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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오디세이] 김훈 '강(江)의 노래'

단둥에서
70년이 흘러도 왜 싸우는가 … 압록강 단교는 묻고 있었다


압록강을 지나는 북한의 낡은 목선. 뒤로 신압록강대교가 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한반도에서 서해로 유입되는 강물은 연간 1200억t이다. 나는 숫자를 옮겨 적을 뿐, 이 물량의 규모를 상상하지 못한다. 압록강은 이 하해와도 같은 물의 23%(280억t)를 쏟아내고 한강이 16%, 금강이 6%, 황하가 40%를 차지한다.(고철환의 논문 『황해의 환경과 물질지수』 중에서)

 서해는 한반도와 중국 대륙 사이에서 오목하다. 밀물 때 서해의 힘은 북진한다. 물의 세력은 북쪽으로 갈수록 강력해져서 연안에 넘치고 발해만의 후미진 구석까지 가득 찬다. 그때 바다는 부풀어서 대륙을 압박하고 고깃배들은 물의 힘에 올라타서 포구로 돌아온다. 밀물 때 강들은 하구(河口·River Mouth)를 열어서 바다를 받는다. 조국의 강들은 남쪽부터 영산강·동진강·만경강·금강·한강·대동강·청천강 순서로 열리는데, 압록강 하구는 조차(潮差) 4m의 힘으로 바다를 받아들여서 먼 산골까지 바다의 기별이 닿는다. 강이 바다를 받아들이는 물리현상을 과학자들은 감조(感潮)라고 하는데, 나는 이 단어에서 산맥과 바다가 붙고 엉키는 조국 산하의 관능을 느낀다. 압록강은 이 관능의 북단이다. 

 나는 1948년, 분단된 한반도 남쪽에서 태어났고 그 자리에서 벌어먹고 살다가 늙었다. 이 운명은 내가 선택하거나 기획한 것은 아니었다. 나는 별수 없이 이 질곡을 받아들이면서도 거기에서 벗어날 길을 찾아서 발버둥 쳤지만, 어느 쪽도 온전히 이룰 수는 없었고 버둥거릴수록 자기 분열은 깊어졌다. 나는 2015년 여름에, 남은 시간이 많지 않을 것임을 스스로 아는 나이가 되어서 처음으로 압록강·두만강·백두산과 그 언저리를 관능이 작동되는 가시적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었다. 세월이 거꾸로 흘렀던지, 분단 70주년에 이르러 대량학살무기를 앞세운 적대관계는 극한으로 치달았고 여전히 갈 수 없는 강 건너 쪽 사람 사는 동네를 나는 겨우 망원경 구멍으로 들여다보았는데 그 구멍 속의 상념들도 1948년에 38선 이남에서 태어나 거기서 늙은 자의 자기 분열을 넘어서지는 못할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 선양(瀋陽)은 다만 경유지였다. 선양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단둥(丹東)으로 직행했다. 박지원(朴趾源·1737~1805)이 갔던 길을 거꾸로 가는 셈이었다. 선양에서 단둥까지는 일망무제의 벌판이었다. 좌청룡도 우백호도 거기에는 없었고 시선은 지평선 속으로 녹아들었다. 박지원은 대륙을 향해서 “한바탕 통곡하기 좋은 땅”이라고, 개벽하는 신천지의 감격을 토로했다. 그의 통곡은 살아 있는 인간의 몸과 대지와의 교감을 보여주는데, 아마 그 교감과 트임은 몸으로 걸어서 대륙을 건너가는 자에게 가능할 것이고 고속도로를 시속 80㎞로 달리는 버스 안에서는 걷는 자의 대지로부터 오는 직접성의 축복은 불가능해 보였다.

