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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P “이순신·세종대왕 동상 뒤에 이승만·박정희 동상도 세워야”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423회 탄신일을 하루 앞둔 1968년 4월 27일 박정희 대통령(오른쪽)과 육영수 여사가 광화문 세종로에서 열린 이순신 장군 동상 제막식에 참석해 동상을 가린 막을 벗겨내고 있다. 당시 김종필 공화당 의장이 주도한 애국선열 조상 건립위원회의 첫 작품이다. [국가기록포털]


15일은 광복 70주년을 맞는 날이다. 올해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에 육박할 것이라고 한다. 요즘 사람들은 70년 전 이 땅이 얼마나 빈곤하고 비참했는지 상상하기 어려울 것이다. 일제 식민과 6·25전쟁이 물려준 한국 사회는 황폐함 자체였다. 광복 15년이 지나 5·16 혁명이 일어난 1961년에도 1인당 국민소득은 82달러에 불과했다. 아프리카의 가나보다 못했다. 이렇다 할 기술도 자원도 없는 세계 최빈국이었다.

[김종필의 '소이부답'] <70> 광복 70주년 JP 특별회고 … 동상·휘호에 담긴 시대정신
“건국 대통령과 근대화 대통령
재계의 두 거인 이병철·정주영
광화문에 자랑스러운 역사 모아야”







 능력과 자본도 문제였지만 우리에게 더 절실했던 건 의지와 자신감이었다. 제대로 된 나라, 잘 사는 나라 한번 만들어 보자는 의욕과 정신이 필요했다. 나라 재건의 의지는 그때의 시대정신이었다. 1966년 ‘애국선열 조상(彫像)건립위원회’가 발족했다. 민주공화당 의장이었던 내가 초대 위원장을 맡았다. 조상건립위는 민족적 자부심과 국민적 재건 의지를 불러일으키기 위한 일대 정신운동으로 기획됐다. 박정희 대통령은 내게 “세종로 네거리에 일본이 가장 무서워하고 외경의 대상이 될 인물의 동상을 세우라”고 주문했다. 그 위인은 바로 민족의 영웅 이순신이었다. 이순신은 러시아의 발틱함대를 무찔러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일본의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해군 제독이 ‘전쟁의 신(神), 바다의 신’으로 숭앙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의 헌납으로 세운 세종대왕 동상. 1968년 덕수궁 내에 세워졌지만, 2012년 청량리 세종대왕 기념관으로 옮겨졌다. [중앙포토]
 충무공 동상의 제작은 김세중 서울대 미대 교수가 맡았다. 김 교수는 문교부 국사편찬위원회와 국내의 권위 있는 사학자들로부터 고증을 받았다. 또 충무공 유적지들을 꼼꼼히 답사하면서 수많은 스케치를 모아 형상을 확정지었다. 이렇게 해서 68년 4월 27일 서울 세종로 광화문 네거리에 높이 18m에 달하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동상을 제막했다. 조상건립위의 첫 번째 작품이었다. 제막식에는 박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 3부 요인이 참석했고 내가 경과보고를 했다.



나는 박 대통령이 헌납한 비용으로 충무공 동상을 세운 것이라고 밝히면서 “백의종군의 높은 뜻으로 왜적을 물리쳤던 충무공 정신을 이어받아 조국을 보위하며 국토 통일을 성취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그 뒤에 여기저기서 이순신 장군이 오른손에 장검을 쥐고 있어 항복하는 모습처럼 보인다며 시비를 걸었다. 군사훈련을 지휘할 때는 얼마든지 오른쪽에 칼을 들 수 있다. 스스로 창의적인 발상을 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누가 먼저 창조해 놓으면 꼭 이런 시비들을 걸어온다.



  충무공 동상 제막식 일주일 뒤에는 덕수궁 중화전 앞에 세종대왕 동상을 세웠다. 이 동상은 내가 동상 만드는 재원(財源)을 대고, 김경승 이화여대 교수가 제작했다. 이 세종대왕상은 2012년 덕수궁 원형 복원공사 때 청량리에 있는 세종대왕기념관으로 옮겼다.



