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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하는 불가침 성역” 차지철, 탱크부대 밤마다 청와대 돌게 해 … 박정희, 멀리 둬야 할 사람 가까이 둬 … 종말의 시작이었다


1976년 12월 15일 서울플라자호텔에서 열린 아들 지만군의 생일축하연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따라주는 와인을 차지철 경호실장이 공손하게 받고 있다. 이 축하연엔 근혜·근령·지만 세 남매가 함께 참석했다. 유신 말기 박 대통령의 신임을 독차지한 차지철은 정치에도 깊숙이 개입했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1978년에 접어들면서 차지철 실장이 이끄는 청와대 경호실은 정상적인 궤도를 한참 벗어나 있었다. 대통령을 지키겠다며 상식 밖의 일을 벌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한밤중의 전차 시위였다. 경복궁에 주둔하던 수도경비사령부 30경비단에 전차 1개 중대를 갖다 놓고 밤마다 출동시킨 것이었다. 시민들이 곤히 자고 있을 시간인 새벽 1시부터 3시까지 전차 여러 대가 지축을 쿵쿵 울리면서 청와대 부근을 빙빙 돌았다. 그 소리가 어찌나 요란한지 동네가 들썩들썩했다. 인근 주민들이 처음엔 전쟁이 난 줄로 알고 불안해할 정도였다. 왜 그런 짓을 하느냐고 누군가 묻자 차지철은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누구든지 대통령을 방해하는 자는 걸리면 큰일난다는 것을 공공연히 알리기 위해서다.” 위압감을 심어줘 대통령은 불가침의 성역이라는 점을 알리기 위한 시위였다는 얘기다.

 차지철은 두 가지 속셈이었을 것이다. 탱크 시위의 첫 번째 목적은 자기가 아니면 박정희 대통령을 보필할 사람이 없다는 점을 대통령에게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차지철 자신이 그런 위치에 있다는 것을 주위에 알리기 위해서다. 한밤중에 청와대 바로 옆을 탱크가 한 대도 아니고 여러 대가 빙빙 도는데 박 대통령에게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었다. 박 대통령이 그만두라고 한마디만 했으면 차지철은 바로 멈췄을 것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를 말리지 않았다. 목숨을 걸고 대통령 각하를 지키겠다면서 한밤중에 전차까지 끌고 돌아다니는 차지철을 믿음직스럽게 여긴 듯했다. 차지철도 대통령이 묵인하자 그런 엉터리 짓을 계속했다.

 평소 나는 차지철을 따로 만나지 않았다. 청와대에서 마주쳐도 지나가는 말로 “각하 잘 모시게”라고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새벽의 전차 출동 이야기를 전해들은 뒤 우연히 만난 차지철에게 “해서는 안 될 짓을 하는구먼”이라며 정색하고 지적했다. 그러자 차지철은 “아, 그렇게 무섭게 해야 합니다. 대통령 각하께서 다 양해하신 일입니다”라고 당당하게 대답했다. 기가 찼지만 대통령이 승낙하셨다고 하니 나로선 더 이상 해줄 말이 없었다. 대통령의 권력이 비대해질수록 그에 정비례해 차지철의 경호실은 더 무지막지하게 변해 갔다.

 박 대통령의 신임을 등에 업은 차지철은 정치에도 공공연히 개입했다. 육군 헌병감 출신의 이규광을 중심으로 한 비공식 정보기관을 운영하면서 정치인 뒷조사를 하는가 하면 유신정우회와 민주공화당에 자신의 심복 의원들을 심어두고 여당과 국회까지 좌지우지(左之右之)하려 들었다. 공화당이 차지철 손에 있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였다. 어느 날 김계원 비서실장이 내게 “명색이 비서실장인데 나는 겉만 핥고 있습니다”면서 하소연했다. 김 실장에 따르면 차지철 경호실장은 오전 8시에 대통령 집무실에 들어가면 오전 11시까지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대통령이 오전 내내 경호실장과 시간을 보내다 보니 비서실장은 물론 국무총리와 장관들 중 어느 누구도 오전엔 대통령을 뵐 수가 없었다. 대통령께 결재를 받으러 찾아온 장관들이 비서실장실에서 기다리다가 그냥 돌아가는 일이 다반사였다. 비서실장이 제일 먼저 종합보고를 드린 뒤 경호실장이 대통령을 만나던 청와대의 오랜 질서가 깨진 것이다. 김계원 실장은 “차지철 실장이 그렇게 대통령께 말씀드릴 게 있을 만한 사람도 아닌데, 도대체 무슨 얘기를 그렇게나 오래 붙들고 하는지 모르겠다”며 한숨을 쉬었다. 대통령은 참모진 임명도 비서실장이 아닌 차지철과 상의해 결정한다고 했다.



