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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민 1500명 마을에 책 관광객 25만… 비결은 헌책의 마력

1 세계에 헌책방운동을 선도하는 리처드 부스가 그의 자택 서재에서 책의 매력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발터 베냐민은 “무질서가 질서로 보일 정도로 책을 어질러놓는 것이 버릇이 되는 것 말고 달리 무엇을 위해 책을 모은단 말인가”라고 했다. 이탈리아의 청바지 철학저술가 루치아노 데 크레센초의 『나는 무질서한 것이 좋다』를 우리 출판사가 펴내기도 했지만, 나는 무질서한 것이 때로는 질서정연함보다도 더 창조적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김언호의 세계 책방 기행] 영국 웨일스의 책방마을 헤이온와이

영국 웨일스의 헌책방 마을 헤이온와이를 만든 리처드 부스의 서재는 무질서했다. 헌책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는 헌책방운동을 세계인에게 제시한 그의 책방도 무질서했다. 헌책들은 태생적으로 무질서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모든 책은 헌책이다. 이 헌책들 속에서 실은 아름다운 이야기와 빛나는 정신이 발굴될 터이다.



 

2 헤이온와이의 야외책방. 독자 스스로 책값을 놓고 간다.



마구간과 농기구 창고가 책방으로4월의 대지는 온통 초록빛이었다. 런던에서 승용차를 빌려 지도를 보아가며 책방마을 헤이온와이를 찾아 나섰다. 봄바람에 실려 오는 흙냄새·풀냄새·꽃냄새가 이국의 대지를 달리는 여인(旅人)들의 심사를 흔들어놓기에 충분했다. 1994년이었다.



헤이온와이의 존재를 나는 뉴욕타임스를 읽고 알게 되었다. 궁벽한 시골에 있는 책의 유토피아에서 책 프로그램이 다채롭게 진행된다는 것이었다. 도리스 레싱 같은 작가들과의 대화가 진행되고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뮤지션들이 공연한다고 했다. 나는 열화당 이기웅 사장에게 가보자고 했다. 우리는 그때 한강 하류 파주 벌판에서 ‘출판도시’라는 거대한 실험을 한창 진행하고 있었다.



런던에서 네 시간을 달려 헤이온와이에 도착했을 때는 봄날의 오후였다. 이 골목 저 골목에 30여 책방들이 자리 잡고 있는 신비로운 풍경. 마구간에 책방을 열었다. 농기구 창고가 책방이 되었다. 우리는 이 책방 저 책방을 돌며 책 사냥에 나섰다. 어느새 서쪽 하늘엔 노을이 내리고 있었다. 나는 『책은 어떻게 만드는가』(How to make books)라는 담뱃갑 만한 책을 책 더미 속에서 발견했다. 100년 전에 만든 것인데 삽화까지 들어 있었다.



귀국하자마자 나는 출판도시 배후에 헤이온와이 같은 책방마을을 기획하고 몇몇 출판인과 구체적인 작업에 나섰다. 그것이 오늘의 ‘예술인마을 헤이리’다. 파주 금산리에 전해 내려오는 농요 ‘헤이리소리’에서 마을 이름을 따왔다. 책은 모든 문화예술의 기원이고 결과다. 예술마을 헤이리는 책과 함께 완성될 수 있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었다.헤이온와이는 잉글랜드와 웨일스의 접경지대에 있다. 주변이 탄광지대로 헤이온와이(Hay on Wye)는 ‘와이 강의 검은 마을’이란 뜻이다. 광부들이 살던 마을이었지만 폐광이 늘어나면서 쇠락하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 옥스포드대학에서 역사를 공부한 리처드 부스가 들어왔다. 어린 시절 침대맡에 촛불을 켜놓고 밤늦게까지 아서 랜섬의 동화책들을 정신없이 읽어대던 부스는 현란한 도시 런던을 버리고 쇠락해가는 마을에 헌책방을 열었다. 1962년이었다.“나는 책에 미쳤다. 책 읽는 게 좋았지만 책이라는 물건이 좋았다.”세계를 돌면서 헌책을 사들였다. 1980년에는 미국에 가서 컨테이너 100개에 책을 실어왔다.헤이 성(城)이 싸게 나왔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로 매입해서 거대한 책방으로 만들었다. 부스는 책을 구입할 때도 충동적이었지만 부동산을 매입할 때도 충동적이었다. 헤이 성의 확보는 헌책방 세계의 왕으로 군림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의 언론을 불러 모으는 재주를 가진 부스는 77년 4월 1일 만우절에, 헤이온와이를 ‘책의 왕국’으로 독립선언했다. 왕관을 쓰고 즉위식까지 하는 이벤트를 통해서 헤이온와이는 책을 사랑하는 세계인의 화젯거리가 되었다. 폐허가 되어가던 광산촌은 헌책으로 새로운 생명을 되찾는 책의 관광마을이 되었다.



