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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죽었다? 우리 경쟁상대는 ‘무한도전’

김태형
박은석
“연극의 경쟁상대는 ‘무한도전’같은 예능입니다.”

웬 당치도 않은 소리인가 싶다. 집에 누워 TV만 켜면 아무 노력없이 즐길 수 있는 예능과 값비싼 티켓을 사서 비좁은 공연장에 갇혀 애써 의미를 찾아야 하는 연극이 어떻게 상대가 되나.

발언의 주인공 김태형(38) 연출의 신작 ‘카포네 트릴로지(9월 29일까지 홍익대대학로아트센터 소극장)’를 보면 수긍이 간다. 영화 세트장처럼 리얼하게 꾸며진 작은 호텔방에 들어가 방 안에서 벌어지는 소동의 생생한 목격자가 되고 보면 이게 예술인가 오락인가 싶다. 70분짜리 3개의 공연을 각각 예매해 극장을 수차례 들락거리며 일반소극장보다 비좁은 좌석에 몸을 구겨 넣고 반대편에 앉은 관객을 마주봐야 하는 불편함, 그리고 서로 무관한 듯 얽히고설킨 상징과 오브제의 복잡함에도 티켓을 구하기 힘들 정도로 인기다. 시카고 렉싱턴 호텔 661호실에서 대체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 걸까. 김태형 연출과 주연배우 박은석(32)을 만났다.

본래 200석 규모의 소극장 구조를 바꿔 호텔 객실로 만들었다. 침대가 놓인 방 한가운데에서 배우들이 연기하고, 객석은 양쪽으로 50개씩 놓았다. 양쪽 객석 간의 거리는 3m 정도. 무대와 객석의 경계가 없어 1열 관객은 배우가 걸려 넘어지지 않게 다리를 조심해야 할 정도로 밀착된 공간이다.
‘카포네 트릴로지’는 지난해 에딘버러 프린지 페스티벌에서 주목받았던 최신작. 지난해 서울국제공연예술제 공식초청작 ‘벙커 트릴로지’를 만든 ‘천재 창작자’ 제스로 컴튼 연출·제이미 윌크스 작가 콤비가 만들었다. 한 호텔방에서 1923, 34, 43년에 차례로 일어난 세 사건을 옴니버스로 엮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해프닝이 혼을 쏙 빼는 코미디 ‘로키’, 냉혈한 갱스터에게 뜻모를 연민이 깃드는 서스펜스 ‘루시퍼’, 충격적 반전의 하드보일드 ‘빈디치’. 각각 전설적인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가 활개치던 시대와 그가 잡혀간 시대, 그가 완전히 사라진 시대에 범죄와 비극의 주인공이 된 사람들의 초상이다.

3명의 배우가 3작품을 돌며 차례로 주인공을 맡는데, 한 작품에서도 여러 배역을 오가며 의상이 다 젖도록 비지땀을 쏟는다. 무대 아닌 무대를 사이에 두고 양쪽 객석이 바싹 조여 오니 배우는 기댈 데가 없다. 다른 작품보다 3배 아닌 30배가 힘들다는 게 배우들의 이구동성이다. 박은석이 맡은 ‘영맨’은 그 중에서도 가장 많은 땀을 흘려야 한다.

“옷 갈아입느라 정신없어요. 침대 밑으로 기어나가자마자 옷 벗으면서 뛰고, 바지는 갈아입을 시간이 없어서 덧입어야 해요. 마지막에는 바지를 세 개 입고 있죠. 가발도 쓰는데 머리가 땀 때문에 젖어 흘러내리니 덥기도 하고 정신도 없어서 땀을 더 많이 흘려요.”