 애국선열 동상을 세우는 공공미술 프로젝트는 유럽과 미국을 다니면서 내 마음에 씨가 심어졌다. 63년 ‘자의반 타의반’으로 1차 외유를 떠나 유럽 각국을 돌아보면서 느낀 바가 컸다. 영국 런던 트라팔가 광장의 넬슨 제독, 프랑스 파리 앵발리드의 나폴레옹 동상 등 주요 도시마다 그 나라 영웅들의 모습이 자랑스럽게 세워져 있었다. 국민은 영웅을 가까이 대하면서 그들과 정서적 일체감을 느끼고 조국의 역사에 자랑스러움을 갖게 된다. 나라의 위기 앞에 내부의 분열을 극복하는 국민정신은 이런 공공예술이 자극하는 역사적 상상력에서 잉태되는 것이다.



 국무총리 시절인 73년 12월엔 이순신 장군과 세종대왕의 대리석 입상을 만들어 중앙청 중앙홀에 세웠다. 내가 그리스산 대리석을 구해 와 김경승 교수에게 제작을 맡긴 것이다. 이순신 장군은 무(武)의 상징, 세종대왕은 문(文)의 상징으로 한국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국가 지도자들이 문과 무가 균형 잡힌 국정을 이끌어야 한다는 생각이었다. 두 대리석 입상은 96년 중앙청 건물이 철거되면서 여의도 국회의사당 중앙현관으로 옮겨져 드나드는 국회의원들의 출입을 지금도 지켜보고 있다.



 두 번째 총리 때인 98년에는 내 고향 충남 부여의 백마강(白馬江) 강변 부산(浮山) 절벽 바위에 계백 장군과 세종대왕, 이순신 장군, 신사임당 네 분의 얼굴을 새기려고 했다. 미국 사우스다코다주(州) 러시모어산에 워싱턴, 제퍼슨, 링컨, 시어도어 루스벨트 등 4명 대통령의 얼굴을 새긴 조각상에서 아이디어를 얻었다. 예산 20억원을 확보하고 기초 작업까지 해놓았는데 문화재위원들이 산의 원형을 훼손한다고 반대해 그만뒀다. 반대에는 이유가 다 있겠지만 그때 그것을 완성했다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위인 명승지가 됐을 것이다.



1997년 1월 김종필 자민련 총재가 신년휘호로 ‘병아리가 알에서 나오기 위해서는 새끼와 어미닭이 안팎에서 서로 쪼아야 한다’는 뜻의 신년휘호 ‘줄탁동기(?啄同機)’를 쓰고 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21세기 광화문 광장에는 국방의 이순신 장군, 과학문화의 세종대왕과 함께 대한민국의 거인들 동상을 모셨으면 한다. 이 나라 경제를 일으켜 세운 재계의 두 거물, 삼성의 이병철 회장과 현대의 정주영 회장이 그 주인공이 돼야 한다. 한민족의 긴 역사 흐름으로 볼 때 이들이 남긴 업적은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언젠가 국민이 존경과 고마움을 가지고 두 분의 동상을 올려다볼 날이 올 것이다.



 그리고 세종대왕 좌상 뒤에 건국 대통령인 이승만 박사와 조국 근대화를 이룩한 박정희 대통령의 동상이 세워지기를 소망한다. 그렇게 되면 광화문 광장에는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가 모두 모이게 되는 셈이다. 앞으로 세울 동상은 동(銅)을 잘 골라 천년이 가도 변함 없을 상징을 만들어야 한다. 이들 여섯 분 모두 천년은 가야 할 분이다.



 내가 추진한 동상(銅像)이 우리 시대정신의 상징이라면 휘호(揮毫)는 시대정신의 언어(言語)라 할 수 있다.



 광복 70년 세월이 흐르면서 점점 강렬해지는 시대정신이라면 나라가 강해야 하고 힘이 있어야 한다는 거다. 일본에 유린 당한 우리 역사는 나라가 약해서였고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데로 이유를 돌릴 필요가 없다. 광복의 그날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나라가 커지긴 했지만 국민적 단합으로 힘을 더 길러야 한다.



