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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굴특종] 10·26 그날 … 김재규, 박정희 향해 "야, 너두 죽어봐"

1964년 2월 국회 국방위 소속 차지철 의원( 오른쪽)이 6사단을 방문, 김재규 사단장(준장)을 옆에 앉힌 채 상석에서 브리핑을 받고 있다. 포병 간부 출신인 차지철은 중령으로 예편했고, 육사 2기 김재규는 차 의원보다 여덟 살 많다. 김재규는 차지철의 안하무인 격 행동에 분격하곤 했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1979년 10월 26일 밤에서 27일 동트는 아침까지 나는 청와대에 있었다. 나는 1층에서 마주친 김계원 비서실장을 끌고 2층 그의 사무실에 올라갔다. “김 실장은 시종 옆에서 다 봤을 테니 자세한 얘기를 하나도 생략하지 말고 내게 다 해주시오. 언제 필요하면 그 정황을 남겨 놓고 나도 죽어야겠소.” 나도 모르게 비장한 말투로 그를 재촉했다. 그의 양복 윗도리는 대통령이 흘린 피가 배어 거무스름하면서 묽게 변색돼 있었다. 김 실장은 오후 8시쯤 궁정동 안가에서 절명 직전의 박 대통령을 승용차에 안아 눕혀 국군서울지구병원으로 이송했다. 김계원은 놀란 가슴을 진정하지 못하고 “내가 병신 노릇을 했다”는 말을 되풀이했다. 김계원의 상황설명 중엔 그 후 10·26 수사와 재판 과정에서 나오지 않은 내용도 있다. 나에게 한 얘기가 진실의 근사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의 얘기는 이랬다.

[김종필의 '소이부답'] <74> 10·26 그날 ③
옷에 피묻은 채 청와대에 온 김계원
‘궁정동 만찬장 진실’ JP에게 털어놔
“박 대통령은 험하게 돌아가실 운명” 5·16 거사 뒤 백운학 예언
김재규는 발작증 살인자 법정서 민주화 투사로 둔갑했다



 이날 낮 충남 아산만 삽교천 방조제 행사를 마치고 기분 좋게 상경한 박 대통령은 저녁 6시 궁정동 만찬을 지시했다. 참석자는 박 대통령과 김계원 비서실장, 차지철 경호실장, 김재규 정보부장 네 명이었다. 미리 도착한 김계원 비서실장은 안가 마당 화단석에 김재규 정보부장과 둘이 앉아 대화를 나눴다. 김재규는 “부마사태를 폭동 진압하듯 무조건 누르면 부산 시민이 다 일어나 봉기한다. 공화당도 차지철이 무서워 대통령께 바른말을 못하고 있다. 이놈을 오늘 없애 버려야겠다”고 했다. 김계원은 “그 자식, 죽어도 싸다”고 맞장구를 쳤다고 한다. 김계원은 그러나 김재규의 말을 ‘한번 혼내줘야겠다’는 정도로만 생각했다고 한다. 그 즈음 박 대통령은 김재규를 경질하려 했다. 김영삼과 신민당에 대한 정보부의 정치공작이 계속 실패했기 때문이다. 김재규도 그런 공기를 눈치챘다. 부마사태를 잘 처리해 공기를 한번 바꿔보려 했는데, 차지철이 사사건건 방해하고 있다는 피해의식에 젖어 있었다.







 저녁 6시5분. 대통령과 차지철이 한 차를 타고 궁정동에 도착했다. 궁정동 안가는 정보부 인력이 관리하고 있었다. 대통령이 안가에 들어서면 경호 임무는 경호실에서 중앙정보부로 넘어간다. 차지철은 궁정동에 들어올 때부터 권총을 차지 않았다. 직사각형 식탁은 발을 뻗을 수 있게 밑바닥이 파였다. 안쪽 가운데 대통령이 자리를 잡았고, 그 정면 맞은편에 김재규, 오른쪽과 왼쪽에 김계원과 차지철이 각각 앉았다. 박 대통령은 9살 아래 고향 후배이고 오랫동안 키워줬던 김재규를 그날따라 사정없이 몰아붙였다. 박 대통령은 자리에 앉자마자 이렇게 얘기했다. “어이, 재규. 넌 시간이 지날수록 참 실망스런 인물이야. 뭐야. 너 뭐한다구 맨날 돈타령만 하고···. 정보부 예산 무한정 쓰면서 (부마사태를)수습하고 진압한다고 했잖아. 이것저것 다 할 수 있다더니 제대로 한 게 뭐야. 왜 그 모양이야. 그러고도 무슨 변명할 거리가 있어?”