 내 고향 서울은 이 길의 맨 끝이다. 선양에서 단둥으로, 단둥에서 압록강을 건너서 의주로(義州路)를 따라 남행하면 그 길의 맨 끝, 서울 서대문구 현저동 고가차도 밑에 영은문(迎恩門)의 주춧돌 한 쌍이 남아 있다. 단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내 고향 서울의 영은문 주춧돌을 생각하고 있었다. 헐리기 직전 사진을 봤더니 영은문은 날아갈 듯 경쾌했고 길 건너편에 가난한 백성들의 초가집이 모여서 마을을 이루고 있었고 웬 사내가 허리를 굽혀서 일하고 있었다. 단둥으로 가는 버스 안에서, 나는 박지원과는 반대 방향을 향해 한바탕 ‘통곡’하고 싶었다. 방금 쓴 문장에서 나의 ‘통곡’은 과장되어 있을 것이다. 개인의 삶이나 나라의 역사가 영광과 자존만으로 성립될 수는 없겠고 치욕과 수난을 또한 감당해야 할 터이다. 세계의 질서가 인간의 편인 것도 아니고 강자가 못할 것이 없듯이 약자도 살아남기 위해 못할 것이 없을진대 영은문을 향해서 뒤늦게 통곡할 필요는 없으리라고 나는 나 자신을 위로했다. 그러나 나의 자위에도 불구하고 단둥으로 가는 길 위에서 영은문은 내 마음의 바닥에 남아 있었다.

 1897년 무렵 중국의 힘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져 있었다. 그때 개화적인 선구자들이 영은문을 헐고 ‘독립문’을 세웠는데, 내가 며칠 전에 가보니까 청소년들이 놀러와서 ‘문립독’이 뭐냐고 저희들끼리 물어보고 있었다.

 사나운 대륙의 군대들은 모두 선양에서 발진했다. 당나라 ·몽고 ·금나라 ·청나라 군대와 6·25 때 ‘항미원조전쟁’에 돌입한 마오쩌둥(毛澤東) 군대의 주력이 모두 선양에서 발진해 단둥에서 강을 건넜고 의주로를 따라 남쪽으로 내려왔다. 외국 군대가 물러가면 사대(事大)의 긴 대열이 그 길을 따라서 선양으로 갔다. 대열은 소리를 지르고 꽹과리를 때려서 늑대를 쫓으면서 이 길을 따라서 눈 덮인 대륙을 건너갔다. 이 사대의 대열에 끼어들어서 전복과 저항, 해체와 재구성의 이념과 실천방안이 또한 흘러들어 왔으므로 ‘길에는 주인이 없어서 그 위를 걷는 자가 주인이다’라는 선인(신경준·申景濬·1712~1781)의 옛글은 여전히 새로운데 그 주인 없는 길이 바로 선양~단둥~서울을 잇는 의주로다.

 저녁 무렵 단둥에 도착했다. 단둥의 중심가는 온갖 접객업소들의 네온사인으로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호텔 앞 4차로 건너편이 압록강이었다. 강둑에서 젊은 남녀가 오랫동안 키스했다. 남자들이 허연 허벅지를 드러낸 여자를 오토바이 뒷자리에 태우고 저무는 강의 하구 쪽으로 질주했다. 압록강을 거슬러온 밀물이 호텔 앞 둑방에 와서 철썩거렸다.

 단둥의 본래 지명은 안둥(安東)이었는데, 문화대혁명의 기운이 태동하던 1965년에 마오쩌둥 정부는 이 도시의 이름을 단둥(丹東)으로 바꾸었다. 동방을 붉게 물들이는 최전선의 도시, 혁명의 수출기지라는 뜻이었다. 강 건너 신의주는 불빛이 없고 순결한 고구려의 밤이 보존되어 있었다. 국경의 서치라이트가 어둠을 훑었다. 단둥은 강 건너 쪽을 붉게 또는 어둡게 물들이는 데 성공한 것으로 보였는데 단둥의 첫인상은 휘황찬란하고 생기발랄하고 자본의 도시였으며, 그 자본은 이제 초기의 축적 단계를 넘어서 투자를 끌어들여서 팽창을 도모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다. 호텔 방에서 밤의 단둥 거리를 망원경으로 살폈더니 ‘사회주의의 핵심 가치를 보존하자’는 정치구호가 적힌 현수막이 여기저기 걸려 있었다. 팽창하는 자본의 힘 앞에서 단둥은 전환을 향한 자기 분열을 일으키고 있었다. 



