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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터호른 비극과 유럽의 위기

[뉴스위크] 유럽의 단합을 상징하는 쾌거가 돼야 마땅했다. 정확히 150년 전 7월 영국인 모험가 4명은 유럽대륙의 가이드 3명(프랑스인 1명, 스위스인 2명)과 함께 스위스 알프스의 작은 마을 체르마트를 출발했다. 가파르고 폭이 좁으면서 빙하지대에 홀로 우뚝 솟아 강렬한 인상을 주는 피라미드 형태의 마터호른(해발 4478m)을 정복한 최초의 등반대가 되는 게 그들의 목표였다. 그들 전부 마터호른 초등에 성공했다. 그러나 생존자는 단 3명이었다.

스위스의 상징 마터호른. [사진제공=스위스 정부관광청]


그날 일어난 비극적인 사건이 주는 교훈은 지금도 산악계의 차원을 뛰어넘어 폭넓은 공감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단일통화와 그리스 위기 같은 다른 유럽 협력 프로젝트와 비교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첫째 교훈은 등반대가 암벽을 오르거나 내려갈 때 외부의 고정된 지점에 자일로 연결되지 않고 모두 서로 몸을 묶으면 가장 허약한 대원이 실족할 땐 다 함께 위험하다는 것이다. 마터호른의 가파른 절벽에선 그 허약한 대원이 등반 경험이 부족한 더글라스 해도(19)였다.

그들은 하강 노선의 가장 가파른 곳에서 자일로 서로 몸을 묶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생존자들은 어떻게 사고가 났는지 목격하지 못했지만 해도의 발이 미끄러지면서 가장 가까이 있던 3명도 같이 추락한 것으로 추정된다. 아무도 하켄(쇠못)을 암벽에 박고 자일을 연결하지 않아 전원이 사망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 3명과 4명 사이에 연결된 허약한 자일이 심한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끊어졌다. 어린 해도와 건장한 목사 찰스 허드슨(36), 파이프 담배를 즐기는 프랑스 가이드 미셸 크로즈, 퀸스베리 후작의 동생 프랜시스 더글라스 경(18)은 거의 비명도 못 지르고 추락했다(크로즈는 당시 “안돼!”라고 소리쳤다고 알려졌다). 그들은 약 1200m 아래 빙하 위에 떨어졌다.

며칠 뒤 유럽 전역의 언론이 들끓었다. 거의 모든 신문이 이 사건을 다루면서 책임 공방전이 벌어졌다. 영국에서 가장 심했다. 더 타임스 신문은 이 사건을 대서특필했다. 기사 중 하나에선 프랜시스 경을 “유럽에서 가장 뛰어난 젊은이 중 1명”이었다고 묘사했다. 다른 기사에선 위험한 등반이라는 새롭게 유행하는 이 ‘미친’ 취미의 의미와 목적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게 삶인가? 의무인가? 합리적인가? 허용될 수 있는 취미인가? 잘못된 취미는 아닌가?”

위험한 등반이 허용될 수 있는 것일까? 빅토리아 여왕은 확신이 서지 않아 윌리엄 글래드스톤 당시 총리에게 영국인의 등반을 금지시킬 수 있는지 자문했다. 하지만 그의 답변은 기록에 없다. 등반이 의무일까? 소설가 찰스 디킨스는 의무가 아니라 변덕스럽기 그지없는 유행이자 취미일 뿐이라며, 마치 누군가 “영국의 모든 성당 첨탑에 오르겠다”고 고집하는 것과 다름없다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등반이 합리적일까? 그 점에서 디킨스와 빅토리아 여왕, 더 타임스 신문이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뻔하다. 그러나 이론의 여지는 있지만 ‘산봉우리를 오르려는 욕구가 합리적인가?’보다 ‘좀 더 합리적으로 등반할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가 더 나은 질문인 듯하다. 체르마트에선 지난 7월 그 비극의 150주년을 맞아 수많은 추모 행사와 공연, 트레킹 투어가 열렸다. 그곳에 가면 마터호른 박물관을 찾아서 끊어진 자일을 살펴 보라. 마치 막대빵처럼 가늘어 쉽게 끊어질 듯하다.

