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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쿠우스는?내 안에 남아있는?순수함 찾는 과정”

시대를 관통하는 연극이란 흔치 않다. 무대는 동시대 관객을 전제로 만들어지고, 관객은 늘 새로운 것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그리스 비극이나 셰익스피어 같은 불멸의 고전을 제외하면, 바다 건너온 외국 작가의 현대극이 한 극단의 고정 레퍼토리로 꾸준히 공연된 사례는 거의 없다. 올해로 한국 초연 40주년을 맞은 ‘에쿠우스’(9월 4일~11월 1일 충무아트홀)는 예외다. 1973년 런던 국립극장에서 초연된 ‘현존 최고의 극작가’ 피터 쉐퍼의 대표작이자 ‘세계에서 가장 인기있는 연극’으로 꼽히는 ‘에쿠우스’는 75년 극단 실험극장이 국내에 처음 선보인 이래 2~3년에 한번 꼴로 끊임없이 앙코르되어 왔다.



초연배우 강태기를 비롯해 송승환·최재성·최민식·조재현 등 순수와 광기를 오가는 17세 소년 ‘알런’을 거쳐간 배우들은 모두 연극계를 대표하는 스타가 됐다. 올해의 ‘알런’도 예사롭지 않다. 지난 봄 예술의전당 기획연극 ‘페리클레스’에 아버지 유인촌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과 동반출연해 주목받았던(31)와 국내 최초의 10대 알런이자 ‘세계 최연소 알런’으로 화제몰이중인(17)가 그들이다.



초연 40주년 맞은 연극 ‘에쿠우스’ 주연 남윤호·서영주

‘에쿠우스’는 말 7마리의 눈을 쇠꼬챙이로 찌른 마굿간지기 소년 알런에 관한 이야기다. 말들을 지극히 아끼고 사랑했던 알런이 대체 왜 그랬을까. 무기력한 삶을 살던 중년의 정신과 의사 다이사트는 알런에게 말은 곧 생명이자 종교였음을 깨닫게 되고, 거꾸로 알런의 순수한 열정을 동경하게 된다. 욕망이 거세된 사회 속에서 규격화된 채 얌전히 살아가는 ‘정상인’들이 과연 신을 당당히 마주보는 알런의 순수를 비웃을 수 있을까.

서영주



“알런은 배우가 뿜어내는 열정 그 자체” 14살 차이 두 알런은 전혀 달랐다. 대입 수시가 며칠 남지 않아 “큰일났다”는 고3 수험생는 모성본능을 자극하는 사춘기 소년 그 자체. 2012년 영화 ‘범죄소년’으로 도쿄국제영화제에서 남우주연상을 수상했고 김기덕 감독의 영화 ‘뫼비우스’ 등에서 연기력을 인정받았지만, “첫 연극이라 떨린다”고 했다. “상이라곤 태권도 겨루기 상밖에 못 받아봤다”는도 앳된 외모는 큰 차이가 없었다. 서른을 갓 넘겼고, 무대 경력도 3년이 채 안된 풋풋한 신인이다. “저 나이에 이런 겁나는 역을 맡아 버티는 게 대단하다. 나라면 감히 못했을 것”이라고 겸손히 말했지만 여유있는 태도에서 배어나오는 자신감은 감출 수 없었다. 작품을 향한 진심과 역할에 대한 깊은 이해도 각자 뚜렷했다. ‘같은 작품 다른 무대’를 둘 다 놓칠 수 없는 이유다.



어려운 역할인데 어떻게 용기를 냈나요.(이하 서): 용기가 아니라 욕심을 냈는데 기회가 왔어요. 원래 20~30대 배우들 대상으로 오디션을 했는데, 주위에 해보고 싶다고 조심스럽게 얘기하고 다녔더니 막판에 한번만 보자고 연락이 왔어요. 그렇게 하는 거 아니라고 혼도 났는데, 저를 뽑아주셔서 정말 감사하고, 거기 보답하려고 용기내서 열심히 하고 있어요.(이하 남): 남자 배우로선 누구나 한번쯤 해보고 싶은 로망이니까요. 운 좋게 기회가 왔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이미 하셨던 분들이라 다 꿰고 계시고 저희는 그 흐름을 타야 하니 정신없이 쫓아가느라 바빴습니다.