 23일 오후에 유람선을 타고 압록강 하구를 돌아보았다. 배는 강 건너 신의주 쪽으로 바싹 접근했고 위화도 어귀에서 유턴했다. 북한 여인들이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었다. 북한 여인들이 머리에 수건을 쓰고 쪼그려 앉은 자세는 어렸을 때 내 엄마나 이모의 폼과 똑같았다. 빨래를 마친 여인들이 대야를 머리에 이고 돌아갔다. 멀어서, 북한 여인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멀었지만, 여자라는 느낌은 전해져 왔다.

 그 여인들의 마을은 칠을 하지 않은 단층 건물들이 회색빛 자연 취락을 이루었고 그 건물 위에 ‘선군 조선의 태양 김정은 장군 만세’라고 적힌 선홍색 현수막이 걸려서 회색과 선홍색이 극명한 대비를 보여주었다. 사내들이 허리를 굽혀서 뻘에서 무언가를 줍고 있었다. ‘인흥433’이라는 선명(船名)을 가진 배는 7~8t쯤 되어 보였는데 강의 상류 마을과 하류 마을 사이에서 여객과 짐을 실어나르고 있었다. 작은 배들도 모두 인민공화국 깃발을 달고 있었는데, 깃발은 해풍에 삭은 것이 없고 모두 다 선명했다. 배들은 강을 가로질러서 단둥 쪽으로 오지 못하고 위아래로 오르내렸다. ‘중강진’이라는 이름의 배는 1호에서 6호까지 보였는데 모두 대형 크레인을 장착한 준설선이었다. 압록강 하구에서 모래 파기는 매우 중요한 사업으로 보였다. 

 임진왜란 때 임금은 이 강가까지 쫓겨와서 문장을 지었다.

 “우리 땅이 다 끝났으니, 나는 이제 어디로 가야 하나.” 신하들이 끌어안고 울었다. 6·25전쟁 때 끊어진 압록강 단교(斷橋)에도 이 극변(極邊)의 정서는 배어있었다.

 1950년 10월 하순에 중공군은 이미 북한의 산하로 이동하고 있었다. 미군은 중공군의 개입 규모에 대한 정확한 정보가 없었고 공군력이 없는 중공군의 군사적 능력을 과소평가했다. 중공군 30만 명은 눈이 내리듯이 조용히 북한의 산하로 이동했다. 펑더화이(彭德懷) 사령부는 선양에 병참기지를 건설하고 선양~단둥~신의주의 보급축선으로 군수물자를 운송했다.

 50년 11월 8일 미 공군 전투기 600대가 신의주를 폭격했고 소이탄 8500발로 신의주를 불태웠다. 미군은 압록강 하구에 항공모함을 대놓고 함포사격을 퍼부었다. 신의주는 가루가 되었다. 압록강 철교 폭파작전에는 미 극동군 소속 B-29 폭격기 79대가 출동해서 교량에 450㎏의 폭탄을 투하했다(자료:『6·25전쟁 1129일』 이중근 편저). 압록강 철교는 북한 쪽에서부터 4개 교각 구간이 끊어졌는데, 중국 쪽 국경선을 건드리지 않으려고 폭격기 조종사들은 고난도 기술을 발휘했다. 이날 날씨가 맑아서 조종사들은 넓은 시야를 확보할 수 있었고 목표물 식별에 어려움이 없었다. 지금 압록강 철교가 끊어진 자리에는 녹아내린 철강재들이 용암이 흘러내리는 모습으로 굳어져 있다. 단교는 ‘고전적 혁명유적지’로 보전되어 있고 30위안의 입장료를 받는 국제관광명소다. 단교 입구에는 북한으로 진공하는 인민해방군 보병 대열의 모습이 투박한 부조상으로 조각되어 있다. 보병들의 무장은 소총 한 자루뿐이었다. 그 뒤에는 만주로 진공하던 시절 일본 군대의 토치카가 ‘침략의 증거물’로 보존되어 있다. 중국 측 설명문에는 “침략자 미군이 중국 정부의 경고를 무시하고 전쟁의 불씨를 압록강까지 몰고 와서 중국 국경에서 총질을 함으로써 중국 인민에게 엄중한 위협을 가했다”라고 적혀 있었다. 50년 연말부터 중공군은 30여 개 사단으로 밀고 내려왔다. 국군과 유엔군은 압록강·두만강 전선에서 후퇴했다. 동부전선은 장진호 전투에서 수많은 사상자·동사자를 내면서 흥남 철수에 성공했고 서부전선은 의주로를 따라 밀려 내려와 1월 4일 서울을 다시 내주었다. 후퇴한 부대들이 압록강물을 수통에 담아와서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 대통령은 물을 마셨다. 그때, 내 엄마는 두 살 된 나를 포대기로 업고 부산으로 피란 갔다. 아 젊은 엄마는 어린 우리 삼남매를 끌고 어떻게 눈보라 속에서 부산까지 갔던 것일까.

