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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울한 현실 풍자한 ‘디즈멀랜드’

영국 브리스톨의 해변도시 웨스턴 슈퍼메어에 개장한 디즈멀랜드. 세계에서 가장 당혹스러운 테마파크를 지향하는 만큼 음침하고 침울한 분위기로 가득하다. 신데렐라 성을 중심으로 펼쳐진 전경이 디즈니랜드를 연상시킨다.



“당신의 삶에서 무언가 빠져 있습니까?” 시리얼에 우유를 붓던 평범한 아침 식사는 범상치 않은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질문으로 인해 반전된다. 무언가를 더 알고 싶다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곳으로 오라니. 망설일 이유가 없지 않은가. 허겁지겁 차에 올라타 도착한 곳은 ‘디즈멀랜드(Dismaland)’. 이는 8월 22일(현지시간) 영국 브리스톨의 해변도시 웨스턴슈퍼메어에 새롭게 문을 연 디즈멀랜드가 공개한 트레일러(예고편)에 담긴 내용이다. 하지만 가족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꿈과 환상의 유원지(Amusement Park)’가 아닌 ‘침울하고 당혹스로운 테마파크(Bemusement Park)’다. 놀이기구부터 선물가게까지 있을 건 다 있지만 어딘지 모르게 오싹한 기운이 감돈다. 얼굴없는 거리의 아티스트로 유명한 ‘뱅크시(Banksy)’가 기획한 새 프로젝트이기 때문이다. ?



거리의 낙서화가 뱅크시의 새로운 실험



 

작은 사진은 이번 전시를 총괄 기획한 뱅크시가 홈페이지에 게시한 자신의 모습.



뱅크시. 이 이름이 낯설 수도 있다. 25년간 영국은 물론 세계 곳곳의 담벼락을 대상으로 그림을 그려 왔지만 한 번도 정체를 드러낸 적이 없기 때문이다. 1974년생 브리스톨 출신이라고 추정될 뿐, 본명과 얼굴을 아는 이도 없다. 그 스스로 “사람들이 나는 두 번 죽을 것이라고 하더라. 한 번은 숨이 멎는 순간이고 다른 한 번은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순간”이라고 말할 정도다.



하지만 그의 그림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래피티 아트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검은 모자와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폭탄이 아닌 꽃다발을 던지는 남자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제복을 입은 경찰 두 명이 키스를 하는 장면이라든가, 혹은 영국 근위병이 담벼락에 노상방뇨를 하고 있는 장면도 있다. 그것도 아니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얼굴에 스마일 캐릭터가 붙어 있다거나, 모두 시들어버린 반 고흐의 해바라기 그림이라도. 이렇듯 그는 체제에 반(反)하면서도 유머 감각을 잃지 않는 품격있는 거리 예술가다.



그러니 뱅크시가 테마파크라는 소재를 가져온 것도 전혀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는 영국 가디언과의 인터뷰에서 “테마파크 보다 큰 테마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 테마”라며 “이번 전시의 본질은 예술과 오락, 초급 레벨의 아나키즘 축제”라고 밝혔다. 지극히 정상적인 사물을 뒤집어봄으로써 도리어 쉽게 반문화를 경함할 수 있도록 그딴에는 친절한 배려를 베푼 셈이다.



이곳이 버려진 수영장이라는 점도 한 몫 했다. 인터뷰를 거의 하지 않는 그이지만 이번만큼은 “박물관은 예술을 즐기기에 적합하지 않은 장소”라며 “예술작품에게 가장 나쁜 컨텍스트는 다른 예술작품”이라는 의견을 피력했다. 대신 미술관에 가는 1%가 아닌 앨튼 타워에 가는 99%의 사람들이 가장 예술작품을 보러 가고 싶어하는 장소가 어딜지를 놓고 고민했단다. 그렇게 얻은 답이 바로 ‘커피’다. 그래서 그는 카페가 있고 칵테일 바가 있는 장소에서 작품을 보여주는 방법을 택한 것이다.



개장하기 전까지 지역 주민들도 “영화 촬영장 만드는 걸로 알고 있었다”할 만큼 비밀리에 진행된 이번 프로젝트는 공개되자마자 폭발적인 반응을 얻고 있다. 3파운드(약 5600원) 짜리 입장권(예약비 2파운드 별도)을 구하기 위해 전세계에서 600만명이 동시접속하는 바람에 사이트는 다운됐고, 무려 20배가 뛴 600파운드(약 108만원) 짜리 암표가 나돌기 시작했다. 하루 4000명까지 수용이 가능하지만 현재 오픈된 15일까지의 티켓은 전부 매진된 상태다.

디즈멀랜드엔 꿈과 환상이 아닌, 풍자와 반문화가 넘쳐난다. 호박마차를 끄는 말들은 죽어 있고, 여유를 즐길라치면 새들의 습격을 당한다. 자국의 수상은 물론 유럽행 보트 난민까지, 정치 현안에 대해서도 거침없이 다룬다. 가히 아나키즘의 축제답다.



야망은 현실에 안주하는 것만큼 위험합니다” 디즈멀랜드를 즐기는 방법은 절차상으로 보면 여느 테마파크와 다를 게 없다. 디즈니랜드의 신데렐라성 로고를 닮은 성이 그려진 팔찌를 차고 입장하면 보안 구역이 나온다. 검색대와 신체 스캐너 모두 가짜지만 검문 요원들의 태도는 사뭇 진지하다.



