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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려진 탄광·시장서 부활한 ‘정조의 디자인’

조선 제22대 왕 정조(재위 1776~ 1800)는 아름다움의 가치를 아는 리더였다. 조선의 계획적 신도시인 경기도 수원 화성을 축조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수원 화성의) 겉모양을 아름답게 하는 것도 적을 방어하는 데에 도움이 된다.”(『조선왕조실록』 정조 17년·1793년) 당시 신하들과의 대화에 나오는 내용이다. 신하들이 ‘튼튼한 축성’을 제안하자 정조는 ‘아름다움의 힘’을 이야기했다. 우리의 아름다운 모습은 적들의 기를 꺾을 수 있다는 발상이었다.

 건축가 승효상씨는 “수원 화성에는 18~19세기 세계를 휩쓴 ‘인문 정신’이 녹아 있다. 정조는 그 인문의 심장을 관통하며 화성을 지었다. 당시 수준으로 보면 ‘모던 시티(modern city·근대 도시)’였다”고 말했다.

 21세기 ‘정조의 꿈’이 도시 디자인의 이름으로 곳곳에서 부활하고 있다. 광복 후 70년 동안 우리는 국가 주도의 산업화를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했다. 이제 민간의 창의력이 중심이 되어 ‘유(有)에서 신유(新有)’로 진화하고 있다. ‘신유’는 새로 만든 용어다. 원래 있던 유를 없애지 않고, 그걸 디딤돌 삼아 재창조해내는 일이다. 재래시장이 예술시장이 되고, 낡은 여관이 갤러리가 되며, 폐광촌이 아트파크로 탈바꿈한다. 예술을 접목해 거듭나는 ‘도시 재생(再生)’이다.

 1959년 문을 연 광주광역시 금남로 근처 대인시장은 대표적인 재래시장이었다.

80년대 구(舊)도심의 쇠퇴, 2000년대 대형마트의 등장과 함께 문 닫을 위기에 처했다. 1000개가 넘던 점포는 350개로 쪼그라들었고, 그중 189개도 사실상 비어 있었다. 8년 전 지역의 청년예술가 6명이 시장에 들어와 ‘아름다움’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빈 점포에 창작 스튜디오를 열고, 시장통에 그림을 그렸다. 시장 귀퉁이에서는 ‘작은 공연’도 열었다.

 시장에는 활기가 돌았고 상인들은 시장 이름을 아예 ‘대인예술시장’으로 바꾸었다. 6명이던 예술가는 지난해 40명으로 늘었다. 격주로 예술 야시장이 열릴 때는 상인들 점포 매출이 세 배로 뛴다. 2011년 기준 1500명에 불과하던 시장의 누적방문객 수는 2015년 8월 현재 17만5000명으로 늘어났다. 2010년부터 이곳에 작업실을 열고 있는 이세현(32) 사진작가는 “시장의 에너지가 젊은 작가들과 어우러져 만들어내는 시너지가 크다. 시장도 살리고 젊은 작가들에게는 기회의 공간이 되고 있다”고 말했다.

 서울 통의동 보안여관은 80년 넘게 여관이다가 2004년 버려졌다. 1936년 서정주·김동리 등이 이곳에 머물며 ‘시인부락’ 동인지를 만들었던 곳의 말로치곤 초라했다. 낡은 목조 여관은 2007년 ‘예술숙박업소’로 환생했다. 이곳 최성우 대표는 “청년 문학도 시절의 서정주가 장기 투숙하던 곳임에 주목, 오늘날 젊은 예술가들의 인큐베이터로 삼았다”고 말했다.

 29일 오후 보안여관은 ‘국제예술시장’이었다. 2012년 일본에서 시작된 ‘인터넷 블랙 마켓’ 프로젝트가 이곳에 상륙했다. 미디어 아티스트, 디자이너, 인문학자들이 인터넷 감시 시대의 대안 상품을 파는 야시장을 열었다. 오후 4시부터 5시간 동안 1000여 명이 다녀갔다. 그간 연 전시와 퍼포먼스가 내년 초면 100회를 넘긴다. 16만5000명이 다녀갔다. 서태지의 컴백 앨범 ‘소격동’(2014)의 뮤직비디오 촬영지이기도 하다.

 60~70년대 한국 석탄산업의 구심점이었다가 2001년 폐광된 강원도 정선의 삼천탄좌정암광업소에도 ‘아름다움의 힘’이 들어갔다. 10년간 방치되다가 2년간의 리뉴얼 끝에 동굴미술관, 와이너리, 레스토랑으로 탈바꿈했다. ‘탄광의 기억과 근대 산업유산’은 이곳의 자산이다. 개관 2년을 맞은 올 상반기까지 9만여 명이 찾았다.

◆도움 주신 분=조광호 한국문화관광연구원 연구원, 시게히토 요시이 나가하마마을만들기 주식회사 총괄책임자, 류자영 부천문화재단 소각장 문화재생TF팀장, 신동근 남원시 문화도시사업팀장, 피터 토머스 영국 러프버러대 디자인대학 교수, 전규찬 러프버러대 교수, 성창현 보건복지부 건강증진과 과장, 김장수 한국디자인지식산업포럼 책임연구원.

백성호·권근영·한은화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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