 대통령이 질책을 거듭하는 사이사이에 차지철이 “정보부가 판단 미숙으로 방관하는 바람에 사태를 더 악화시켰다”고 끼어들었다. 김재규의 얼굴은 점점 흙빛으로 변해갔다. 침울하고 참담한 표정이었다.



 잠시 TV 7시뉴스를 틀어 삽교천 방조제 준공식에서 연설하는 대통령의 모습을 보기도 했고, 차지철이 ‘도라지타령’을 노래하기도 했지만 분위기는 어색하기 짝이 없었다. 박 대통령의 좌우엔 젊은 여성 둘이 시중을 들었다. 대통령은 김재규를 한참 어린 여성들 앞에서 어린아이 혼내듯 마구 나무랐다. 김재규의 발작증이 폭발할 환경이 조성되고 있었다. 그는 간경화로 술을 못했다. 하지만 이날만큼은 주는 술을 다 받아 마셨다. 술잔이 비면 스스로 따라 연거푸 마셨다.



 궁정동 하늘에 메마른 총성이 울리기 직전의 대화는 이랬다. 오후 7시40분쯤이었다.



 ▶박 대통령=“김영삼을 구속했어야 했는데 유혁인(정무수석비서관)이 말려서 취소했더니 혼란만 커졌어.”



 ▶김재규=“김영삼은 국회에서 제명된 것만으로도 처벌했다고 국민들은 봅니다.”



 ▶박 대통령=“중앙정보부가 좀 매서워야지. 야당 의원 비행(非行) 사실만 움켜쥐고 있으면 뭐해. 조치를 취해야 할 것 아냐.”



1979년 추석 이틀 뒤인 10월 6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이 경북 구미에서 성묘를 한 뒤 생가를 방문해 막걸리를 들고 있다. 왼쪽부터 차지철 경호실장, 김계원 비서실장.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이 대화가 있기에 앞서 김재규는 잠시 식당을 빠져나가 마당 가로질러 있는 정보부장 집무실에서 작은 호신용 권총을 바지 호주머니에 넣고 들어왔다. 32구경의 독일제 월터PPK 권총이었다. 김재규는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 “정치는 대국적으로 상대방에게 구실을 주고 나오라 해야지, 그러지 않고서는 나오지 않을 겁니다.” 당시 신민당 의원들은 김영삼 제명에 항의해 국회의원직 사퇴서를 집단으로 제출했다. 이 순간 차지철이 염장을 질렀다. “신민당 놈들, 그만두고 싶은 놈 한 명도 없습니다. 그 자식들, 신민당이고 뭐고 뛰쳐나오면 전차로 싹 깔아뭉개버리겠습니다.”



 차지철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김재규가 “썅~” 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의 오른손에 권총이 쥐여 있었다. “이 새끼, 버러지 같은 놈. 너 죽어 새끼야” 하는 소리와 함께 총구가 불을 뿜었다. “탕” 소리가 났다. 차지철은 오른쪽 팔꿈치를 맞고 실내 화장실로 도망했다. 극도로 흥분한 김재규는 맞은편 박 대통령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야, 너두 죽어봐.” 대통령에게 몹쓸 욕설도 뱉었다. 그리고 또 “탕” 소리. 김재규는 극단적인 발작 상태였다. 두 발의 총탄이 날아간 뒤 권총은 작동하지 않았다. 김재규는 살인망동 한 달여 뒤 재판정에서 자기가 무슨 한국의 민주주의 회복을 위해 처음부터 계획적인 혁명을 일으켰다고 주장했는데, 주변 사람들이 부추기는 바람에 스스로 속아 꾸민 얘기일 뿐이다. 그의 말대로 미리 준비된 거사였다면 자기 권총에 탄환이 몇 발 들어있는지, 총기가 제대로 작동하는지 확인도 하지 않고 일을 감행한 것이니 말이 안 된다. 김재규는 방아쇠를 당겼지만 실탄이 나가지 않았다. 식당 밖으로 뛰어나갔다. 부하의 38구경 리볼버 권총을 빼앗아 다시 들어왔다. 화장실에 숨었다 문갑을 들고나오며 방어하는 차지철의 가슴에 또 한 발을 발사했다. 김재규는 엽기적이고 실성한 표정이었다. 이번엔 직사각형 식탁을 빙 돌아 대통령 옆으로 갔다. 대통령의 가슴에서 피가 콸콸 솟구쳤다. 눈을 감고 비스듬히 의자에 누운 대통령의 오른쪽 이마 뒷머리에 총구를 들이댔다. 또 한 발 “탕”. 그날 김재규가 쏜 총탄은 네 발이었다.