거의 모든 사고가 그렇듯이 마터호른 재난은 한 사람의 잘못이 아니었다. 잇따른 판단 실수와 결정해야 할 때 그러지 못한 결과였다. 그중 최악은 대장을 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중요한 문제에서 만장일치를 요구하는 순수 민주주의는 현실적으로 실행 불가능하다. 정해진 시간에 결정을 밀고 나갈 권한을 가진 대장을 뽑는 게 실용적인 원칙이다. 그들의 마터호른 원정에선 대장이 없었다. 누구를 대장으로 할지 결정하지 못해서 그랬던 듯하다.

프랜시스 경은 귀족으로 군에 몸담을 계획이었고 유능한 등반가로 인정 받았다. 허드슨은 나이가 가장 많고 뛰어난 등반가였으며 목사였다. 에드워드 윔퍼(25)는 판화가로 영국 출판사를 위해 알프스 봉우리를 스케치하러 원정에 합류했다. 그가 가장 우수한 등반가였을 듯하다. 그들 중 누군가 대장을 맡아야 했다. 그래야 전체를 위해 가장 허약한 대원을 제외시키는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해도는 정상에 오를 때부터 다리가 떨리기 시작했다).

저주도 따랐다. 마터호른엔 불의 악마가 사는 폐허가 된 도시가 있다는 미신이 있었다. 또 스위스 민속설화는 눈사태를 타고 다니는 엄청나게 큰 발을 가진 털북숭이 난쟁이를 조심하라고 경고했다.

물론 그런 괴물도 무너진 고성도 없었다. 정상은 텅 비어 적막감만 감돌았다. 크로즈와 윔퍼는 젊은 치기에 서로 먼저 정상을 밟으려고 뛰었다. 어쨌든 그들은 둘 다 정확히 동시에 정상에 올랐다고 합의했다. 한쪽으론 스위스 알프스의 회색 봉우리들이 서 있었다. 다른 쪽엔 이탈리아의 붉은 산언덕이 보였다. 1865년 7월 14일 오후 2시였다. 그 정상에 선 7명의 모습을 상상으로 돌이켜 보면 섬뜩한 느낌이 든다. 초등 성공에 들뜬 그들은 차가운 햇빛 아래 법석을 떨었다. 몇 명은 파이프 담배에 불을 붙였다. 크로즈는 스틱에 셔츠를 걸어 깃발로 사용했다. 윔퍼는 알프스 봉우리 스케치에 바빴다.

하산 노선의 가장 가파른 부분에서 자일을 하켄에 고정시키는 문제를 두고 약간의 토론이 있었다. 해도가 힘들어 하고 있었다. 그도 체력이 강하고 운동에 뛰어난 집안 출신이었지만 초조해지기 시작하면서 자신감이 떨어졌다.

다른 대원은 그런 문제가 없었다. 그들은 내려가는 길은 아주 쉽다고 생각했다. 마터호른 동면 전체는 보기만큼 가파르지 않아 신속히 움직일 수 있었다. 그러나 가장 가파른 부분에서 일이 생겼다.

허드슨과 윔퍼는 자일을 고정시켜야 한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하강을 시작한 후 윔퍼는 종이에 이름을 써서 병에 넣어 정상에 두는 전통을 깜박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그 하찮은 일을 하려고 다시 정상으로 급하게 올라갔다. 그가 다시 대원들과 합류했을 때 그들은 가장 가파른 구간에 도착한 상태였다. 누구도 하켄에 자일을 고정시키지 않았다.

허드슨은 부자지간인 스위스 가이드 2명(올드 피터와 영 피터라고 불렀다) 사이에 끼어 서로 자일로 몸을 묶었다. 얼마 안 가 해도가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다. 크로즈의 비명이 들렸다. 낙석이 와르르 떨어졌다. 올드 피터가 버티려 했지만 연약한 자일이 맥없이 끊어졌다. 몇 초 뒤 윔퍼와 스위스 가이드 2명만 산허리에 남았다.

윔퍼는 나중에 스위스 가이드들이 겁에 질려 우왕좌왕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들은 오히려 윔퍼가 그랬다고 반박했다. 윔퍼에 따르면 올드 피터가 울음을 터뜨렸고 영 피터는 “우린 망했어!”라고 울부짖었다. 영 피터는 윔퍼가 “벌벌 떨며 몸을 가누지 못했다”고 돌이켰다. 윔퍼에 따르면 스위스 가이드들은 안내 봉사료를 받지 않겠다고 했다. 그들도 나중에 그로 인해 산악인들의 동정을 받으면 더 많은 돈을 쥘 수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털어놓았다.

