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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이범진 추모비엔 “이곳서 순국한 대한의 충신”


이범진. 대한제국 러시아 초대 상주공사다. 1911년 1월 26일 이범진은 이국만리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신은 적에게 복수할 수도, 적을 응징할 수도 없는 무력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자결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유서를 고종에게 남기고 목을 맸다. 망국 외교관의 한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난달 23일 찾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파르골로보 3번지 북방묘지(옛 우스펜스키 공동묘역) 8구역. 야트막한 러시아인들의 묘비 사이로 낯익은 한국 비석이 우뚝 솟아 있었다. 2002년 7월 세워진 이범진 추모비다. 그의 묘는 75년 북방묘지 재정비 과정에서 무연고라는 이유로 없어졌다. 뒤늦게 한국 정부는 그가 묻혔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곳에 추모비를 세웠다. 추모비에는 한글과 러시아어로 ‘이범진 공사는 1852년 9월 3일 서울에서 탄생하여 1911년 1월 26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순국한 대한의 충신’이라고 적혀 있다. 흰색 꽃다발을 헌화한 노성준 상트페테르부르크 한인회장은 “거리가 멀어 자주 찾아오지 못하지만 1년에 네 번 정도 아들과 함께 찾는다”고 말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페스첼라가(街) 5번지. 110년 전 이범진이 근무했던 대한제국 공사관 건물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5층짜리 아파트인 건물 벽면에는 ‘ 1901년부터 1905년까지 이범진 러시아 주재 대한제국 초대 상주공사가 집무하셨습니다’고 적힌 가로 1m, 세로 80㎝ 표지판이 걸려 있다. 한국 정부는 2007년 이 건물의 일부를 매입해 기념관으로 만들고자 했으나 예산 문제로 중단됐다. 올해 다시 추진하고 있지만 역시 예산 때문에 여의치 않다고 현지 한인들이 전했다.

 이범진은 고종이 헤이그에 밀사로 파견한 이위종의 부친이다. 1896년 아관파천을 주도한 친러파의 거두였다. 아관파천이 실패로 끝난 1896년 6월 주미공사로 출국한 뒤 고국 땅을 밟지 못했다. 이범진은 러시아 전임 공사 시절 ‘배일연아(排日連俄)’ 외교에 전념했다. 러시아를 끌어들여 일본의 침략을 막는 세력 균형 외교다. 하지만 1904년 러일전쟁, 1905년 을사조약으로 일본의 압박은 거세진다. 일본에 장악된 대한제국 외무부는 수차례 이범진에게 철수를 강요한다. 하지만 고종은 “귀환 명령은 일본의 압박에 따른 것이므로 러시아에 남아라”는 밀서를 보낸다. 이범진은 고종의 명에 따라 공사관을 지킨다. 대한제국으로부터 지원이 끊기자 러시아 외무성으로부터 운영비를 지원받는다.

 1906년 주러 일본 대사관이 본국에 보낸 보고서에 보면 “이범진이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는 내용이 담겨 있다. 하지만 이범진의 구국외교는 계속됐다. 무장투쟁에도 눈을 돌린다. 1908년 아들 이위종을 연해주로 보내 최재형 선생, 안중근 의사 등이 몸담았던 의병단체 동의회(同義會) 창설을 지원한다. 이범진이 동의회에 보낸 군자금은 1만 루블에 달한다. 자결하기 1년3개월 전인 1909년 10월 28일 이범진은 상트페테르부르크 현지 언론인 ‘레이치’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인의 불운이야 실로 가련하다. 그렇지만 저는 우리 권리를 회복할 기회가 도래하기를 기대한다. 일본인은 저의 육체를 망하게 할 순 있겠지만, 저의 정신은 영원히 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특별취재팀=유지혜·안효성 기자, 왕웨이 인턴기자, 김유진·송영훈 대학생 인턴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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