  종신 대통령 만들기로 조직의 기본임무가 바뀌었다는 중앙정보부의 가장 내밀하고 안전한 장소에서 처음부터 총도 안 찬 경호실장은 혼자 살겠다고 도망치다 횡사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기습을 받고 방어할 틈도 없이 허무하게 저세상으로 떠났다.



1970년 6월 10일 김계원 5대 중정부장(오른쪽)이 중정 창설 9주년을 맞아 전임 부장 초청행사를 열었다. 왼쪽부터 김종필 초대·김형욱 4대 정보부장.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존재하던 정보부와 경호실이 대통령을 죽이는 존재로 뒤바뀌었다. 이런 역설은 권력의 세계에서만 가능한 것인지 모른다. 대통령의 안전은 외부의 철통 방어가 아니라 굳건하다고 믿었던 내부에 금이 가면서 무너졌다. 김계원 비서실장은 내게 “엎드려 방을 나가 복도로 피했다”고 실토했다. 본능적인 두려움에다 광기와 살의로 뒤범벅된 김재규의 기운에 질렸다는 것이다. 자신의 목숨은 건졌으되 대통령이 죽어가는 현장에서 빠져나온 것을 부끄러워했다. 김 실장은 대한민국의 사단장과 육군참모총장, 중앙정보부장을 거친 별 넷, 육군대장 출신이다. 육군대장이 총이 두려워 대통령의 죽음을 막지 못한 건 비통하고 서글픈 일이다. 그는 얼마 있다 다시 만찬장으로 들어가 쓰러진 대통령을 병원으로 모셨다. 나는 김 실장의 얘기를 들으며 긴장과 침통함, 충격과 분노가 얽힌 마음을 조금이나마 풀기 위해 심호흡을 계속했다.



 불현듯 18년간 마음 깊이 간직하면서 누구한테도 꺼내지 못한 한마디가 떠올랐다. 1961년 5·16 혁명 뒤 서울 다동 한 음식점에서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모시고 백운학을 만났을 때 얘기다. 유명한 관상가인 그는 거사 전 우연히 나를 처음 만난 자리에서 “혁명, 성공합니다”라고 외쳐 놀라게 했다. 백운학은 박 의장에게 “각하, (정권이) 20년쯤 가겠습니다. 소신껏 하십시오”라고 했다. 박 의장은 빙그레 웃었다. 백운학은 식사를 마치고 마루 끝에 앉아 신발끈을 매던 내게 슬그머니 다가와 이랬다. “차마 본인한테 직접 말씀드릴 수 없었는데…. 각하께서 마지막은 퍽 험하게 돌아가실 명운입니다.” ‘험하게’라는 게 총에 맞는다는 뜻이었다. 백운학의 말이 맞아서는 안 되겠기에 내가 얘기하지 못했고, 안 맞으면 싱거운 사람이 되겠기에 얘기하지 못했던 예언이었다. 그 예언은 18년 뒤 참혹한 현실로 찾아왔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소사전 궁정동 안가(宮井洞 安家)=궁정동은 서울 북악산 아래 종로구 산하 행정단위다. 조선시대 임금 중 정비(正妃) 소생이 아닌 왕의 모친 7명의 신위를 모신 칠궁(七宮)이 있다. 칠궁 안의 우물(한자로는 정, 井)이란 뜻으로 궁정이란 이름이 지어졌다. 안가는 안전가옥의 줄임말로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청와대 주변 궁정동·청운동·삼청동·구기동에 10여 채 산재했던 대통령의 은밀한 활동공간을 말한다. 박 대통령이 시해됐던 궁정동 안가의 식당 건물은 80년 전두환 대통령이 집권한 직후 철거됐다. 나머지 안가들은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이 취임한 뒤 철거되거나 기관장 공관으로 전환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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