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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443>탕샤오이-일본군 접촉에 장제스 "제거 준비 서둘러라"



공짜나 뇌물은 말할 것도 없다. 적당히 즐기는 거야 뭐랄 사람이 없지만, 술이건 도박이건 명품 수집이건 너무 밝히다 보면 허점이 보이기 마련이다. 망신은 기본이고, 비명횡사도 남의 일이 아니다.

처신이 깔끔했던 탕샤오이(唐紹儀·당소의)는 소문난 골동품 수집가였다. 도자기, 옥, 명인들의 글씨나 서적이라면 물불을 가리지 않았다. 가격도 따지지 않았다. 손자가 구술을 남겼다. “할아버지의 골동 취미는 남달랐다. 은퇴 후에 살던 공락원(共樂園) 창고에는 진기한 물건들이 많았다. 거의가 거금을 들여 구입한 진품들이었다. 감식력도 뛰어났다고 들었다. 가까운 친구들이 오면 함께 보며 즐겼다. 네 명의 부인과 자녀들(6남 13녀)에겐 별것도 아니라며 잘 보여주지 않았다. 값 나가는 물건인 줄 알면, 몰래 들고나가 팔아먹을지 모른다는 것이 이유였다. 할아버지는 골동벽(骨董癖)인지 뭔지 때문에 목숨까지 잃었다. 일본군을 피해 상하이를 떠나지 않은 것도 순전히 수장품 때문이었다.”

청말민초(淸末民初·청나라 말기와 중화민국 초기), 정치와 외교에 재능을 발휘했던 탕샤오이는 공산당을 혐오했다. 국부 쑨원(孫文·손문)이 공산당과 연합하자 정치에 흥미를 잃었다. 공산당과 결별한 장제스(蔣介石·장개석)가 정권을 잡은 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과 국가의 원로이다 보니 국민당 감찰위원과 국민정부위원 같은 한직은 맡았지만 나가도 그만이고, 안 나가도 뭐랄 사람이 없었다.

최고고문 직을 맡아 달라는 장제스의 간곡한 편지에도 답신을 보내지 않았다. 평일에는 강변을 거닐거나, 문 닫아걸고 시(詩)에 심취했다. 봄이 되면 총리 시절 각료들과 여행도 즐겼다. 자신의 명예를 소중히 여겼다. 사업가나 옛 부하들이 경비 부담을 자청하면 화를 냈다. “나는 일국의 외교관과 총리를 역임한 사람이다. 한때 대학 총장도 지냈다. 나를 폐물로 만들지 마라. 내가 지저분하게 굴면 국민과 국가의 격이 떨어진다. 제자들이 알면, 쓰레기 취급 당해도 변명할 말이 없다.” 정치 얘기는 하지도 않고, 듣지도 않았다.

중일전쟁 초기, 상하이를 점령한 일본은 남당북오계획(南唐北吳計劃)이란 걸 세웠다. 별 내용도 아니었다. “중국은 큰 나라다. 일본의 직접 통치가 불가능하다. 중국인을 통해 중국인을 제압(以華制華)해야 한다. 평화를 명분으로 장제스와 담판을 벌일 수 있는 인물을 우리 편으로 끌어들이는 것이 급선무다. 남쪽의 탕샤오이와 북방의 우페이푸(吳佩孚·오패부) 정도라면 해 볼만하다.” 일본은 소문부터 퍼뜨렸다. 탕샤오이의 이름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다.



국민당 최고의 정보기관인 군사위원회 조사통계국(軍統)은 일본의 계획을 간파했다. 특무요원들을 파견해 탕샤오이의 일거일동을 감시했다. 일본인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다른 사람 같으면 당장 없애 버렸겠지만,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특무들은 신중했다. 군통 국장 다이리(戴笠·대립)에게 보고만 할 뿐, 행동은 함부로 하지 못했다.

다이리의 보고를 받은 장제스는 불쾌했다. “동태를 더 엄밀히 파악해라. 탕샤오이는 국민당 원로다. 만에 하나 일본의 회유에 응하면 당과 정부의 명예가 손상된다. 선예후병(先禮後兵), 나는 예의를 갖추겠다. 너는 제거할 준비를 서둘러라. 증거가 잡히는 즉시 행동에 옮겨라.”

장제스는 인편에 탕샤오이에게 편지를 보냈다. “홍콩에 거처를 마련하겠다. 싫으면 우한(武漢)으로 와라. 지금 우리에게는 국제문제에 정통한 외교관이 필요하다. 외교위원회를 구성할 생각이다. 주석 직을 맡아주기 바란다.” 탕샤오이도 답장을 보냈다. “무슨 의미인지 알겠다. 안심하기 바란다. 망국의 노예(亡國奴)가 될지언정, 나라를 팔아먹는 짓은 하지 않겠다. 기회가 되면 홍콩으로 가겠다. 집안에 처리해야 할 일이 많다. 마치는 대로 몸을 움직이겠다.” 탕샤오이는 말뿐이었다. 상하이를 떠날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다이리는 암살 준비에 착수했다. 명품 도자기와 서화(書畵), 명(明)말 명장 척계광(戚繼光)이 왜구 토벌 때 착용했다는 보검 등을 고가에 구입했다. 군통 최고의 살인 전문가 중에서 3명을 선발했다. 지휘는 탕샤오이와 친분이 두터웠던 사람의 제자에게 맡겼다. “총은 사용하지 마라. 가급적이면 도끼를 써라.”

1938년 9월 28일, 새벽 중국주재 일본 특무기관 책임자가 탕샤오이의 집을 찾았다. 7년 전, 탕샤오이의 손자 한 사람이 아버지에게 들었다며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공개했다. “일본인은 할아버지에게 일본 점령지역에 새로운 정부를 출범시킬 예정이니 최고 직책을 맡아 달라고 했다. 내가 무슨 직책이었냐고 물었더니 그것까진 알 필요 없다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지금 생각해보니, 상세한 내용은 아버지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안다면 화 낼 이유가 없었다.”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에 있는 탕샤오이의 거처는 암살에 적합한 지역이 아니었다. 경찰들의 경비가 삼엄했다. 어찌나 심했던지, 주민들도 얼씬할 엄두를 못 낼 정도였다. 집안에도 경호원들이 많았다. 한결같이 사격에 능하고 무술의 고수들이었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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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