 박 대통령이 차지철과 단 둘이 나눈 이야기는 내가 거기 없어서 확인할 수는 없지만 짐작은 간다. 박 대통령이 차지철에게 정치 쪽에도 개입하라고 지시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이 차지철에게 “네가 한 번 해봐라. 김재규(중앙정보부장)는 잘 못하지만 너는 되지 않느냐”라고 하면 차지철은 “아,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라고 자신에 차 대답하는 모습이 그려진다. 그 무렵 차지철은 박 대통령의 마음에 꼭 드는 언행을 하고 다녔다.

 야당은 물론 정부와 여당에서도 ‘차지철이 뭘 안다고 자꾸 날뛰고 다니느냐’는 반감이 팽배해 있었다. 차지철에 대한 적대감이 가장 컸던 사람은 정치공작의 책임을 맡고 있던 김재규 정보부장이었다. 차지철과 김재규, 두 사람 모두 박정희 대통령을 종신대통령으로 모시겠다며 치열한 충성경쟁을 벌이던 중이었다.

1977년 2월 10일 대만을 방문한 김종필 전 총리가 공항에서 장징궈(蔣經國·오른쪽 둘째) 행정원장의 영접을 받고 있다. 맨 왼쪽은 김계원 주대만대사, 맨 오른쪽은 김진봉 의원.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박 대통령의 총애가 차지철에게로 눈에 띄게 기울자 김재규는 입버릇처럼 “차지철 그놈 가만두지 않겠다”며 씩씩거렸다. 비서실장 김계원도 내심 차지철을 미워하고 있었다. 육군 대장 출신인 김계원은 성실하고 부드러운 사람이었다. 중앙정보부장을 지낸 뒤 주대만 대사로 일하던 김계원은 78년 12월 김정렴 비서실장 후임으로 임명됐다. 아마도 박 대통령은 그의 무던하고 온순한 성격을 좋게 보고 발탁한 듯하다. 김계원은 육군참모총장을 지냈지만 군악대를 창설해 국군 초대 군악대장을 맡은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다. 박 대통령은 김계원 실장을 말벗 정도로만 여겼다. 김계원은 술수와 대결이 난무하는 권력의 세계를 관리할 능력이 못 미쳤다. 차지철과 김재규의 과잉 충성 경쟁이 위험으로 치닫는 것을 뻔히 보면서도 조정 역할을 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는 차지철을 욕하는 김재규에게 심정적으로 동조하는 입장이었다. 차지철·김재규·김계원. 10·26의 무대에서 박정희 대통령을 둘러싸고 있던 세 인물을 생각하면 마치 연극이나 드라마에 나올 법한 절묘한 배역 설정과 같았다. 박 대통령은 멀리해야 할 대상들을 자신의 옆에 가까이 두면서 무슨 생각인지 대통령을 바르게 보좌할 사람들은 멀리 뒀다. 그것이 바로 종말의 시작이었다.