 내가 자라서 신문을 읽을 수 있게 되었을 때 나는 내가 두 살 때 이 나라에서 발행된 신문을 모두 찾아서 읽었다. 지옥이 현실 속에서 펼쳐져 있었다. 1월 초부터 대통령은 시민들에게 말했다. 피란을 가고 안 가는 것은 각자 임의로 하라, 정부가 관여할 수 없다. 갈 곳이 있고, 갈 수 있는 사람은 가는 것도 무방하겠다. 피란은 명령이 아니고 권유도 아니다. 다만 날씨가 추우니 피란을 갈 때는 식량과 이부자리를 지참하라. 근신자재하고 태연자약하라. 경거망동하지 말고 일희일비하지 마라. 질서를 지켜서 문명한 국민의 성숙도를 보여달라 ….

 50만 피란민의 대열이 300리에 걸쳐서 남쪽으로 이어졌다. 고관대작들이 군용차, 관용차를 징발해서 가재도구와 처자식을 싣고 피란민들의 대열 사이로 먼지를 일으키며 질주했다. 국방부 참모가 성명을 발표해서, 제발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호소했다. 국방부 성명은 피란민들에게 버리고 가는 김치나 간장·된장이 있으면 가까운 군부대에 전달해주기 바란다고 말했다. 이 모든 지옥의 참상은 선양에서 단둥으로, 압록강 단교를 건너서 밀려 내려온 것이었다. 내 생애의 시발점에서, 압록강 철교는 끊어져 있었고, 그 지옥이 빚어내는 모든 조건들이 내 삶의 기초 환경이었다. 그러므로 내 고향은 의주로 맨 끝인 서울이 아니라 바로 이 압록강 단교일지도 모른다.

 지금, 끊어진 압록강 철교의 녹슨 철강재들이 여름의 폭양을 받아서 뜨거운 비린내를 풍기고 있다. 그 단교에서는 강의 로망이나 강의 서정을 생각할 수 없었다. 너는 지금 어떠한 나라, 어떠한 시대에 살고 있느냐. 너의 두 살 때부터 지금까지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가. 너는 왜 같은 자리에 주저앉아 있는가, 너희들은 왜 70년 전의 싸움을 아직도 싸우고 있는가를 그 끊어진 다리는 가혹하게 묻고 있었다. 강 건너 마을에서 이집 저집 연기가 올랐다. 무엇을 끓이는지 무엇을 태우는지 알 수가 없었다.

[江의 노래①멀티뉴스] 분단 70년, 평화가 와야 통일이 온다

고구려 초기 400년 도읍지, 지안
유리에 갇힌 광개토대왕비는 광야를 달리며 외치고 싶다

‘동양의 피라미드’라 불리는 거대한 돌무덤인 장군총을 참가자들이 탑돌이 하듯 둘러싸고 돌았다. 오녀봉 채석장에서 15년 걸려 날라온 거대한 돌 1200개의 운반 방법이 놀랍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안(集安)으로 가는 G201 도로 연변에서, 여름의 산맥은 푸르고 힘찼다. 빛나는 산맥들이 하늘을 향해 고함을 지르는 듯했는데, 산맥을 돌아 나가면 한없는 벌판이 전개되었고, 벌판의 먼 가장자리에서 산맥은 다시 일어서서 끝이 없었다. 지안은 압록강변의 산악분지였다. 험준한 지형에 의지해서 요새형 도읍을 여는 고대 국가의 산세가 그대로 남아서 여름의 힘으로 번들거렸다.

