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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사랑하기의 어려움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
몇 년 전 캐나다 토론토에서 엽기적인 살인사건이 일어났다. 베트남전 난민으로 캐나다로 이주한 한 가족의 슬픈 이야기다. 부모는 난민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자 자식에게 모든 것을 쏟아부었다. 자식은 그들의 미래였으며 보험이었다. B학점이 나름 ‘존경할 만한’ 점수로 여겨지는 캐나다 사회에서 부모는 딸에게 올 A를 강요했다. 그들에게 B학점은 용납할 수 없는, ‘경멸스러운’ 점수였다. 그러나 고학년에 이르자 올 A의 성취는 점점 어려워졌고, 딸은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이 두려워 성적표를 위조하기 시작했다. 딸은 결국 성적 미달로 고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했으나 위조의 범위는 점점 더 심해졌다. 딸은 부모의 기대대로 올 A로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 명문 토론토대 약학과에 다니는 것으로 성적과 모든 관련 문서를 위조했고, 부모가 원하는 ‘가짜 자기’의 모습대로 살아갔다. 딸은 병원에서 인턴으로 일한다고 부모를 속였고, 마침내 딸의 행각에 수상함을 느낀 부모의 추적에 의해 위조의 전모가 밝혀졌다. 부모는 딸의 휴대전화를 빼앗고, 외출을 금지시켰으며, 남자 친구를 만나지 못하게 했다. 결국 이 일은 딸이 남자 친구와 공모, 갱들을 동원해 부모를 살해하는 사건으로까지 비화됐다.



 『연금술사』 『순례자』 등의 소설로, 1억 부 이상의 베스트 셀링을 기록한 세계적인 작가 파울루 코엘류는 고등학교 시절 부모에 의해 무려 세 번이나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당했다. 성적이 나쁘다는 것 외에 일반적인 10대 청소년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사소한 방황’을 일삼던 코엘류는 정신병원에서 그때마다 혹독한 전기 충격요법에 시달렸다. 당시 코엘류를 담당했던 의사에 의하면 전기 충격요법은 물리적으로 뇌를 완전히 다시 세팅하는 것이었다. 과거는 사라지고 아무런 정보도, 기록도, 기억도 없이 뇌를 텅 비게 만드는 것 말이다. 어느 인터뷰에서 노년의 코엘류는 그로 인해 자신이 평생 트라우마에 시달렸으며, 어린 자신을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시켰던 부모들의 행동을 아직도 용서할 수 없다고 고백했다. 그는 자신의 부모들 역시 (그들 입장에서는) 자식을 위해 그런 짓을 했을 테니 용서받을 이유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정도의 차이야 있겠지만 우리의 ‘사랑’이 대체로 이처럼 속절없는 것이다. 나의 잣대로 타자(他者)를 전유(專有)하는 순간 타자는 사라진다. 가짜 사랑은 자신의 이름으로 타자를 지우고 그 자리를 ‘나’로 채운다. 사랑이 이처럼 나의 이름으로 타자를 죽이는 과정이라면 얼마나 끔찍한 일인가.



 레비나스는 타자를 “외재성(外在性·exteriority)”과 “무한성(無限性·the infinite)”의 개념으로 정의한다. 외재성이란 자아(나)의 바깥에 있으면서 동시에 자아(나)로 환원되지 않는 모든 것을 의미한다. 무한성이란 그 어떤 범주나 체계로도 환원되거나 포획되지 않는 타자의 속성을 지칭하는 것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나’의 바깥에 있는 모든 사람, 즉 자식·남편·부인·제자·애인·한 나라의 국민이 모두 타자다. 그 타자들은 ‘나’라는 자아의 지배 대상이 아니다. 타자들은 겉으로는 고개를 숙일지언정 자신에 대한 오만한 지배를 거부한다. 그러나 조종(핸들링)되지 않는 타자를 나의 그물로 나포하는 것을 우리는 종종 ‘사랑’이라고 부른다.



 제3세계를 지배했던 식민주의 논리도 타자를 자기화하는 것이었고, 그것을 ‘계몽’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했다. 모든 독재정권 역시 자신의 그물에 다수 국민을 가두고 그것을 ‘애국’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개인 단위에서 일어나는 수많은 ‘사랑’도 사실은 ‘타자의 자기화’인 경우가 허다하다.



 타자들은 나에게 ‘우연히’ 온다. 타자의 가까이 옴, 이 ‘근접성’이 바로 타자에 대한 책임성을 생산한다. 레비나스에 의하면 이것은 “사로잡히는 책임, 사로잡힘의 책임”이다. 그리하여 사랑은 능동적 지배가 아니라 타자 앞에 겸손히 엎드리는 것이다. 그 자리에서 타자에 대한 ‘환대’가 생겨난다. 그러나 이 엎드림은 얼마나 어려운가. 그래서 사랑은 궁극적으로 감성이 아니라 의지이고 고통이다.



오민석 시인·단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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