1975년 4월 17일 박정희 대통령이 포항시 북구 흥해읍 오도리를 찾아가 사방사업 공사 현장을 확인하고 있다. 김재규 건설부 장관(왼쪽)과 차지철 경호실장(오른쪽)이 서 있다. [중앙포토]
 차지철이 대통령에게 정치자금을 공급했기 때문에 총애를 받았을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건 그렇지 않다. 경호실장인 차지철이 대통령한테 돈을 갖다 바칠 만한 역할은 없었다. 정치자금은 주로 비서실장을 통해 기업주에게 협조를 구하거나, 실업인들이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접견하러 왔을 때 가지고 오는 식이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이 직접 정치자금을 받아 챙기지는 않았다. 실업인들이 돈을 가지고 오면 그 사람이 보는 앞에서 바로 비서실장을 불러 맡겼다. 박 대통령은 그 돈을 자신의 방에 두지 않고 모두 비서실장 금고에 보관하게 했다. 돈을 써야 할 일이 있으면 비서실장에게 가져오라고 해서 사용했다. 돈에 대해 개인적 욕심이 없었던 것은 박정희 대통령의 장점이었다.

 경호와 관련해 내가 가진 철학이 있다. 나의 일관된 사생관(死生觀)이다. ‘죽고 사는 건 천명(天命)’이라는 것이다. 나는 5·16 혁명 이후엔 덤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해 왔기에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별로 없다. 나와 가깝게 지낸 일본 실업인 구보 마사오(久保正雄)가 79년 어느 날 할 얘기가 있다며 집으로 찾아왔다. 그는 전날 경기도 고양시 뉴코리아 골프장에 갔다가 우연히 박 대통령이 골프를 치는 모습을 보았다고 했다. 구보는 조심스레 말했다. “참, 이거 안 할 말을 내가 하는데…. 경호하는 걸 보니 박정희 대통령도 끝이 보입니다.” 그의 말인즉 골프장 가는 길 양편에 50m 간격으로 경호원들이 배치돼 있고, 골프장 안에도 경호원들이 곳곳에 엎드려서 고개만 내놓고 있더라는 것이다. 그는 “골프 치는데도 저렇게 신변의 위협을 느끼고 경호원들을 잔뜩 배치해 놓다니 수카르노가 하던 게 연상돼 가슴이 섬뜩했소”라고 덧붙였다. 구보는 인도네시아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와 친했다. 수카르노의 세 번째 부인인 일본인 데위 여사를 소개해 준 사람이 구보였다. 구보에 따르면 수카르노는 육군사령관 수하르토가 세력을 쌓아가자 신변의 위협을 느낀 나머지 외간 여자를 만날 때도 경호원들을 우르르 달고 다녔다. 그러니 자카르타 시민들이 수카르노가 어떤 여자를 만나는지 다 알 정도가 됐다. 그리고 얼마 못 가 수하르토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구보는 내게 “박 대통령을 목표로 하는 부정스러운 도당(徒黨)들이 있습니까?”라고 물었다. 내가 “그런 것은 없습니다. 경호실이 그렇게 배치한 것입니다”라고 하자 구보는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예전엔 이렇지 않았소. 아주 불길한 예감이 듭니다”라며 걱정스러워했다. 구보의 말은 정곡을 찌르는 예언이었다. 그 이야기는 얼마 지나지 않아 10·26이라는 비극으로 드러났다. 삼엄한 경호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적은 내부에 있었다.

◆박정희 정치자금=1978년까지 9년3개월간 재임했던 김정렴 전 청와대비서실장의 회고에 따르면 72년 10월 유신 이전 박 대통령의 정치자금은 공화당 재정위원장과 경제부총리, 청와대비서실장, 중앙정보부장 4인위원회가 협의해 마련했다고 한다. 유신 뒤엔 박 대통령의 지시로 비서실장이 관리를 일원화했다. 정치자금의 규모는 매달 나가는 공화당 운영비 1억원을 포함해 연 30억~40억원이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인물 소사전 이규광(1925~2012)=육사 3기 출신으로 자유당 정권 시절 육군 헌병감을 지냈다. 5·16 직전 제5군단 부군단장 시절 하극상 혐의로 구속돼 준장으로 예편했다. 건설부 장관 보좌관으로 일하던 1963년 박임항 건설부 장관 등과 함께 ‘알래스카 토벌작전’으로 불리는 반혁명 사건에 연루돼 옥살이를 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의 처삼촌이다. 광업진흥공사 사장으로 재직 중이던 82년 처제인 장영자 부부의 사기 사건과 관련해 비리 혐의로 구속기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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