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부터가 더 문제다. 한 차원 높은 정책으로 새로운 남북 관계의 틀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서는 그동안 대북 정책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 기존 대북 정책의 문제점은 정책의 초점을 북한의 최고 권력자에게만 맞추고 있다는 것이다. 햇볕정책, 비핵·개방·3000, 한반도 신뢰프로세스 모두 북한 최고 권력자를 변화시키려 하거나 그의 태도 변화를 대북 정책 추진의 핵심 요건으로 간주한다. 그리고 비핵·개방·3000 정책과 한반도 신뢰프로세스의 초기에는 대북 관여의 행위자가 남한 정부로 한정되어 있다.
행위 주체를 한국 정부, 정책 대상을 북한의 최고 권력자로만 국한한 좁은 구도의 대북 정책은 실패할 확률이 높다. 무엇보다 사회주의 독재자가 마음을 고쳐먹고 스스로 개혁, 개방을 한 사례가 없다. 특히 유훈통치에 기초한 북한의 김정은 정권은 시장경제로의 체제이행이 자신의 권력에 치명적임을 알고 있다. 신뢰를 보이라는 우리 정부의 요구조차 자신을 흔들려는 시도로 간주한다. 이와 같이 좁은 구도의 대북 정책하에서는 남과 북이 대립, 갈등하는 구도가 지속될 것이다.

바람직한 대북 정책은 북한이 가장 필요로 하면서도 우리의 이익에 부합하는 사업에서 출발해야 한다. 지금 북한 정권이 가장 원하는 것은 외화수입이다. 원자재 가격의 급락과 중국 경제의 하강으로 그동안 주 외화 수입원이었던 북·중 무역이 휘청거리고 있다. 이 외화수입의 감소를 남한 아닌 다른 데서 메우기는 어렵다. 이번에 대화를 먼저 제의하고 진지하게 임하는 등 이전과 크게 달라진 북한의 태도가 남한과의 경제협력을 그들이 얼마나 절박하게 원하는지 시사하고 있다.
여기가 정책 선택의 분기점이다. 외화가 궁한 북한 정권을 대상으로 제재와 압박을 계속 가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남북 대결 구도를 지속시킨다. 남북 주민의 동질성 회복도 어려워지고 가장 바람직한 통일 과정, 즉 경제통합을 통한 점진적 통일의 가능성도 멀어진다. 따라서 압박과 제재는 미래지향적 통일정책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의 선택은 명확하다. 평화를 정착시키며 상생 구도를 만들어 점진적으로 통합하는 것이다.
점진적 통합은 북한이 수출을 통해 외화를 벌도록 남한이 도와주는 데서 시작될 수 있다. 북한이 제시한 특구나 개발구 중 1~2개를 수출시범단지로 만들어 남북이 공동운영하는 방식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때 시범단지의 운영은 남북 정부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은 독립적인 기관이 담당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그리고 남한의 민간 기업들이 북한 기업과 교역하는 것을 허락할 필요가 있다. 북한 변화에 가장 효과적인 것은 중앙의 간섭과 통제가 적은 기업, 지역과의 경제 협력이다. 민간이 이 역할을 더 잘할 수 있다.
무기 개발에 전용될 수 있기 때문에 교역의 대가를 외화 대신 현물로 지급하자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북한과 같이 무역의존도가 40% 이상에 달하는 경제에서는 현물과 현금 사이에 큰 차이가 없다. 현물을 받은 만큼 그 제품의 수입을 줄여 외화를 다른 곳에 사용할 수 있다. 심지어는 받은 현물을 중국에 팔아서 외화를 벌어들일 수도 있다.
이제 우리 대북정책을 한 단계 높은 차원으로 진화시켜야 한다. 이번 협상 타결을 미래지향적이면서도 스마트한 대북 정책을 펴는 계기로 만들어야 한다.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