알런은 굉장히 정서가 불안한 소년인데, 매력이 뭘까요. 서: 다들 정서불안이라 생각하지만 제 생각엔 순수한 사춘기 소년일 뿐이거든요. 알고 보면 아픔이 있는 아이고, 이런 상황에 놓였다면 다들 그랬을 거라고 공감하게 하는 것 같아요. 남: 배우가 무대에서 뿜어낼 수 있는 열정이 알런을 통해 잘 나열돼 있거든요. 역할 자체가 갖는 빠른 감정변화와 이면성,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관객을 이해시키는 스킬도 필요하고. 그런 부분이 배우로서 도전해보고 싶은 과제이자 매력인 것 같아요.



말을 자기만의 신처럼 사랑하다가 어느 순간 거기 도전하는 심리에 공감이 되나요. 서: 저는 도전이 아니라 말을 너무 사랑해서 그런 거 같아요. 말만 사랑하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됐는데, 하지만 말도 너무 사랑하니까 이런 모습 보지 말라고 눈을 찌른 거라고 이해하고 있어요. 남: 공감이 쉽지는 않죠. 하지만 배우로서 최대한 가까이 가야되니 다른 경험들을 가져와서 퍼즐조각처럼 감정을 맞춰가요. 무대에 올라가도 100% 완성은 아닐 것 같아요. 끝나는 날까지 모자라는 1% 를 채우려 계속 노력해 가는 게 연극이겠죠.



굉장히 순수하고 원초적 역할인데, 그런 면이 좀 남아 있나요. 남: 사실 알런 하면서 내가 때가 많이 묻었다는 생각을 했어요. 전에 ‘로미오와 줄리엣’을 할 때도 순수하고 조건없는 사랑을 해야 되는데, 얘들이 왜 사랑에 빠졌을까를 따지게 되더라구요. 알런을 하면서도 순간순간 성인인 저의 감정을 표출하고 있는 게 느껴지는데, 내 안에 남아있는 순수함을 찾아가는 과정 같아요. 그에 비해 영주는 아직 연애경험도 없고 술도 안 마셔 본 고등학생이니까. 다수의 연애경험과 모든 걸 접해본 저로서는 사실 그 순수함을 따라가기가 쉽지 않네요(웃음). 서: 저도 나름 순수하지 않아요(웃음). ‘범죄소년’ 같은 어두운 작품만 했으니…저도 이걸 하면서 진짜 열일곱 살로 돌아온 것 같아요. 형이랑 애들처럼 장난도 치고….



억눌린 욕망을 해소하는 사람과 해소 못하는 사람의 이야기인데, 두 사람은 어느 쪽인가요. 서: 연습하면서 해소를 많이 한 것 같아요. 원래 큰소리도 잘 못내는 성격인데 소리도 막 질러 보고…(웃음). 남: 기본적으로 현대인은 해소를 못하고 살죠. 그러니 알런도 남들 모르게 새벽에 혼자 말 끌고 나가 풀어버리고, 다이사트 외에는 아무도 알런의 진실을 모르잖아요. 사회규범 안에서는 ‘미친놈’이라고 가둬 버리니까. 그나마 예술가들은 해소하는 편이고, 그래서 저도 배우를 하지 않나 싶기도 하네요. ‘에쿠우스’는 지난해 알런 역 배우들이 국내 공연 최초로 전라 노출을 감행해 화제가 됐었다. 가식과 위선을 떨쳐 버린 진정한 인간성 회복이라는 희곡의 테마를 살리려면 사실 벗어야 지당하다. 하지만 올해는가 미성년자인 관계로 노출 수위가 조절됐다. 배우 입장에선 노출이 부담일테니 다행스럽지 않느냐고 물으니 돌아온 대답이 충격적이다. “처음부터 노출 걱정은 전혀 안했어요. 외설적인 게 아니라 알런의 자유스러움, 해방감을 보여주는 거니까요. ‘노출’이라니까 외설적으로 들리지만 전혀 아니죠. 나이 때문에 걸려서 속옷을 입어야 되는데, 이 작품에선 필요하다 생각해요. 사랑을 나누려면 벗어야 하는 게 맞죠. 오히려 보시는 분에게 죄송스러워요. 제 나이 때문이니까. 속옷을 입어도 알런의 자유와 해방감을 더 보여주려고 계속 찾고 있어요.”(서) “작품만 놓고 볼 때 필요한 장면이에요. 아담과 이브처럼 종교적인 의미가 있는 거니까. 저랑 영주는 나이 차가 있으니 좀 다르게 나올 예정이에요. 다 내려놓고 내 몸이 내 몸이 아니거니 하고 있습니다(웃음).”(남)