 지안의 민가들은 비슷한 크기에 동일한 모델로 지어졌고 담장의 높이도 똑같아서 사회주의식으로 설계된 취락의 동질성을 보였고 마을에는 상업광고가 전혀 없었다. 집집마다 담장에 삼족오(三足烏)·봉황새·연꽃·구름 같은 고구려 고분벽화의 문양을 그려 놓았다. 무덤 속에서 나온 문양들이 사람 사는 마음의 담장을 꾸미고 있으니, 여기는 고구려 초기 400여 년의 강성한 도읍지다.

 고구려 왕들의 존호는 유교적 세계관의 관념에 물들지 않아서, 삶과 마주 대하는 언어의 건강함을 보여준다. 산상왕(山上王, 10대), 동천왕(東川王, 11대), 중천왕(中川王, 12대), 서천왕(西川王, 13대), 봉상왕(烽上王, 14대)들은 죽어서 그 왕이 묻힌 자리의 이름을 존호로 삼아 후세에 전했다. “11월에 왕이 돌아가시니 소수림(小獸林)에 장사 지내고 존호를 소수림왕이라고 하였다”는 대목은 내가 읽은 『삼국사기』 중에서 가장 아름다운 문장에 속한다. 소수림은 어디인가. ‘작은 짐승들이 모여 사는 숲’이라는 뜻으로 봐서 아마도 국내성 왕궁에 딸린 동물원이 아닐까. 고구려의 왕들은 죽어서 강가에 묻히거나 산꼭대기 봉수대에 묻히거나 ‘작은 짐승들이 사는 숲’에 묻혀서 한 줌의 흙을 국토에 보탰고 그 묻힌 자리의 지명에 불멸의 지위를 부여했다. 고구려인들의 강토 사랑은 그처럼 구체적이고 현실적이었다. 왕들은 죽어서 자신의 존호를 국토에 포개었다.

 광개토대왕(廣開土大王, 20대)의 존호는 왕의 무덤 자리가 아니라 그 생애의 자랑과 고난을 압축하고 있는데, ‘광개토’는 한반도 모든 임금의 존호들 중에서 가장 사실적이고, 서사적이고, 압도적이고, 다이내믹하다. 광개토대왕은 39세에 죽었다. 그의 아들 장수왕은 97세까지 살았고 그중 78년을 왕위에 있었다. 장수왕은 장수하기도 했지만 그의 존호에서는 부왕의 요절에 대한 한이 묻어난다. 광개토대왕의 치세에는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편안하고 오곡이 풍성했다’고 비문에 적혀 있으니, 이 젊고 용맹한 임금이 요절했을 때 고구려 신민의 슬픔은 하늘에 닿았을 것이었다.

 지금 광개토대왕비는 유리로 지은 비각 안에 갇혀 있다. 이 유리 껍데기를 상상 속에서 없애버려야만 6.39m 비석의 온전한 모습이 보인다. 비석은 돌의 테두리를 대충만 다듬었고, 이수가 없는 거친 자연석이다. 그 돌은 가없는 들판에서 우람한 존재감으로 광야를 압도하고 있다. 문자가 산하를 직접 마주 대하고 있고 그 긴장감이 비석 전체를 휩싸고 있다. 그 자체는 획이 굵고 기교를 드러내지 않는 안정된 예서였고 역사의 들판을 향하여 직접 외치는 강력한 생명력을 품어내고 있었다. 문자는 시대의 들판에서 벌어진 정복과 살육을 로망으로 바꾸어 놓은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나는 감당하기 어려웠는데, 비석의 1775자 문자들은 산하를 휩쓸고 간 말 먼지와 눈보라가 돌에 각인되는 방식으로 전개되고 있었다.

‘오회분’ 5호묘 고분벽화에 그려진 바퀴를 굴리는 남자 모사도(왼쪽), 유리 비각 속 ‘광개토대왕비’.