윔퍼는 그런 끔찍한 상황에서도 돈을 생각하는 그들에게 격분했다. 분위기가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해 지기 전에 체르마트에 도착하기엔 너무 늦어 텐트를 쳤다. 지치고 피해망상에 빠진 윔퍼는 스위스 가이드들이 자신도 사고당하기를 바랄 것이라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피켈을 꼭 쥐고 뜬 눈으로 밤을 새웠다.

윔퍼는 올드 피터가 프랜시스 경과 더 굵은 자일로 서로 몸을 묶지 않았다는 점을 탓하진 않았다. 자일이 끊어져 자신이 살았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다. 당시엔 그처럼 약한 자일이 흔히 사용됐다. 그 후에야 하중에 따라 견딜 수 있는 자일의 굵기가 실험을 통해 밝혀져 산악인들이 신경 쓰기 시작했다.

며칠 뒤 윔퍼를 포함한 영국인과 스위스 현지인으로 구성된 구조팀이 시신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시신들은 눈 위에서 옷이 절반 정도 찢겨 나간 채로 끔찍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였다. 해도는 머리 타래로, 허드슨은 아내 에밀리에게 쓴 편지와 턱에 꽂힌 십자가로 신원을 확인할 수 있었다. 크로즈의 모습이 가장 끔찍했다. 머리 절반이 날아가고 없었다. 윔퍼는 “완전히 짖이겨졌다”고 말했다. “마치 엄청난 거인이 그를 잡고 바위에 계속 내리친 듯했다. 사람의 모습의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프랜시스 경의 시신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등산화는 발견됐다. 그의 형이 체르마트로 가서 수색대를 조직해 곳곳을 찾았지만 허사였다. 그의 누나가 시신 발견에 상금을 걸었지만 아무도 찾지 못했다. 암벽을 따라 추락하면서 붉은 안개로 증발해 바람에 실려간 듯했다.

사람들은 그런 폭력적인 비극을 마치 마터호른이라는 인간의 복수처럼 느꼈다. 어떤 사람은 자연이 그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줬다고 생각했다. 허드슨 목사의 턱에 박힌 십자가는 마치 ‘신은 없다’는 증거처럼 보이기도 했다. 가톨릭 신자였던 크로즈의 묵주는 완전히 박살이 나 가루가 됐다. 허드슨 목사의 미망인은 윔퍼에게 보낸 편지에서 신의 부재를 부인하면서도 그런 불길한 암시를 비쳤다. “내겐 끔찍한 충격이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전능한 섭리에 대한 나의 믿음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주님이 이런 슬픈 재앙이 일어나도록 한 데는 뭔가 나름대로 현명하고 바람직한 목적이 있었다고 믿습니다. 동료 모두에게 이 사고가 전화위복이 되길 바랍니다.”

그러나 의미 없는 사건에서 의미를 찾으려는 것은 헛된 노력이었다. 단체 구성원 1명의 실수가 재앙을 불렀다. 사망한 사람에게만 재앙이 닥친 것도 아니었다. 윔퍼는 그 사고의 충격을 떨치지 못하고 또 다시 그런 일이 벌어질까 두려워 그 후론 늘 혼자 등반했다. 올드 피터는 죄책감으로 신경쇠약에 걸렸다.

영 피터와 체르마트 마을만 이득을 봤다. 영 피터는 전문 가이드로서 그 후로 마터호른을 수없이 올랐다. 오지의 작은 마을 체르마트는 알프스에서 가장 유명한 휴양지가 됐다. 더 타임스 신문이 고뇌에 찬 기사에서 제기한 첫 질문은 ‘위험한 등반이 삶인가?’였다. 마지막 질문은 ‘위험한 등반은 잘못된 취미 아닌가?’였다. 마터호른 비극에서 가장 충격적인 점은 모든 측면의 ‘가벼움’이었다. 너무도 쉽게 마터호른 정상이 최초로 정복됐고, 너무도 무심하게 참사가 발생했다. 위험한 등반이 잘못된 취미는 아니었다. 하지만 삶인 것은 분명했다.

토마스 W 홋킨슨 뉴스위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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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