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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독립 지켜야 러·일 견제” … 영국 물고늘어진 이한응


1905년 5월 16일자 영국 일간지 던디 이브닝포스트 5면에 ‘창가의 얼굴-한 외교관의 비극적이고 명예로운 고독’이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기사는 이렇게 시작했다. “지난 몇 주 동안 그는 매일같이 공관 위층 창가 커튼 뒤에 서 있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조국을 생각하며 몇 시간씩 그 자리를 지켰다.”

 ‘그’는 나흘 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대한제국 주영 서리공사 이한응(1874~1905)이다.

 영국 외무성에는 지금도 이한응과 관련된 문서가 2권으로 보관돼 있다. 한반도의 운명에 무관심했던 영국 정부로부터 무시와 냉대를 받으면서도 포기를 몰랐던 망국 외교의 기록이다. 이한응은 1901년 3등 참찬관(지금의 3등 서기관)으로 영국 공관에 부임했다. 그는 신학문을 교육하는 국립 육영공원에서 영어를 수학했고, 스무 살에 과거에도 급제했다. 1904년 초 서리공사를 맡아 ‘1인 공관’을 책임졌을 때 그의 나이는 서른 살이었다.

 1895년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뒤 러시아는 군대를 파견, 만주를 점령한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막기 위해 일본과 손잡는다. 1902년 1차 영일동맹이다.

 이한응은 영국 정부를 상대로 외교를 펼친다. 1904년 1월 13일 외무성을 방문, 자신의 정세 판단을 담은 장문의 메모를 전달한다.

 1980년대부터 영국 외무성 외교문서를 분석해온 이화여대 구대열 명예교수가 최근 공개한 메모 사본에는 이한응이 친필로 그린 도표가 포함돼 있다. 이한응은 세계 정세를 영국·프랑스·일본·러시아를 네 꼭짓점으로 하는 사각형 구도로 묘사했다. 그런 뒤 “영·프가 힘을 합쳐 러·일을 상호 견제하는 안정된 3각 구도를 만들어야 전쟁을 막을 수 있다. 이 과정에서 동아시아의 정치적 열쇠를 쥐고 있는 한국의 독립과 주권 보장은 필수”라고 강조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 외무성의 동아시아국 담당차관보 프랜시스 캠벨과 동아시아국 고위 관리(서기관 내지 참사관급) 월터 랭글리는 “영국의 동아시아 정책은 영일동맹에 기초한다”고 거부했다. 이한응이 계속 면담을 신청하자, 서면으로 접수하라는 냉랭한 반응을 보였다.

 구 교수는 “국제 정세를 잘 읽어 탁월한 견해를 내놨지만 이룰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이미 한반도에서 일본의 우월적 지위를 인정한 영일동맹과 러일전쟁이 가져올 우리의 운명은 뻔한 것이었다”고 말했다.

 1904년 말 일본이 대한제국의 해외공관 인원을 줄이려 하자 이한응은 영국 외무성에 “‘한국이 런던에 전권공사를 파견해주길 바란다’는 전문을 고종에게 보내달라”고 부탁한다. 캠벨은 “이 작은 음모 는 한국 대표부를 강화하려는 기도”라며 무시했다.

 1905년 2~3월 러일전쟁의 승기를 잡은 일본이 평화조약 체결을 논의했다. 이한응은 러시아가 일본의 한반도 점령을 용인할 것을 우려해 영국에 이를 막아달라는 각서를 전달했다. 하지만 영국 외무성은 “당사국 간 교섭”이라며 거절했다. 이한응은 자결하기 전날인 5월 11일 외무상 면담을 요청한 뒤 답변이 없자 목숨을 끊었다. “오호라 나라의 주권 없어지고 사람의 평등을 잃으니 무릇 모든 교섭에 치욕이 망극할 따름이다. 구차히 산다 한들 욕됨만 더할 따름”이라는 유서를 남긴 채.

 주영 한국문화원의 폴 웨이디 연구원은 지난 5월 독립기념관 주최 학술대회에서 “최근 국립문서보관소에서 발견한 기록에 따르면 이한응은 죽기 전 암호로 된 전보를 파기했다. 5월 10일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영국이 용인하는 내용의 2차 영일동맹 초안이 교환됐는데, 누군가 전보로 이를 이한응에게 알렸고 이한응이 절망한 나머지 자결을 결심했을 수 있다”고 밝혔다. 이한응의 시신은 고종의 명으로 본국으로 송환됐다. 을사조약이 체결되던 해 순국 1호인 그의 추도회에는 수백 명이 모였다고 한다.

◆특별취재팀=유지혜·안효성 기자, 왕웨이 인턴기자, 김유진·송영훈 대학생 인턴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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