조사받으면서 공화당 총재직을 비롯한 모든 공직을 사퇴할 것을 요구받았다. [중앙포토]
 
지금은 없어진 보안사 서빙고 분실은 간첩혐의자를 조사하는 곳이었다. 대통령이 지시한 특명사항을 수사하기도 했는데 공식 이름은 국군보안사 대공처 수사단이었다. 1980년 5월 17일 심야, 내가 끌려갔을 때는 높은 담이 사방을 에워싸고 아름드리 나무들이 컴컴한 밤 그림자를 만들고 있었다. M16을 든 군인들이 한밤에 몰려와 어딘지 모를 곳에 나를 붙들어 갈 때 나는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국회 다수당의 총재를 영장도 없이 무력으로 협박하는 권력찬탈이 진행되고 있다. 그 우두머리는 필시 군부를 장악한 전두환일 것이다’.

[김종필의 '소이부답'] <82> 서빙고 분실에 갇히다
‘내 스스로 인간적 존엄 지키겠다’
나폴레옹 결기에서 영감 얻은 JP
“나는 5·16때 거사 주도했던 사람
원하는 대로 해준다…꾸미지는 마라”

  보안사 분실에 끌려가면서 19년 전 거사 때 생각이 났다. 61년 5월 16일 새벽, 서울 안국동 광명인쇄소에서 혁명공약을 인쇄하던 나는 시청 쪽에서 연달아 발사되는 총소리를 듣고 아연 긴장했다. 장면 총리를 잡으러 간 박종규·차지철 등이 체포에 실패하자 분을 못 이겨 허공에 대고 난사한 총성이었다. 혁명군은 죽기를 각오했기에 두려움이 없던 그때였다.

 
 

 서빙고에 기약 없이 갇힌 나는 많은 상념 속에서 자신을 추슬렀다. ‘보안사가 어떻게 나올지 모르겠지만 나는 인간적 존엄을 스스로 지킬 것이다. 나라의 책임 있는 지도자로서, 국무총리를 지낸 군의 선배로서, 거사에 목숨을 던져봤던 혁명가로서 명예심을 잃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의 황제 나폴레옹의 인생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승승장구하던 그가 워털루전투에서 영국 웰링턴 장군에게 패해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됐을 때 섬의 총독은 나폴레옹을 폭력으로 모욕하려 했다. 그때 나폴레옹은 이렇게 말했다. “당신이 나를 건드리려면 내가 시체가 되는 모습을 먼저 봐야 할 것이다.” 자기를 지키려는 나폴레옹의 결기(決氣)는 ‘서빙고 섬’에 갇힌 나에게 묘한 영감을 주었다.
 
1990년 폐쇄되기 전의 국군 보안사 서빙고 분실. 대지 2000여 평에 지어진 2층 건물이다. [중앙포토]
 내가 안내된 방은 건물 2층의 한가운데 있었다. 7~8평 규모로 비교적 널찍한 방이었다. 나중에 들으니 서빙고 분실에서 가장 넓은 조사실이었다. 침대와 화장실, 책상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남쪽 벽에 나 있는 창밖으론 푸른 한강이 내다보였다. 이튿날부터 조사가 시작됐다. 수사관들은 어떻게 조사했는지 나의 재산 목록을 들이대며 이것저것 캐물었다. 나를 부패와 부정 축재로 엮으려는 모양이었다. 나는 조사관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는 5·16 혁명을 주도했고 중앙정보부장과 국무총리를 해본 사람이오.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해야 하는 자네들에게 따져봐야 소용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네. 내게 이것저것 물을 필요 없소. 상부에서 지시하는 대로 하게. 나중에 내가 도장만 찍어주면 되는 것 아닌가.”

 너희들이 뭘 하려고 하는지 다 알고, 나도 조사에 협조하겠지만 엉뚱한 짓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메시지였다. 나의 이 말에 담당 수사관이 오히려 안도하는 듯했다. 내가 자기들이 설정한 방향대로 따라가지 않고 버티면 어떻게 해야 할지 걱정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그러나 사실무근한 것, 없는 것을 꾸며대서는 안 되네. 당신들이 조사한 기록은 언젠가 세상 앞에 드러날 것이고 그때 진실이 밝혀질 테니까.”

 그런 것들 중 하나가 수원 땅 얘기였다. 내가 수원에 굉장히 넓은 땅을 갖고 있다는 제보가 있으니 실토하라는 것이었다. 얼토당토않은 얘기였다. 누가 그러더냐고 힐문하자 수사관은 나와 가장 가까운 김모 국회의원의 형이 진술했다고 했다. 이 문제는 나의 강력한 요구로 자기들이 확인한 결과 사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이 났다. 거짓 진술을 한 그 김 의원의 형이 괘씸했다.

