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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의 적벽가, 정수리에 찬물 붓둣 시원



연일 폭염이다. 음악보다 뜨거운 열기가 먼저 와 닿는다. ‘흰 당나귀 응앙응앙’ 울던 겨울밤이 그립고 ‘눈보라 날리는 백색의 계엄령’을 바라보던 시인이 부럽다. 눈 덮인 벌판을 생각하는 것으로 더위를 조금 잊을 수 있으려나.



‘삭풍은 늠름하고 서설이 비비헐 제, 산은 옥 같고 수풀은 은으로 장식을 한 듯, 만산평야에 백설이 분분허니 온 천하가 은빛이로구나.’ 박동진 명창의 판소리 ‘적벽가’ 중 삼고초려 장면에 나오는 대목이다. 특정 계절에 자주 듣게 되는 음악이 있다. 일명 시즌 송(season song)이다. 봄이면 요한 슈트라우스의 ‘봄의 소리 왈츠’ 나 버스커 버스커의 ‘벚꽃 엔딩’, 여름이면 DJ DOC의 ‘여름 이야기’, 쿨의 ‘해변의 여인’ 등이다.



내가 여름이면 찾아 듣는 시즌 송은 판소리 ‘적벽가’다. 정수리에 차가운 물을 내려 붓는 듯 한 명창들의 시원한 성음이 무엇보다 좋다. 한산 모시같이 깔깔한 인간의 목소리와 태곳적 몸의 기억을 자극하는 북소리의 단순함이 더위와 엉켜 붙은 번잡함을 달래는데 으뜸이다. ‘적벽가’가 여름에 더욱 친숙한 것은 오래된 추억 때문일지도 모른다. 소년들은 방학에 ‘삼국지연의’를 읽는다. 그리고 한동안 삼국지 놀이에 빠져든다. 적토마를 타고 긴 수염을 날리며 조조의 다섯 성을 돌파하던 관우와 혈혈단신으로 유비의 아들 아두를 구해 내는 조자룡의 활약은 소년들에게는 잊을 수 없는 유년의 기억이다.



‘삼국지연의’는 민간에 전승되던 이야기를 나관중이 정리한 책이다. 오랜 시간 저잣거리 관객들의 평가 속에서 박진감 넘치고 흥미로운 장면들만 살아 남은 것이다. 그렇게 추려진 이야기들 중에서 다시 한 번 최고의 장면들만 골라낸 것이 판소리 ‘적벽가’다. 인물들에 새로운 캐릭터가 더해지고 소리와 아니리(창 중간에 가락없이 이야기하듯 엮는 사설)로 새로운 옷을 입힌다. 삼고초려, 장판교 싸움, 적벽대전, 조조의 패주 등이 중심이 되어 한 판을 이룬다.



조선시대에 ‘적벽가’는 다섯 마당의 판소리 중 양반계층이 가장 선호하는 소리였다. 충의를 중심으로 한 유교적 내용과 중국 고전에 대한 친숙함이 작용했을 것이다. 하지만 ‘적벽가’가 양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에게 사랑을 받은 이유는 다른 곳에 있다. 먼저 ‘적벽가’에서 가장 두드러진 점은 무능한 정치인 조조에 대한 민중의 비웃음을 음악적으로 그려낸 정치성이다. 적벽에서 패전한 조조가 자신만 살기 위해 수염을 자른다거나, 너무 급히 도망가느라 말에 거꾸로 올라타고, 겨우 살만하다 싶으니까 적들의 병법에 대한 무지를 조롱하다가, 이내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장면 등이 그렇다. 승상이라는 권위나 위세도 별것 아닌 허울에 지나지 않음을 드러내는 민중적 평등성이 배어 있다.



두 번째는 전쟁터에서 이름 없이 사라져간 필부필남들에 대한 애정과 반전(反戰) 정신이다. ‘이 내 설움을 들어 보아라’로 시작하는 ‘군사설움’, 적벽에서 죽은 원혼들이 부르는 ‘새타령’ 등은 전쟁에 끌려나와 죽임을 당한 수많은 을(乙)들의 사연이다. 웃으며 듣다가 점점 느려지는 장단에 맞춰 스르르 눈물 고이게 만드는 ‘적벽가’ 최고의 명대목들이다. ‘적벽가’에는 18세기 고단한 민중의 현실이 반영되어 있으며 해학에 깃든 비판정신은 시대를 건너 현재에도 울림을 주기에 충분하다.



‘적벽가’는 일종의 무협 영웅담이다 보니 호방하고 웅대한 성음으로 소리의 이면을 그려내야 한다. 덕분에 과거에는 판소리 창자의 실력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기도 했다. 몇 가지 소리의 계보들이 있으나 현재 무형문화제로 남아 있는 것은 동편제 ‘박봉술 바디 적벽가’가 유일하다. 생전에 CF스타로 TV출연도 많이 했던 박동진 명창의 ‘적벽가’는 ‘조학진제’로 알려져 있다. 그는 동편제와 서편제를 두루 건너 자신만의 ‘적벽가’를 만들었다. 평단에서는 스승인 조학진에게 배웠을뿐 박동진 고유의 스타일이 많이 배어 있다고 말한다. 배운 소리를 그대로 그려내는 것은 광대로서 자랑할 만한 일이 아니라는 게 그의 음악관이자 판소리 창자들의 일반적인 정서다.



박동진 명창의 판소리 '적벽가' 음반은 두 번에 걸쳐 ‘적벽가’를 녹음한다. 완창 녹음은 그가 무형문화재로 지정되고 난 뒤 1974년에 이루어진다. 박 명창은 천봉월출(千峰月出)의 웅대하고 강건한 소리라기보다는 힘이 있으면서도 구수하고 친근감을 주는 소리다. 그래서 판소리에 처음 접근하는 이들이 가장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소리이기도 하다. 그는 재담과 즉흥성에 특히 강했다. 88년 국립창극단에서 공연한 실황 영상을 보면 고수 김동준과 얼굴을 맞대고 농담을 주고받는다. 늙은 두 광대의 애드립에 관객들 모두 박장대소한다. 박동진은 전투 중 한 병사의 입을 통해 죽어가는 마당에 잠시 좋아하는 시조를 하겠다며 관객을 소리 바깥으로 빼낸다. 그러다 이내 언제 그랬냐는 듯 “시조를 하려다 죽고…”라며 타령을 이어간다. 또 스승인 조학진 선생의 흉내를 내며 “아이고 어머니, 나는 여기서 죽소…”라고 일본어로 창을 하여 좌중을 폭소에 빠뜨리기도 한다.



전설의 광대를 무대에서 다시 만날 수는 없지만 그가 남긴 기록을 통해 우리는 흥겨운 소리 피서를 떠날 수 있다. 박동진 명창의 판소리 완창은 CD로 모두 4장, 약 5시간에 이른다. 살랑살랑 부는 선풍기 바람과 얼음 살짝 띄운 막걸리 한 사발, 그리고 ‘적벽가’ 한 대목이면 폭염을 무사히 건널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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