객석이 너무 가까워 불편하지 않냐니 오히려 재미있고 연기에 도움이 된단다. “양 옆에서 조여들어오는 공간에 갇히다 보니 관객의 즉각적인 반응에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보통 무대에서는 관객이 웃어도 크게 와닿지 않는데 여기서는 눈앞에서 터지는 걸 배제하지 못하니 그만큼 고도의 집중력이 요구되죠. 이 무대에서 릴렉스하고 집중하는 게 훈련이 되면 일반 무대에서는 훨씬 여유롭게 연기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그가 맡은 ‘영맨’은 마지막 에피소드 ‘빈디치’의 주역이다. 하지만 멀티맨으로 등장하는 ‘로키’에서의 연기가 더 빛난다. 잘생긴 정극 배우가 온몸을 던지는 코믹 연기는 흔히 볼 수 없는 기회이기 때문이다. “굉장한 도전이에요. 코미디도 멀티도 해본 적 없거든요. 제 연극 인생의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도전인 것 같아요. 언제 또 대머리 가발을 써보겠어요. 캐릭터 연기 연습이 제 자신을 깨버리는 계기가 된 것 같아요. 새벽까지 연습을 해야 했는데 바쁘고 방전된 상태에서 다 놓아 버리니 거기서 뭔가 나오더군요.”

“적절한 시기에 찾아온 도전”
제목에 ‘카포네’를 내걸고 있지만 카포네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1920~40년대까지 미국의 시대 흐름과 그 시대 살았던 사람들의 정서를 대변하는 존재일 뿐. 눈에 보이지 않지만 분명히 우리 곁에도 존재하는 마피아적 시스템에 갇힌 자본주의 사회의 은유기도 하다. 김태형 연출에게 물었다.

내용보다 형식이 특별한 작품인데, 연극에서 형식의 역할이 어느 정도인가요.
“고전을 재해석한 ‘벙커 트릴로지’도 마찬가지고, 원작자들은 결코 새로운 이야기를 하는 팀이 아니지만 어떻게 이야기하느냐와 결합되어 굉장히 새로운 이야기로 보이는 결과를 만들어냈죠. 저도 형식에 대한 고민을 많이 하는데, 형식을 확 바꿔버리는 게 내용을 주장하는 한 방법이라 생각해요. 이 작품도 새로운 내용은 아니지만 갇힌 공간이라는 형식이 카포네 영향력에 갇힌 사람들의 이야기를 부각시키고, 지금 이 시대의 관객에게도 그 영향력에 갇혀 있는 듯한 느낌을 받게 하니까요.”

심오한 메시지를 기대하면 실망스럽고 재미에 올인했다고 보기엔 깊이가 느껴지는데, 이 작품은 대체 예술인가요 오락인가요.
“제 정체성은 명확해요. 상업적인 작품을 돈만 벌려는 목적으로 보이지 않게 예술적 가치를 담는 거죠. 거기에 딱 맞는 작품이고 원작의 형식 자체도 예술적인 시도지만, 우린 내용적 가치도 놓치지 않으려고 했어요. 마냥 멋부리는 게 아니라 살아 숨쉬는 캐릭터의 진정성을 확보하고, 그 상황의 페이소스로 관객이 자기 삶을 돌아볼 수 있게 하려는 욕심으로 만들었어요. 예술성을 포기하지 않는 오락이라고 말하고 싶네요.”

영화 ‘킹스맨’처럼 남자들이 더 좋아할 작품 같은데 여자 관객이 90%인 상황을 어떻게 보나요.
“남자들은 무식하게 술만 먹어서 그래요(웃음). 대학로를 끌고가는 20~30대 여성에게 너무 고맙죠. 다만 조금씩이라도 그밖의 사람들을 만나려고 노력중이에요. 이 작품은 아빠들이 봤으면 좋겠어요. ‘루시퍼’의 경우 딱 이 시대 중년남성들 얘기거든요. 사실 공연만의 문제가 아니라 거대한 사회문제에요. 남자들이 ‘저녁이 있는 삶’을 살아야 공연도 보겠죠.”

각 에피소드는 언뜻 별 상관이 없다. 하지만 총성이 난무하는 암흑의 공간에 생뚱맞게도 빨간 풍선 하나가 끼어들어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굴레를 벗어나고 싶은 욕망, 자유롭고 싶은 꿈을 상징하는 핵심 오브제지만, 놀랍게도 원작에는 없단다. 풍선의 행보는 에피소드마다 다른데, 첫 에피소드 ‘로키’에서만 주인공 롤라가 풍선을 들고 당당히 방을 나간다. ‘루시퍼’와 ‘빈디치’에서는 터지거나 날아가 버린다. 자유와 해방, 평화 따위는 점점 멀어지는 꿈이란 걸까.