 또 다른 황당한 추궁은 서울 한남동에 있는 순천향병원에 관한 것이었다. 조사관은 “순천향병원이 실제로 총재님 것이 아니냐”고 몰아붙였다. 순천향병원의 설립자인 서석조 박사는 나의 오랜 주치의였다. 서 박사가 74년 병원을 세울 때 은행에서 설립 자금 일부를 대출받을 수 있게 해달라고 부탁해 내가 도와준 적이 있다. 보안사는 어디서 무슨 얘기를 들었는지 순천향병원을 내 재산으로 둔갑시켜 나를 몇천억원대 재산가로 부풀리려고 기를 썼다. 하지만 내 재산이 아닌 걸 어쩔 것인가. 이런 맹랑한 조사들을 받으면서 보름쯤 지났다.
 
중앙일보 1980년 5월 22일자 1면. 긴박했던 광주항쟁 속보와 사망자 발생 소식을 1면 톱으로 실었다.
 6월 10일 전후, 보안사는 내가 가진 모든 공직을 포기할 것을 요구했다. 나는 보안사 분실에 끌려갈 때 5·17이 쿠데타라는 것을 알아차리면서 내 것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나는 “당신들, 마음대로 해라. 당신네들이 나를 희생양으로 삼아 정권을 차지하려나 본데 원하는 대로 해주겠다. 부디 조국 근대화의 과업만은 중단 없이 추진해 달라”고 말했다. 이때 내가 그만둔 자리는 공화당 총재, 국회의원, 한·일의원연맹과 한·일의원친선협회 한국 측 회장, 5·16민족상 총재직이었다. 나는 ‘일신상의 사정으로 사퇴합니다’라고 적힌 여러 장의 공직 사퇴서에 서명을 해줬다.

 시민과 계엄군이 충돌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한 5·18 얘기는 바로 이튿날부터 전해 들었다. 충격이었다. 5월 18일 서빙고 분실 근처의 미8군 헬기장에서 남쪽으로 비행하는 헬리콥터 소리들이 하루 종일 들렸다.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수사관은 “광주에서 야단이 났다”며 상황을 설명해 줬다. 결국 신군부의 집권 야욕이 돌이킬 수 없는 화를 부른 것이었다. 5·18은 부조리로 시작한 정권의 필연적 코스였다. 5·17은 국민의 지지가 거의 없었다는 점에서 정권 찬탈일 뿐이었다.

 5·16을 쿠데타라고 하는 사람이 있지만 대다수 국민의 압도적 지지를 받았기에 그것은 혁명이었다. 사상계의 장준하 발행인이 5·16을 인정하는 사설(61년 6월호 권두언)을 썼을 정도다. 오죽하면 윤보선 대통령이 "올 것이 왔다”고 하지 않았는가. 여론이 혁명군 편이었기 때문이다. 국민에겐 물론 군 내부에도 피 한 방울 요구할 필요가 없었다. 여기에 5·16의 진정한 혁명성이 있다고 할 것이다. 5·17 정권 찬탈이 결국 시민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진 현실을 접하면서 힘이 없어서든 욕심과 분열 때문이든 정치인으로서 미리 막아내지 못한 데 대해 한없는 회한과 자책이 가슴에 사무쳤다.

 보안사 사람들은 나한테 손을 대지는 않았다. 하지만 밤마다 사방에서 고문을 받아 내지르는 비명 소리를 듣는 것이 또 다른 고통이었다. 조사관은 가끔 내게 “방에 있는 게 답답하면 밖에 나가서 좀 걸으시겠느냐”고 묻곤 했다. 나는 산책이든 운동이든 거절했다. 움직이지 않았다. 영어(囹圄)의 신세가 됐으면 그건 그것대로 내가 소화해야 할 운명이었다. 밝은 운명이 오면 밝게, 어두운 운명이 오면 어둡게 삶의 색조를 조금씩 조정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대신 나는 그에게 읽을 책을 갖다 달라고 했다. 집에서 온 책들 가운데 나폴레옹을 다시 봤다. 나폴레옹 전기는 하룻밤에 한 권씩 독파(讀破)해 나갔던 일제하 중학생 시절, 나를 격정과 흥분으로 몰아넣었던 책이다. 나의 독서벽은 난독(亂讀)에 속한다. 그러나 역사를 좋아했고 특히 인물의 전기를 좋아했다. 역사는 사건이 기록되는 것이 아니라 사람이 기록해 나가는 것이라는 믿음을 나는 갖고 있다.
 