그의 책방마을 운동은 유럽으로, 세계로 퍼져나갔다. 벨기에의 레뒤와 프랑스의 몽트뢰유를 비롯한 책방마을이 그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98년 4월 4일 헤이온와이 독립선포 21주년을 맞아 마을사람들은 부스를 전 세계 책방마을의 ‘황제’로 추대하는 또 하나의 일을 벌였다. 그는 “처음 이 소식을 듣고는 놀랐지만, 세계에 책마을을 만든 주역이니 황제가 될 사람은 나뿐이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면서 능청을 부렸다. 일간지 인디펜던트는 ‘괴짜 군주가 역사의 한 페이지를 넘기다’는 제목으로 이를 보도했다.



헌책 재활용 아닌 재사용에 초점 출판도시와 헤이리에 입주를 시작하던 2002년 여름, 나는 몇몇 동료와 헤이온와이를 다시 찾아갔다. 8년 만에 찾아간 헤이온와이는 더 활기차 보였다. 나는 부스의 자서전 『My Kingdom of Books』(1999)를 집어들었다. 책을 위해 삶의 전부를 던진 한 남자의 통쾌한 철학과 행동이 담겨 있었다(2003년 이은선의 번역으로 씨앗을뿌리는사람에서 『헌책방마을 헤이온와이』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2011년 봄 나는 출판도시의 책과 지식축제 ‘파주북소리’를 준비하면서 파주시 공무원과 출판도시 동료들이 함께 유럽의 문화시설을 답사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우리는 헤이온와이에 들러 황제 부스를 알현했다. 그는 왕관을 쓰고 우리 일행에게 헌책을 예찬하는 긴 연설을 했다.



“출판사들이 쓸데없는 책들을 계속 만들어낸단 말이야. 새로 만들어내는 책의 내용이 이미 헌책에 다 있다고. 같은 책을 계속 만들어내는 상업주의!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다룬 책이 1000종이나 돼. 인간은 나무로 종이를 만드는 게 문명이라고 생각하면서 인생을 시작하지만 인생을 마감할 즈음에야 나무는 나무로 존재하는 것이 더 좋다는 생각을 하지.”



지난 8월 초 나는 『조지 오웰』의 저자 고세훈 교수와 함께 헤이온와이를 방문해 부스를 만났다. 헌책과 헌책방마을에 대한 신념과 열변은 변함없었다. 헤이 성 책방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고 상징적으로 작은 책방을 유지하면서, 말과 글로 자신의 헌책방 철학을 펼치고 있다.



“유럽과 아시아에서 헤이온와이를 벤치마킹한 책방이 50개나 생겨났다. 이렇게 나가면 세계에 1000개의 헌책방을 만들 수 있다. 세계의 가난한 나라에 북타운을 만들어야 한다. 가난한 나라에 헌책방이 필요하다.”



부스는 매스미디어에 매우 비판적이다. 사람들의 의식을 획일적으로 이끌고 홍수 같은 정보로 무엇이 정말 우리에게 필요한지 분별하기 어렵게 호도한다.



“책은 우리를 연대하게 하지만, 매스미디어는 우리를 분열시킨다. 브로슈어들이 관광을 왜곡한다. 사람들을 가볍게 만든다. 얄팍한 브로슈어 때문에 아름다운 자연이 파괴되고 있다. 사람들은 브로슈어가 소개하는 지역만 찾아간다. 그러기에 북투어리즘(book tourism)이 더 중요해진다.”



