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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온 국민을 거짓말쟁이로 만드는 자기소개서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후배기자를 뽑는 전형에 서너 차례 참여한 적이 있다. 1차 심사는 지원자의 자기소개서를 읽고, A·B·C로 점수를 매기는 일이었다. A만 1차 합격. 읽을 분량이 많은 데다 내용이 엇비슷해 채점하는 데 애를 먹었다. 어디서 본 듯한, 그렇고 그런 자소서는 B를 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대학 때 동아리 활동을 했다’ ‘외국 대학에 교환학생을 다녀왔다’ ‘학점이 좋다’ ‘인턴 경험이 있다’ ‘자격증 있다’ ‘어릴 때부터 책읽기와 글쓰기가 취미였다’ 등등. 자소서 앞부분부터 동아리·교환학생 같은 얘기를 나열하면 다 읽기도 전에 B를 주기도 했다.

 특별한 경험을 소개하거나 색다르게 얘기를 풀어간 자소서는 정독했다. 이 중 독창적이고, 재치가 번득이면 A. 말장난에 가깝거나 어수선하면 C. 나름대로 원칙을 갖고 공정하게 채점했다고 생각했지만, 이내 걱정이 생겼다. 자소서 내용이 모두 사실일까? 누가 대신 써준 건 아닐까? 보다 근본적인 의문도 꼬리를 물었다. 자소서를 잘 쓴 지원자가 일도 잘할까? 내 채점 방식이 맞는 것일까? 혼란스러웠다.

 뻔한 내용이라고 B를 준 지원자 중에 유능한 친구들이 있을 것이다. 아니, 더 많을 수도 있다. 이들은 남의 눈에 띄게 표현하는데 조금 서투를 뿐이다. A와 C도 종이 한 장 차이다. 보는 관점에 따라 재치 있는 글과 말장난 같은 글이 뒤바뀔 수도 있다. 보석 같은 인재가 C에 묻혀 있을지 모른다.

 그나마 신문사는 글로 승부하는 곳이니 자소서가 업무와 관련이 있다. 일반 기업에선 자소서와 업무 능력을 연결하기 쉽지 않다. 조직에 헌신적일지, 동료와 잘 어울릴지 등 인성과 관련한 것은 더더욱 알 방법이 없다. 자칫 자신을 번드르르하게 포장하는 데 능하고, 공명심과 잔재주가 앞서는 사람이 눈에 띌 가능성도 있다.

 뽑는 쪽도 고민이지만, 취업준비생은 더 괴롭다. 자소서에 담을 얘기가 별로 없기 때문. 이제 겨우 인생의 출발선에 선 젊은이들이다. 업무와 관련해 무슨 대단한 경험을 했을 것이며, 심오한 인생 철학이 있겠는가. 자소서는 대학 입시에서도 중요하게 쓰인다. 수시전형에서 자소서를 요구하는 대학이 많다. 입시생들은 수시를 앞둔 여름에 근사한 스토리를 담은 자소서를 만드느라 머리를 쥐어짠다. 공부에 지친 그들로선 또 다른 부담이다. 심지어 중·고교 입시에서도 자소서를 요구하는 학교가 있다. 10대 초·중반 아이들이 도대체 뭘 특별하게 쓸 게 있다고.

 자소서 요령을 알려주는 책이 시중에 300 종류가 넘는다. 스토리를 입혀 영화처럼 쓰라거나 광고처럼 만들라는 식으로 코치한다. 고3 교실에서 자소서 쓰는 방법을 가르친다. 집에선 부모들이 거든다. ‘이건 빼고, 저걸 넣어라’. 숨기고 싶은 것은 감춘다. 때로는 없는 걸 지어내거나 좋은 문장을 베끼고 싶은 유혹에 빠진다. 부모와 스승까지 가세해 온 국민이 거짓말쟁이로 내몰리는 셈이다.

 사교육이 이 틈을 파고든다. 건당 10만~20만원을 받는 대행업체가 성업 중이다. 수백만원짜리 컨설팅도 있다. 이들은 진솔하면서도 특별하게 보이게끔 자소서를 손봐준다고 선전한다. 첨삭에 첨삭을 거듭해 자소설(自小說)로 둔갑하기도 한다. 취준생과 입시생들은 어디까지 진짜 내 모습이고, 어디부터 분칠을 한 건지 헷갈린다. 이 과정에서 자신도 모르게 요령과 편법을 터득한다.

 대행업체에 맡기거나 남의 것을 베껴서 합격하는 경우가 국공립 대학에서만 매년 700명을 넘는다고 한다. 지방대학에서 입학사정관을 겸하고 있는 한 교수는 “자소서 심사가 논문 심사보다 힘들다”고 말했다. 그는 “자기주도로 뚜렷한 목표를 갖고 입시를 준비했는지 살펴야 하지만, 자소서만 봐서는 내용이 진짜인지조차 가려내기 쉽지 않다”고 토로했다.

 취업이든, 입시든 자소서를 합격·불합격의 기준으로 쓰는 건 위험해 보인다. 지원자를 이해하기 위한 참고자료 정도로만 활용했으면 한다. 기업·학교 측이 지원자에게 직접 물어보고 확인하는 과정 또한 필요하다. 분칠한 자소서에 높은 점수를 주지 않으려면. 올여름엔 또 얼마나 많은 젊은이들이 자소서와 자소설의 틈바구니에서 마음 졸일지….

고현곤 편집국장 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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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