 장군총은 ‘동양의 피라미드’라는 별명처럼 크고 웅장했다. 장군총이 장수왕의 무덤이라는 설은 물증이나 기록으로 뒷받침되지는 않지만,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비와 가까운 들판에서 고대적인 힘의 단순성을 거대한 규모로 분출하고 있었다. 광개토대왕은 북진했고 장수왕은 남진했다. 장수왕은 평양으로 도읍을 옮겼으므로 평양에서 죽었을 터인데 죽어서 부왕이 묻힌 고토(故土)에 묻히려고 지안에 미리 무덤 공사를 시작했을 수도 있다. 나는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 사이에 부자 관계가 성립되기를 바란다. 그것이 역사의 로망이며 임금 부자의 홍복일 것이다. 장수왕의 장사를 치를 때 평양에서 지안으로 향하던 운구 대열의 위용을 나는 상상할 수가 없지만 광개토대왕비와 장군총의 표정은 고대적 열정의 분출로 서로 통해 있었다. 크고 거침없는 힘이었다.

 지안에는 20여 기의 고구려 벽화고분이 산재해 있다. 그중에서 일반이 관람할 수 있는 곳은 오회분(五會墳) 5호묘뿐이다. 오회분은 다섯 기가 한곳에 모여 있는 무덤 떼를 말한다. 5호묘의 현실벽면에서 천장에 이르는 공간에는 환상의 나라를 날아다니는 상서로운 짐승들과 악기를 연주하며 하늘로 날아가는 선계의 인간들이 그려져 있다. 거기에는 현실을 넘어서는 공간이 있었고, 그 공간을 흐르는 음악과 율동과 시간이 있었다.

 벽화 속에서, 바퀴를 굴리는 남자가 현실과 초현실, 그 양쪽의 시간을 건너가고 있었다. 그 바퀴는 소달구지나 마차 바퀴처럼 투박한 바퀴가 아니라 내 자전거 바퀴처럼 날렵하고 경쾌한 바퀴였다. 바퀴살은 가늘고 선명했다. 단단한 강철이 아니면 그처럼 가는 살로 하중을 받아낼 수 없을 것이었다. 그 바퀴는 수레에 연결되지 않은 바퀴였고, 아직 현실에 적용되지 않은 바퀴의 순수한 원형이었다. 고구려의 바퀴는 세속적 번영의 절정을 이루는 위세품이며 실용품이었던 모양이다. 무덤 속의 수많은 그림 중에서 그 바퀴는 가장 사실적이며 첨단적인 신문물이었다. 그 고구려의 바퀴가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흘러가고 있었는데, 바퀴를 쥔 사람의 동작은 경쾌했다. 도교적 초월의 열락 속에서도 고구려 사람들은 세속적 욕망의 건강함을 단념하지 않았다. 오회분 5호묘뿐 아니라 다른 고구려 무덤 속에서도 세속의 생활은 건강하고 활기찬데, 바퀴는 그 첨단을 이룬다.



 베이징과 선양을 다녀온 박제가(朴齊家, 1750~1805)는 바퀴에 열광했다. 그의 저서 『북학의』는 첫 페이지부터 바퀴 예찬으로 시작한다. 그는 바퀴의 문화적·경제적 사명의 발견자였다. 그는 바퀴의 이용이 단절된 조선의 현실을 개탄했고, 연결된 도로를 바퀴로 소통함으로써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진언은 배척되었다. 박제가의 시대에까지 고구려의 바퀴는 버려져 있었다.

 바퀴는 원이다. 이것에 동력을 연결시켜서 도로 위에서 굴리면 인간은 한없이 앞으로 나갈 수 있다. 인간의 갈 길은 멀고 멀다. 그림 속의 고구려 바퀴는 아직도 굴러가고 있었다.


[江의 노래②멀티뉴스] 유리에 갇힌 광개토대왕비는 광야를 달리며 외치고 싶다


두만강에서
북·중·러 휘돌아 흐르는 두만강, 우리에게 오라 한다


25일 오전부터 6인승 승합차로 백두산을 올라갈 때 비가 내렸다. 자작나무 숲이 젖어서 향기가 대기에 낮게 깔렸다. 정상에 올랐을 때 구름이 갈라지고 개벽하듯이 햇살이 내려왔다. 천지는 창세기의 호수처럼 시원(始原)의 힘을 품어냈고 젖은 봉우리들이 번쩍거렸다. 그러고는 다시 안개가 몰려와서 천지를 뒤덮었다. 고은 시인이 손나팔을 입에 대고 “안개다! 안개다! 안개가 온다”고 소리소리 질렀다. 그는 목청을 다해서 고함쳤다.