부스는 자연을 파괴하는 정부의 관광정책에 비판의 목소리를 높인다.“영국이 나치와 같은 국가사회주의로 가는 걸 막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녹색경제(green economy)의 실현이다. 헌책이 녹색경제의 중심이 될 수 있고 지구온난화를 막을 수 있다. 재활용(re-cycling)이 아니라 재사용(re-using)되어야 한다. 헌책은 재사용이 가능하다.”



부스는 작금의 자신을 ‘트로츠키언’이라고 규정한다. 낭만적 혁명가 또는 영원한 이상주의자! 버킹엄궁은 그에게 저간의 공헌을 기려 대영제국 훈장을 수여했다.



예수님은 입으로 들어가는 것보다 입에서 나오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다. 먹는 것보다 말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의미다. 생각하는 것은 더 어렵다. 그래서 책 읽기가 우리의 숙제로 주어진다. 책의 심장(hearts of books)! 책은 생명이다. 인간의 삶을 새롭게 한다.



 

3 해마다 5월 말에 열리는 헤이페스티벌. 청소년을 위한 공연이 진행되고 있다.



“지구상 수십억 권 헌책 재사용이 녹색경제”800여 가구에 1500여 명이 살고 있는 헤이온와이에는 현재 책방 24개와 제책공방 2개가 있고 아트숍이 20개 있다. 마을 주변에 30개의 호텔이 있다. 11㎞ 안에는 BNB까지 80여 개 시설이 있다. 1년 방문객은 25만 명으로 집계된다. 매년 5월 말 ‘헤이페스티벌’이 열린다. 책을 위한 책의 제전이다.



88년에 시작된 헤이페스티벌은 문학가들이 중심이 되어 대화·강연·음악회 등 200여 프로그램을 진행한다. 28회째를 맞는 올해는 5월 21일부터 31일까지 열렸다. 15만 명이 다녀갔다.



뉴욕타임스는 헤이페스티벌을 “영어권에서 열리는 가장 중요한 축제”라고 평가했다. 토니 모리슨과 나딘 고디머 같은 노벨문학상 수상자, 빌 클린턴과 앨 고어 같은 정치인,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데스몬드 투투 주교가 참가했다. 마틴 에이미스와 이언 매큐언 같은 영국작가, 나이지리아 출신작가로 맨 부커상을 받은 벤 오크리, 맨 부커상을 두 번 수상한 여성작가 힐러리 맨텔, 『대륙의 딸』을 쓴 장융, 줄기세포연구로 노벨생리의학상을 받은 존 거든이 참가했다.



헤이페스티벌은 타임스·BBC·가디언·텔레그래프·뉴욕타임스·케임브리지대학·런던정치경제대학·워터스톤스(서점 체인)·영국박물관 등의 후원을 받는다.



올해엔 편지낭독(letters live)이 인기를 끌었다. 초청된 인사들이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편지를 낭독하는 프로그램으로 영화배우 주드 로가 나섰다. 작가 가즈오 이시구로가 신작 『묻혀진 거인』(Burried Giant)을 이야기했다. 바이올리니스트 나이젤 케네디가 연주했다. 올해는 마그나 카르타(인권대헌장)가 선포된 지 800주년이 되는 해다. 그 사상을 새롭게 인식하는 특별 프로그램이 기획되었다.



헤이페스티벌의 프로그램은 거의 유료다. 지난해에는 유료 티켓이 25만7000장 판매되었다. 올해 판매량은 24만2000장. 생각하는 저널리스트들의 후원이 이어지고 있다. 지식인·작가·예술가들의 헌신적인 참여가 수준 높은 프로그램을 가능하게 한다.



20세기에 이어 21세기의 문화유산이 되고 있는 책방마을 헤이온와이, 그것을 이끈 거인 부스의 철학과 문제의식. 그는 올해 77세다. 아시아와 아프리카와 남아메리카에서 책방 만드는 일을 도와달라는 요청이 이어진다. 중국에서 진행되는 책방마을을 돕고 있다. 나는 지난 2011년 파주북소리에 그를 연사로 초청했다. 그는 책의 힘, 책의 심장을 젊은이들에게 강연했다.



“이 지구에는 수십억 권의 헌책이 있다. 이를 재사용해야 한다. 가장 큰 녹색경제가 된다.”



 



김언호한길사 대표

포함의 아픔을 아직도 그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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