1815년 영국 군함 벨레로폰호에 실려 대서양의 고도인 유배지 세인트헬레나섬으로 가는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스코틀랜드 출신 화가 윌리엄 퀼러 오처드슨 이 1880년 그린 유화 작품의 일부다. [중앙포토]
 나폴레옹이 52세에 숨진 세인트헬레나섬은 영국이 지배하는 대서양 한가운데 절해고도(絶海孤島)다. 내가 54세에 감금된 보안사 분실의 절해고도와 같은 단절감이 어쩌면 나폴레옹을 다시 상기하게 한 것인지도 몰랐다. 구라파의 패권(覇權)을 흔들고 천지가 무너지게 돌아다니던 나폴레옹이 그 감옥의 땅에서 어떻게 지냈을까. 나폴레옹은 비열한 총독의 감시 속에서도 황제의 위엄을 지켜냈다. 나폴레옹은 매일같이 시종을 거느리고 사륜마차에 앉아 섬을 한 바퀴 돌았다. 나는 이탈리아에서 이집트로, 러시아까지 누비며 프랑스 군 사령관으로서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던 승전 시대 나폴레옹의 삶을 상상했다. 나폴레옹은 죽을 때 세 마디를 남겼다. 유성(流星)…, 프랑스 군대…, 조세핀. 이국의 전쟁터에서도 젊은 나폴레옹은 조세핀을 욕망하고 그리워했다.

 절해고도와 같은 서빙고 분실에서 나는 나폴레옹의 혁명과 전쟁, 낭만과 사랑을 상상하면서 청소년 시절 익혔던 워털루 일본어 노래를 혼자 읊조렸다. “한없는 선혈들, 군대들… 워털루 워털루… 아~프랑스의 운명….” 올해가 워털루전투 200년이 되는 해다. 보안사에서의 46일간의 구금은 내 생애 가장 억압적인 환경이었지만 나폴레옹 덕분에 역사의 바다를 헤엄쳐 다닐 수 있었다. 신군부는 나의 내면의 자유마저 가둘 순 없었다.

◆보안사 서빙고 분실=서울 서빙고동 235 자리에 있었던 국군보안사의 보안사범 취조 건물. 1979년 10·26 때 김재규 중앙정보부장, 12·12 때 정승화 육군참모총장과 장태완 수경사령관, 80년 5·17 때 김종필 공화당 총재와 이후락 의원, 이세호 전 육참총장 등을 조사했다. 70~80년대 ‘빙고 호텔’이란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고문과 공포 수사의 상징으로 인식됐다. 90년 이곳에서 근무하던 윤석양 이병의 ‘민간인 사찰 양심선언’을 계기로 폐쇄됐다. 국군보안사는 91년 국군기무사로 명칭을 바꿨다.

◆워털루(Waterloo)전투=보나파르트 나폴레옹(1769~1821)의 마지막 전투. 1815년 2월 엘바섬에서 탈출한 나폴레옹은 파리에 입성해 공화주의자·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권력을 다시 장악했다. 루이 18세는 영국으로 도망했다. 나폴레옹의 재등장에 긴장한 유럽 각국은 영국을 중심으로 반나폴레옹 연합군을 구축하고 있었다. 나폴레옹이 연합군의 전열이 갖춰지기 전 선제 공세를 취한 게 워털루전투다. 유럽 질서의 주도권을 두고 벌어진 벨기에 평원의 대회전이었다. 웰링턴 장군이 지휘하는 영국군 9만5000명, 블뤼허 장군이 이끄는 프로이센군 12만 명에 나폴레옹 군대 12만5000명이 맞섰으나 프랑스군이 처절하게 패배했다. 이로써 나폴레옹의 100일 천하는 끝났다. 그는 대서양의 절해고도인 세인트헬레나섬으로 유배됐다. 프랑스 혁명의 민족주의와 자유주의는 숨을 죽였다.
 
● 소사전 장준하(1918~75)와 5·16혁명=박정희 정권에서 3선개헌·유신 등에 반대하는 민주화운동을 했다. 1960~70년대 ‘사상계’의 사장 겸 발행인이었다. 61년 ‘사상계’ 6월호 권두언에서 5·16을 혁명으로 지칭하고 불가피성을 밝혔다. 다음은 권두언 일부. “5·16혁명은 부패와 무능과 무질서와 공산주의 책동을 타파하고 국가의 진로를 바로잡으려는 민족주의적 군사혁명이다.… 5·16혁명은 불행한 일이요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으나 위급한 민족적 현실에서 볼 때 불가피한 일이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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