 북한을 지척에 두고 있는 서해 강화도에는 나의 이런 생각이 붓글씨로 남아있다. 강화도 최북단 철산리는 한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거리가 1.8㎞에 불과한 곳이다. 66년 공화당 의장 때 이곳 평화전망대를 찾았다. 이 일대를 제적봉(制赤峰)이라 이름 짓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제적봉이란 붉은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뜻이다. 나는 그 자리에서 붓을 들고 제적봉 휘호를 남겼다. 이곳엔 지금도 내가 쓴 글이 비석과 액자로 남아 있다.



 강화대교 인근 갑곶돈대 아래쪽 더리미마을의 가리산 중턱에는 까만 오석에 ‘위국충렬(爲國忠烈)’이라는 글을 새겨놨다. 나라를 위한 매운 충성을 강조했다. 이곳 일대는 1871년 미국의 아시아함대 사령관 J 로저스가 군함 5척을 이끌고 와 개항을 요구하며 조선 군대와 일전을 벌인 신미양요(辛未洋擾)의 현장이다.



 골프장도 내 글씨가 많이 남아 있는 곳이다. 골프는 내가 가장 즐기는 취미이며 건강을 지켜온 운동이다. 무엇이든 깊이 파고들면 그 안에서 세계가 보이지만 골프도 광대무변한 인생의 축소판이다. 일본 오이타 퍼시픽 블루 골프장의 클럽하우스 현판에는 ‘백구백상(白球百想)’이라는 붓글씨가 새겨져 있다. 작고 흰 골프공을 치면서 사람들은 수많은 상념을 갖는다는 뜻이다. 경기도 고양의 뉴코리아컨트리클럽 15번 홀 그늘집에는 ‘대통령이 노닐던 곳’이란 뜻으로 ‘신유정(宸遊亭)’이란 글을 나무판에 새겨놨다. 박 대통령과 나는 종종 뉴코리아컨트리클럽을 찾아 골프를 치며 막걸리와 사이다를 섞어 ‘막사이다’로 만들어 마시곤 했다.



 고양 한양컨트리클럽의 9번과 10번 홀 사이에 문이 하나 있는데 그곳에 ‘소복문(笑福門)’이란 글을 써줬다. 전반 9개 홀에서 공이 잘 안 맞았다고 화내지 말고, 후반 홀을 웃으면서 즐기라는 뜻이다. 인생이란 것도 매한가지가 아닌가. 태릉 군인골프장에도 ‘쌍휴정(雙休亭)’이라는 휘호를 달아놨다. 동반자와 쌍쌍이 골프를 즐기며 쉬다 가라는 뜻이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수원 화성에는 장안문이 있는데 화성을 복원할 당시 이병희 의원이 권유해 ‘장안문(長安門)’ 현판을 내가 써서 걸었다.



 나는 다섯 살 때부터 고향 부여의 서당에서 선친의 친구이며 한학자인 윤응구 선생으로부터 한학을 배우고 붓글씨의 기초를 익혔다. 그때 서당으로 경성일보가 배달돼 왔는데 묵은 신문지가 새까맣게 되도록 친구 학동들과 함께 지겹게 글씨를 썼다. 그러다 윤 선생이 화장실에 가느라 일어서기라도 하면 모두 물방개 흩어지듯 일제히 도망을 갔다. 어린 시절의 정겨운 추억이다. 붓글씨는 자기를 연마하고 정신을 집중하는 예술이다. 세상에 강렬한 메시지를 전하는 매력적인 수단이기도 하다.



정리=전영기·최준호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김세중(1928~86)=조각가. 서울대 미대 조각과 1회 졸업생으로 이후 서울대 교수와 미대 학장을 지내면서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국립현대미술관장 등을 역임했다. 광화문광장의 충무공 이순신(1968) 장군과 장충단공원 쪽 남산 2호터널 입구의 유관순(1970) 동상이 김 교수의 대표적 작품이다. 양화대교 위에 유엔군자유수호참전기념탑 부조(1963)도 만들었지만 81년 확장공사 때 철거됐다. 숙명여대 명예교수인 김남조(88) 시인이 그의 부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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