 백두산 정상이 안개에 덮이는 기상현상이 그 시인에게는 지체 없이 알려야 할 파천황의 긴급 중대사태인 것이었다. 그의 고함소리에는 주술적 신명이 담겨 있어서, 안개의 접근을 보고하는 것이 아니라, 먼 지평선 쪽의 안개를 불러들이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안개다! 안개로구나!” 그 안개 속에서 사람들은 흐린 사진을 찍었다.

 호텔의 만찬 자리에서는 북한의 젊은 여성들이 봉사했고 식사 후에는 간단한 공연이 있었다. 호텔 정문 앞에는 인민공화국 깃발과 오성홍기가 교차로 세워져 있었다.

 호텔봉사원들은 미녀로 소문난 압록강 건너 강계 여성이라고 했다. 체구가 크지는 않았으나 목이 길고, 눈동자가 새카맣고 시선은 찌르는 듯했고, 눈썹은 짙었고, 긴 말총머리에 윤기가 흘렀다. 김동환(1901~미상)의 장편 서사시 ‘국경의 밤’의 여성 주인공 ‘순이’는 여진족의 후예 재가승(在家僧)의 딸인데, ‘머루알같이 까만 눈과 노루 눈썹 같은 빛나는 눈초리/게다가 웃을 때마다 방싯 열리는 입술’로 묘사되어 있었다. 나는 ‘순이’를 떠올리며 젊은 여성봉사원들이 가져다주는 음식을 먹었다. 조국 산천의 마을마다 집집마다 별 같은 딸들이 자꾸자꾸 태어나기를 나는 바랐다. 여성봉사원들은 일하기 편하게 개량한 한복 차림에 인공기 배지를 가슴에 달고 있었다. 왼쪽 가슴에 단 여성도 있었고 오른쪽 가슴에 단 여성도 있었다. 그 차이가 무엇인가를 물었는데, 웃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사슴고기의 향기는 품격이 높아서 잘생긴 짐승의 이미지와 같았다. 개고기는 메뉴에 없었지만 손님이 부탁하면 무침으로 가져다주었다. 양념이 진하지 않아 개의 육질이 직접 전해져 왔다. 산이 깊어서 그럴 테지만 나물이나 야채요리는 단연코 뛰어났다. 무와 배추는 섬유질이 억세고 물이 많아서 씹으면 와삭거리면서 상서로운 액즙이 입안에 가득 찬다. 김치는 소금이나 젓갈에 과도하게 절여지지 않아서 고랭지의 서늘한 기운이 살아 있었고 그 국물은 고지의 겨울바람처럼 청량했다. 이 날카로운 국물을 한 모금 마시면 목구멍에서 창자 쪽으로 찌릿한 전류가 흐른다. 나는 김칫국물에 흰쌀밥을 비벼 먹었다. 나물은 생전 처음 먹어보는 것도 많았는데 모두 다 들이나 산의 흙 냄새·물 냄새, 햇볕의 강도, 계절의 촉감을 지니고 있었고 나물마다 그 서식지의 질감을 사람의 몸 안으로 밀어 넣어 주었다.

 해물은 말린 멸치나 대구포 정도였지만 생선요리의 핵심부는 강에서 잡아온 민물고기였다. 재료에 토막을 치지 않고 통째로 찜으로 내놓았다. 압록강·두만강과 그 샛강들의 격류를 오르내리며 살아온 민물고기들은 살이 단단했고 부위마다 맛이 달랐는데, 살아서 고생을 많이 했을 배지느러미나 꼬리지느러미 언저리에 붙은 살이 향기로웠고 씹기에 알맞은 저항감이 있었다.

 국토의 관능은 모든 아름다운 얼굴들 위에, 모든 산과 강과 바다에, 그리고 모든 나물과 무·배추·물고기 속에 살아 있었는데, 이 관능을 공감함으로써 화해를 이루자는 주장은 통일의 전략이 될 수 없는 것인지, 나는 답답했다. 나는 음식을 나누어 먹는 것 같은 사소한 일상에 자리 잡는 평화를 생각했다. 토론으로 뜨거운 버스 안에서 나는 숙박지의 저녁밥상을 기다리고 있었다.