검문이 끝나고 나면 곧 무너져 내릴 듯한 성이 관람객을 맞는다. ‘인어공주’의 아리엘이 마치 다운로드 받다 멈춘 영상처럼 잘게 조각난 형태로 전시돼 있고 성 앞에는 북아일랜드에서 사용되던 경찰 밴이 물 속에 쳐박혀 있다. 미키마우스 머리띠를 쓴 스태프들은 “나는 바보다”라고 쓰여진 검은색 풍선을 들고 낮은 목소리로 환영 인사를 읊조리며 음침함을 더한다. 뱅크시는 대변인을 통해 “이번 전시는 디즈니를 비꼬는 것이 아니다. 이 공원에서 디즈니를 형상화하는 것은 금지한다”고 당부했다.



1만 ㎡에 달하는 공간은 18개 코스로 나눠져 있다. 이중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성 안에 마련된 호박마차. 마차를 끌던 백마는 죽은 듯 납작 엎드려 있고 신데렐라는 고꾸라져 몸의 반은 창문 밖으로 나와 있다. 하지만 파파라치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쉴새없이 플래시를 터트린다. 고 다이애나비를 연상시키는 모습에 사람들은 쉽게 말을 잇지 못한다.



뱅크시의 풍자정신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사신은 범퍼카를 탄 채 씨익 웃으며 지나가고 난민이 탄 보트를 조종할 수도 있다. 데미안 허스트ㆍ제니 홀저 등 현대미술 작가 60명이 참여한 만큼 각양각색의 작품들을 만나볼 수 있다. 이번 전시에 참여한 제프 질레트는 CNN과의 인터뷰에서 “전시를 준비하며 뱅크시와 직접 만난 적은 없다. 작품에 따라 웃을 수도, 화가 날 수도 있겠지만 다른 어떤 것보다 깊이있는 엔터테인먼트를 즐길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저소득층 가족이 완벽한 관객이라고 표현했지만, 아이들에게는 다소 버거울 수도 있다. 밝고 아름다운 세상에 반하는 장면이 곳곳에서 연출되는 탓이다. ‘용돈 대출’ 코너에서는 얼마든지 외상으로 장난감을 살 수 있지만 트램폴린에서 뛰는 순간 5000%라는 이자율을 볼 수 있다. 그뿐일까. 어떤 동물이 들어있는지 맞히면 무료 핫도그를 받을 수 있다거나 돌아가는 회전목마 사이에 쌓여있는 라자냐 박스는 잔혹동화에 가깝다. 물론 안내방송도 나온다. “잊지 마세요, 야망은 현실 안주만큼이나 위험합니다.”

1995년부터 25년 간 얼굴 없는 그래피티 아티스트로 활동하고 있는 뱅크시의 캔버스는 영국 담벼락에 그치지 않는다. 근엄하기 짝이 없는 근위병 등 기성체제와 맥도날드로 대표되는 상업성에 태연하게 반기를 든다. 팔레스타인 가자지구에 그래피티 월을 꾸미는 등 날로 공공미술의 영역을 확장하고 있다. 운이 좋으면 박물관과 미술관 곳곳에서 그의 깜짝 전시를 만나볼 수도 있다. 런던 테이트 미술관에서는 2시간 30분을 버텼고 자연사박물관에서는 영구 소장품으로 남게 됐다.



“박물관·미술관은 작품 즐기기에 좋은 장소 아니다” 이번 프로젝트는 팝 아티스트로 거듭나고 있는 뱅크시의 실험인 듯 하다. 사실 그의 트레이드마크가 된 스텐실 기법도 경찰에 붙잡힐 염려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가 고안한 실험의 결과물이었다.



그는 최근 국내 출간된 작품집『월 앤 피스(Wall and Piece)』(세리프)를 통해 열여덟 살의 일화를 고백했다. 밤새 열차 벽면에 글자를 쓰다 나타난 경찰을 피해 덤프트럭 밑에 서서 한 시간 동안 엔진오일을 맞으며 그림 그리는 시간을 줄이든지 아니면 그림을 포기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단다. 그 때 그에게 영감을 준 게 연료탱크 밑에 스텐실로 새겨진 글자들이었다. 이후 그는 2만원도 안 되는 재료로 35초 만에 그림을 완성할 수 있는 최고의 무기를 갖게 됐다.



2000년대의 뱅크시는 주로 공간이 가진 의미를 비트는 작업을 해 왔다. 하얗게 칠한 벽 위에 ‘그래피티 허가 구역’이라고 써놓고 다른 그래피티 아트로 채워지는 모습을 지켜본다거나 자신의 작품을 몰래 대영박물관ㆍ루브르박물관 등에 전시해 놓고 사람들이 어떻게 감상하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그는 작품집을 통해 “다른 대중 예술과 달리 미술계에서 성공은 관객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힌 바 있다. 우리가 보는 미술 작품은 단지 소수의 사람들이 기획하고 홍보한 전시이기에 갤러리에 가는 것은 백만장자의 장식장을 구경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는 뜻이다.



하지만 그 역시 크리스티나 아길레라ㆍ브래드 피트 등 셀러브리티가 사랑하는 미술가가 되면서 다시 한번 재정비가 필요해졌다. 팔레스타인 가자 지구의 분리 장벽에서 그림을 그린다거나 디즈멀랜드와 같은 테마 공간을 만드는 것도 아마 다시 본질에 다가서기 위한 노력일 것이다. 나무라는 사람도 없고 바로 철거될 일도 없으니 일석이조이기도 하다. 이달 27일 디즈멀랜드가 폐관하면 공공서비스를 행하는 이 ‘미술계 로빈 후드’의 다음 캔버스는 어디가 될지 자못 궁금해진다. ●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사진 게티이미지ㆍ세리프ㆍ외신종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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