남윤호



“알런의 노출은 자유와 해방의 상징” 더블캐스팅이지만 연습은 늘 함께했다. 첫 리딩 때부터 하루 8~9시간씩 줄곧 같이 하면서 서로의 연기를 지켜보고 있다고 했다. “대충 해도 잘 하는 형이 더 열심히 하니 진짜 알런이 돼가는 것 같다. 매번 새로운 걸 꺼내놓는 걸 보면 정말 대단하다”고 치켜 세우는에게는 “영주는 백지에 그림 그리는 느낌”이라 응수한다. “아무 것도 지울 필요없이 그리고 싶은 걸 그리면 되는 깨끗한 상태가 알런 역에 잘 맞는 것 같아요. 감정기폭이 심한 역이라 배우가 자칫 테크닉에 기대기 쉬운데 알런은 그렇게 가면 안되거든요.” (남)



나만의 알런에 대한 욕심도 있겠어요. 남: 관객들도 그런 걸 기대하시겠죠. 초반에는 욕심을 많이 내서 정말 매일 새로운 카드를 꺼냈어요. 근데 어쨌든 남는 건 알런의 본질과 진심이더군요. 그외 사족은 다 들어냈습니다. 서: 저도 그 본질을 찾고 있어요. 아직 10대가 한번도 없었으니까 10대 만이 보여줄 수 있는 것도 찾고 싶구요.



‘에쿠우스’가 40년 동안 꾸준히 사랑받는 이유는 뭘까요. 서: 알런을 보는 재미도 있지만 다이사트를 보는 재미도 있다고 생각해요. 항상 다른 배우를 보는 재미 아닐까요. 남: 이번 다이사트 두 분만 해도 느낌이 전혀 달라요. 안석환 선생님은 날카롭게 파고드는 에너지, 김태훈 선생님은 크게 품어주는 느낌이죠. 배우들의 연기도 작품의 맛이지만 관객을 끌어당기는 건 작품의 힘이라 봐요. 요즘은 사는 게 힘들다보니 문화도 여가 즐기기 위주가 됐지만, 자기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도 반드시 필요한 거니까요. 아버지의 그늘을 벗어나려 이름도 바꿨다는는 ‘페리클레스’ 이후 부자관계가 밝혀져 오히려 아버지를 극복할 수 있게 됐단다. “숨기고 살 때보다 부담감이 없어지고 오히려 거리낄 게 없네요. 아버지에게 저를 더 보여줄 수 있었기에 틀을 벗어나 배우로서 한 단계 나아갈 수 있었구요. 이제 관객들에게 인정받는 방법은 제가 무대에서 잘하는 것뿐이겠죠.” “평생 배우를 할꺼라면 연극이 베이스가 돼야 한다”는 생각으로 무대에 오른다는 그는 “셰익스피어를 워낙 좋아해서 고전극에 욕심이 난다. 햄릿, 오이디푸스, 뜨레블레프 등 남자 배우가 꿈꿀수 있는 역할은 다 해보고 싶다”고 했다. 무대에서 쌓이는 에너지가 인간적으로도 깊어져 연기에 묻어날 거라는 믿음에서다. 대학에 가서도 무대에 설 것이라는 역시 “셰익스피어를 하고 싶은 건 어쩔수 없다”고 말한다. “지금은 너무 부족한 점이 많아 폐 끼치는 것 같아 죄송스러워요. 리딩 때도 제가 한 장 넘기는데 두 시간이 흘러갔으니까요. 그렇게 힘들었는데 할수록 재미있네요. 그게 한번 빠지면 못 헤어나오는 연극의 매력인 것 같아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극단 실험극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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