 백두산에서 두만강 하구까지는 험준한 산악도로를 따라서 달렸다. 도로는 두만강 변으로 바싹 접근했다가 다시 멀어지기를 거듭했다. 강 건너 쪽에서 농부가 강가에 소를 몰고 와서 물을 끼얹어 주고 있었다. 소는 쟁기와 멍에가 풀어져 있었다. 일을 시키다가 소가 너무 힘들어하니까 더위를 식혀 주는 모양이었다. 무엇을 줍는지 아이들이 강가에서 허리를 구부리고 있었다. 사내들이 시멘트 반죽을 흙손으로 발라서 단층집을 짓고 있었는데, 그 뒤로 비탈밭은 가팔라서 소달구지가 올라갈 수 없을 듯싶었다. 어느 마을에나 상업간판이 하나도 없어서 생업이 무엇인지 짐작하기 어려웠다. 날이 어두워도 집들은 불을 켜지 않았다.

 북·중 사이의 두만강 국경은 한반도의 DMZ처럼 삼엄하지는 않지만 월경이탈자를 막기 위해 철조망이 처져 있고 북한군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버스가 강에 바싹 접근할 때 건너편 초병이 한 명 보였다. 키가 작고 마른 체구에 소총이 힘겨워 보였다. 나이가 몇인지, 군대 생활은 견딜 만한지, 구타나 따돌림은 없는지, 고위 간부들이 군수품을 빼먹지는 않는지, 방산비리는 없는지, 겨울에 보초 설 때 발은 시리지 않은지, 고향이 어딘지, 제대는 얼마 남았는지, 형제는 몇인지, 장래희망은 무언지, 여자친구는 있는지, 남쪽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묻고 싶었으나 될 말이 아니었다. 아마 그 젊은이는 스물네댓 살쯤 되었을 것이다. 그가 그 나이 또래의 남쪽 젊은이들의 적(敵)이며 젊은이·늙은이 할 것 없이 서로가 서로를 적이라는 것은 난해했다. 이 젊은이들이 또다시 어느 고지 어느 참호에서 마주치면 서로 쏘고 질러야 하는 현실을 우리는 지금 미래의 세대에게 전승시키고 있다. 나는 ‘통일’보다도 우선 강 건너편에서 보초 서고 있는 그 북한군 병사의 생애 속에서 인간다운 가치와 소망들이 온전히 구현되기를 바랐다. 생명을 서로 긍정하는, 가장 단순한 방식으로의 평화는 불가능할 것인지를 나는 강가에서 생각했다.

 두만강은 해란강과 훈춘강을 합치면서부터는 북북동에서 남남동으로 진로를 바꾼다. 협곡구간을 빠져나온 강물은 드넓은 초원과 습지를 굽이치면서 강의 커다란 자유를 보인다. 두만강은 바닷물이 드나들지 않아서 그 하구까지도 신생(新生)의 표정으로 빛난다. 동해에서 아침 해가 뜰 때, 두만강 물줄기에 햇빛이 닿으며 강물을 따라서 먼 산골까지 아침의 노을이 퍼진다고 하는데, 이번에 보지는 못했다. 이 하구에서 한반도와 러시아, 중국의 국경이 마주친다. 사람들이 그어놓은 금 위로 풀들이 우거지고 강물이 흘렀다. 여기가 조선 후기 이래로 두만강 너머로 쫓겨가고 숨어들고 벌어먹으러 가던, 한민족 디아스포라의 들판이다. 강물에는 인간의 고난과 설움의 자취가 남아 있지 않고 강은 저 혼자 자유롭고 아름다워서, 시인 이용악(李庸岳·1914~71)은 두만강을 ‘천치(天癡)의 강’이라고 불렀다. 이 강가에서 지금 중국 공안들이 월경한 북한 사람들을 잡으려고 풀섶을 뒤지고 있다. 두만강 하구에서 디아스포라는 진행 중이다. 두만강 초소에서 보았던 북한군 병사의 이름을 모르는 채 나는 서울로 돌아왔다.


김훈


[江의 노래③멀티뉴스] 북·중·러 휘돌아 두만강, 우리에게 오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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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