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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화병은 있다, 참는 게 능사 아니다

[일러스트=강일구 프리랜서]

몸이 아니라고 말할 때
게이버 메이트 지음
류경희 옮김, 김영사
520쪽, 1만8000원


‘적절하게 표출되지 못한 감정은 몸의 이상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이 책의 기본 컨셉트는 동양인인 우리에겐 매우 익숙하다. 하물며 한국어에는 이런 상태를 표현하는 전문(?) 용어까지 있지 않은가. 바로 ‘화병(火病)’이다. 마음의 문제가 어떻게 몸의 병으로 이어지는가에 대한 연구. 말하자면 이 책은 ‘화병의 매커니즘’을 밝힌 책이라 하겠다.

 서양인들에게도 스트레스가 만병의 원인이란 인식은 일반적이지만, 정작 서구의 정통의학은 신체를 정신으로부터 분리된 존재로 설명하는 데 오랜 기간 집중해왔다. 마음의 문제를 강조하는 주장을 민속신앙 정도로 치부하려는 경향은 아직도 굳건하다. 캐나다의 내과 전문의인 저자는 사람들의 감정 대처 방식이 만성질환의 발병요인이 될 수 있다는 글을 신문에 투고한 후 다른 의사들의 혹독한 공격을 받았노라고 말한다. 의사들은 환자의 병을 진찰하는 과정에서 “삶의 개인적·주관적 내용을 자세히 들여다보라”고 권유하지 않는다. 오히려 많은 환자들이 면담 과정에서 “의사들이 그런 일을 만류한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저자는 다른 의사들이 하지 않는 일을 했다. 그의 환자 중 한 명인 메리는 바느질용 바늘에 찔려 생긴 손가락 끝의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상처는 치료를 해도 낫지 않았고, 손가락에 혈액을 공급하는 미세 동맥 혈관이 좁아지는 ‘레이노 현상’과 함께 괴저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녀의 병은 이후 피부가 딱딱하게 굳어가는 피부경화증으로 발전한다. 원인을 알 수 없는 병 앞에서 막막해진 저자는 어느날 충동적으로 메리의 인생 이야기를 듣기 시작했다. 학대하는 부모 아래서 동생들을 돌보며 자란 그녀는 타인의 욕구에 자신을 맞추는 삶에 완전히 길들여져 있었다. 남편은 물론 누구에게도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다. 저자는 생각한다. “그녀의 피부경화증은 이같은 것을 모두 포괄하는 그녀의 의무감에 대해 몸이 마침내 거부를 한 방식은 아니었을까.”

 뇌와 면역계의 관계를 연구하는 ‘정신신경면역학(psychoneuroimmunology)’은 학문 자체의 짧은 역사에도 불구하고 개인의 감정구조나 지속적인 스트레스 반응이 수많은 질병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조금씩 밝혀내고 있다. 특히 환자 자신의 면역계가 스스로의 신체를 공격하는 자가면역 질환들은 심리 상태와 깊은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어떤 상황에서 어떤 종류의 스트레스를 받는가는 개인적인 기질과 경험에 따라 다르다. 하지만 스트레스는 공통적으로 인간의 호르몬계와 림프선, 소화기의 내벽에 영향을 미친다. 피부경화증, 류머티즘 질환, 염증성 장 질환, 당뇨병, 다발성 경화증의 실질적 발병요인이라는 연구결과가 이미 나와 있다.

 책에는 저자가 만난 환자들뿐 아니라 면역계 질환을 앓은 유명인의 사례도 다양하게 등장한다. 아직도 원인이 밝혀지지 않은 ‘근위축성 측색 경화증’은 루게릭병이라고도 불리는 데 이는 이 병으로 숨진 야구선수 루 게릭(1903~1941)의 이름에서 따 온 것이다. 뉴욕 양키스 1루수였던 루 게릭은 팬들과 구단에 대한 과도한 의무감을 갖고 있었다. 질병과 부상을 숨기며 경기에 계속 나가 2130경기 연속 출전기록을 세웠다. 자신에게는 더 없이 엄격했지만 타인들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했다.

자신에 대한 혹독함과 타인에 대한 배려의 극단적 대비는 루게릭 환자들의 공통된 특징으로 지적된다. ‘왜 루게릭병 환자들은 그렇게 친절한가’라는 제목의 논문이 나왔을 정도다.

 결국 저자는 “자기 욕구를 생각하기 전에 다른 사람들의 욕구부터 충족시키려는 성향은 만성질환 환자들의 공통적인 패턴”이라고 말한다. 이런 대처 방식은 심리적 차원에서 자기와 타인 사이에 혼동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 같은 혼동은 몸에서도 나타난다. 그래서 자신을 지켜야 할 면역세포들이 스스로의 조직을 공격한다. “‘아니오’라고 말하는 법을 배우는 것을 방해받으면 우리의 신체가 그 말을 대신할 수 있다.”

 책의 주장은 민감하다. 병에 걸린 사람에게 “당신 책임”이라고 말하는 것은 가혹하다. 저자 역시 이 책이 질병이나 죽음에 굴복한 누군가를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서도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자기 자신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될수록 수동적인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자신의 마음과 몸을 들여다보며 불안·답답함·분노 등 감정의 적신호와 두근거림·발한·두통 같은 신체의 적신호를 포착해내라. 억눌려온 화를 가끔은 폭발시켜 면역계에 새로운 시동을 걸어라. 화를 꼭 적대적인 과잉행동으로 표출할 필요는 없다. 자신이 화난 것을 인정하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분출하거나, 혹은 그대로 확 놓아버리면 된다는 것이 저자의 조언이다.

이영희 기자 misquick@joongang.co.kr


[S BOX] 자기조절능력 키우기

어린 시절부터 감정을 있는 그대로 표출하지 못하고 억압당하며 성장한 경우 자기조절능력이 발달하지 못하게 된다. 자기조절능력이란 ‘적절한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처리하는 능력’을 말한다. 이 능력이 없으면 무기력이 만성화돼 스트레스를 받는 지도 모른 채 몸을 망칠 수 있다.

 따라서 아이들에게 “그렇게 감정적으로 굴지 말아라” 혹은 “예민하게 굴 필요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은 좋지 않다. 저자는 숨겨진 스트레스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는 최선의 예방약을 제시한다. 아이들에게 적절한 감정 처리를 위한 자기조절능력을 키워주는 것이다. 세분화하면 다음과 같은 능력이다.

 - 감정을 느끼며 현재 자신이 스트레스를 받고 있다는 것을 아는 능력.

 - 감정을 효과적으로 표출해 자신의 욕구를 주장하고, 감정 표출 정도를 스스로 인지하는 능력.

 - 현재의 상황으로 인한 심리적 반응과 과거의 잔재가 촉발한 심리적 반응을 구분하는 능력.

 - 다른 사람에게 받아들여지거나 인정받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반드시 충족시킬 필요가 있는 스스로의 진정한 욕구를 인식하는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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