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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대통령의 진심을 의심하는 이들에게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8월 25일 남북 합의로 전운이 감돌던 한반도에 화해와 신뢰의 서광이 비치고 있다. 남북 고위 당국자 사이의 피 말리는 43시간 협상이 가져온 보기 드문 쾌거다. 이산가족 재상봉은 물론 당국 간 대화채널이 복원되고 민간교류의 문이 활짝 열렸다는 점에서 이번 합의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8월 25일 합의에 대한 비판이 거세다. 정부가 말로는 북측이 ‘사과와 재발 방지’에 동의했다고 밝히고 있지만, 실제로는 ‘유감’이라는 표현에 그치고 있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는 것 아니냐는 불만이다. 이들은 ‘유감’을 ‘사과’로 환치하는 정부의 해명이 지록위마(指鹿爲馬) 같다고 비아냥대기도 한다. 또한 이번 타결을 전적으로 박근혜 대통령의 원칙론 덕으로 돌리는 정부 태도에 대한 거부감도 있다.

 이번 합의에 그러한 오해를 살 만할 측면이 있음은 누구도 부인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게 현대 외교의 본질이다. 헨리 키신저 전 미국 국무장관은 저서 『회복된 세계』에서 ‘빈 콩그레스’ 이후의 유럽 질서 구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전쟁의 논리는 힘이고 힘에는 본질적으로 한계가 없다. 평화의 논리는 비례이고 이는 곧 제한을 의미한다. 전쟁의 성공은 승리이지만 평화의 성공은 안정이다. 승리의 조건은 헌신인 반면 안정의 조건은 자제다.” 전쟁과 달리 평화는 숱한 제약이 따르는 외교협상의 결과라는 이야기다. 이렇게 놓고 보면 8·25 합의 또한 남북 쌍방이 자제와 양보를 통해 얻어낸 안정적 위기관리라 하겠다.

 솔직히 이번 합의는 불안한 시작에 불과하다. 넘어야 할 장애물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오는 10월 북이 당 창건 70주년을 기념해 추가 핵실험을 하거나 로켓이라도 발사하게 되면 상황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갈 수 있다. 5·24 조치 해제와 금강산 관광 재개도 아직 미제로 남아 있고, 일부 시민단체가 대북 비방전단이라도 살포하는 경우에도 남북관계는 다시 지극히 어려워질 수 있다.

 그러나 이럴수록 신중하고도 창의적인 정책 운용이 필요하다. 무엇보다 북에 보내는 시그널이 혼란스러워서는 안 된다. 8·25 합의 바로 직후인 지난 27일 우리 국방부 당국자가 신규 작계 5015와 적의 주요 군 지휘자들을 제거하는 ‘참수작전’ 등을 운운한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어렵다. 당국자 발언을 과장해 선정적 보도를 남발한 언론도 문제다. 언론 역시 진실성 여부와 사안에 미칠 영향을 고민하면서 보도해야 옳은 것 아닌가. 게다가 북한의 김정은이 군부 앞에서 남북 화해를 언급하는 동안 우리 대통령은 한·미 통합화력 격멸훈련을 참관하고 군을 격려했다. 아무리 을지 연습 중이라고 해도 뭔가 전후가 뒤바뀐 느낌이다.

 본질적으로 북한 체제의 속성은 성과를 중시하는 결과주의에 가깝다. 남북관계 개선이 북에도 가시적인 편익을 가져다준다는 것을 보여줘야만 다음 행동에 나선다. 예컨대 1차 이산가족 재상봉이 이뤄지고 정례화가 구체화되면 금강산 관광 재개로 화답하는 식이다. 민간교류가 전면적으로 활성화되면 5·24 조치의 탄력적 운영도 불가피할 것이다. 이 같은 가시적 이득을 보여줘야만 평양은 한층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북이 ‘비정상 사태’를 도발하지 않도록 세심한 예방외교를 전개하는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지금까지의 ‘제재와 압박’에서 ‘관여와 동행’으로 외교 정책의 기조를 전환할 필요가 있다. 당장 박 대통령은 9월 3일 전승절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방중해 시진핑 국가주석과 정상회담을 할 예정이다. 시 주석에게 ‘남북관계가 나아지고 있으니 북에 대한 제재와 압박보다는 관계 개선에 역점을 두기 바란다’고 넌지시 주문하는 것이 최소한 한·미·중 3국 공조를 강조하는 것보다 훨씬 6자회담 재개나 북한 핵문제 타결에 도움이 될 것이다.

 10월 방미 시에도 남북관계 개선을 지렛대 삼아 오바마 대통령이 보다 적극적으로 북한과 대화할 수 있도록 여건을 마련해줘야 한다. 물론 미국 국내 정치 일정을 감안하면 오바마 대통령이 자발적으로 대북정책 전환을 주도하기는 어렵겠지만, 박 대통령의 우정 어린 설득과 압력이라면 오바마 대통령이 대북정책을 변화시킬 명분을 제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방향을 가리키는 제스처 정도만으로도 이후 남북관계와 북·미 관계는 커다란 탄력을 받을 것이다.

 박근혜 정부는 이제 막 임기 반환점을 돌았다. ‘압박과 제재’가 아니라 ‘관여와 동행’의 새로운 구상으로 한반도와 동북아 외교의 주도권을 행사하기에 그 어느 때보다 좋은 타이밍이다. 그게 창조외교의 요체이자 남북 합의 이후 대통령의 진의와 속내를 의심해온 모든 이들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확증일 것이다.

문정인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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