빨간 풍선이 없는 원작은 상상하기 힘든데요.
“원작의 절반을 버렸어요. 원작자가 천재라지만 아직 20대라 대본의 밀도가 떨어지더군요. 열 살이나 더 먹은 우리가 좀더 잘해보자며 작품을 관통하는 거대한 테마를 만들자 했죠. 그 주제를 우리 관객에게 잘 어필할 수 있게 고민한 결과가 빨간 풍선이에요.”

20년대의 롤라만이 당당히 풍선을 쥐고 탈출에 성공하는데요.
“갈수록 자본의 힘은 강화되고 풍선 들고 나가기 어려워지는 세상이 되니까요. 마지막에 빈디치가 죽어가며 풍선을 날리지만 두스는 혀가 잘려서도 일어나 풍선을 없애버리는 제스처로 끝나죠. 두스가 시대를 계속 끌고 갈 거라는 암시예요. 세상은 쉽게 변하지 않아, 하지만 우리는 바꾸려고 엄청 애쓰고 있어, 그런 얘기죠.”

“예술성 놓지 않는 오락으로 승부”
2012년 연극 ‘옥탑방고양이’로 데뷔한 박은석은 ‘연극계 아이돌’로 불릴 만큼 강력한 팬덤의 소유자다. 소위 ‘21세기형 미남’이라는 샤방샤방 비주얼로 뜬 벼락스타 같지만 ‘히스토리 보이즈’‘레드’등 굵직한 작품에서 보여준 진중한 연기에 묻어나는 내공이 상당하다. 미국에서 살다 20대 초반에 돌아와 가수 권유도 많이 받았지만, 쉽게 뜰 수 있는 제안을 모두 거절하고 배우가 되기 위해 한우물만 팠다. ‘빠른 길을 찾다보면 오히려 되돌아가는 상황이 올거라 생각해’ 정석을 밟았단다. 최근 드라마와 영화, 라디오 고정 게스트 출연 등 전성기를 맞고 있지만 “1년에 한 작품 이상은 연극을 할 것”이라고 약속한다. “회사계약 조건 자체가 1년에 하나는 연극을 하는 거에요. 연극을 디딤돌 삼고 넘어가는게 아니라 여기 몸담고 있는 사람이라 생각하거든요. 아무리 바빠도 꼭 할테니 지켜봐 주세요.”

박은석의 데뷔작 ‘옥탑방고양이’는 사실 김태형의 출세작이다. ‘4년 연속 연극 예매율 1위’를 고수 중인 대학로 최고 인기연극을 만든 주인공인 셈이다. 카이스트를 다니다 연극판에 뛰어든 특이한 이력만큼 그의 무대엔 특별한 것이 있다. 고등학생들의 입시경쟁을 권력사회 부조리의 축소판으로 그린 ‘모범생들’, 어지러운 퍼즐조각이 기막히게 맞춰지는 완결된 구조가 돋보였던 창작 뮤지컬 ‘아가사’,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매력을 한국적인 소재에 완벽히 적용시킨 ‘로기수’ 등 보기드물게 꽉 짜인 무대를 만나면 ‘대체 연출이 누구야?’라는 말이 절로 나온다.

공학 전공자로서 보장된 미래를 ‘내가 하고 싶은 얘기를 잘 표현할 수 있는’ 연극의 매력에 빠져 포기했지만, ‘수학문제 풀듯이 개연성을 찾는 습관이 연극을 잘 만드는 비결’이라는 김태형은 디지털 미디어 시대 연극의 생존법은 관객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라는 독특한 해법을 제시한다.

“연극은 죽었다고들 하죠. 사실이에요. 연극이 더이상 사회적 힘을 가진 매체가 되기는 힘들거에요. 살아남으려면 적어도 희소성과 소장가치가 있는 명품이 되야 해요. 경쟁상대가 ‘무한도전’이라 했지만, 안락하게 접하는 매체들보다 가까이서 머리를 맞은듯한 경험을 한 사람은 평생 연극을 보는 사람이 될 수 있어요. 옛날처럼 많은 사람이 보지 못하더라도, 보러 온 사람들이 새로운 경험을 계속 찾게 하는 게 연출가의 역할 아닐까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아이엠컬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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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