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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덕일의 事思史] 근대를 말하다

이회영 일가가 전 가산을 정리해 마련한 자금은 40여만원으로 현재 돈으로 환산하면 대략 600억원의 거금이다.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신민회의 자금 모금 계획에 차질이 생기면서 이회영 형제의 재산이 주요한 ‘광복 자금’이 됐다. 이상룡 일가도 이회영 일가처럼 집단으로 망명했다. 이상룡은 한사군을 만주 요동에 있었다고 지적하며 우리 영토로 보았다(『서사록(西徙錄)』). 그는 일제의 중국 본토 침략을 정확히 예견했다.

횡도촌에 모인 망명객들이 국외 독립운동의 또 다른 기지로서 주목한 곳은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였다. 삼원보에서 서쪽으로 3~4㎞ 떨어진 곳이 추가가(鄒家街)였다. 추가가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먼저 정착하려면 토지를 구입해야 했는데 현지인들의 반발이 심했다. 그러자 이회영은 북경으로 가서 총리대신 원세개(袁世凱)를 만났다. 원세개는 비서 호명신(胡明臣)을 대동시켜 동삼성 총독을 방문하게 했다. 이로 인해 현지인들과의 갈등 문제가 해결됐다.

일제에 나라를 빼앗긴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군사력의 열세였다. 나라를 되찾는 데도 군사력이 가장 중요했다. 고종은 재위 33년(1896) 1월 11일 칙령 제2호로 ‘무관학교관제(武官學校官制)’를 반포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아관파천을 단행하면서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2년 후인 고종 35년(1898) 4월 군부대신 이종건(李鍾建)이 무관학교 재건을 주청하자 칙령 11호로 ‘무관학교관제’가 다시 반포됐다. 대한제국 무관학교는 모두 500여 명의 장교를 배출했는데, 이들의 행적은 군대 해산과 망국 등의 국난을 겪으면서 친일파와 항일 무장투쟁가로 극명하게 갈렸다.

1911년 5월 14일(양력 6월 10일)은 신흥무관학교 개교일이다. 이 학교 생도대장이었던 원병상(元秉常)은 “1911년 봄(음력 5월께)에 이역황야의 신산한 곁방살이에서나마 구국사업으로 일면 생취(生聚:백성을 기르고 재물을 모음), 일면 교육이라는 두 가지 과제를 내걸고 출발했다”라고 회고하고 있다. 처음 신흥무관학교가 추가가의 옥수수 창고를 빌려 개교한 것은 중국인들이 토지·가옥 매매를 거부한 데 따른 임시방편이었다. 이회영·이상룡 등의 당초 계획은 정식으로 토지를 매입해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것이었다. 원세개의 비서 호명신(胡明新)이 이회영에게 합니하(哈泥河) 강 근처 토지를 권유했다. 현재 광화(光華)라는 이름으로 바뀐 합니하는 추가가보다 훨씬 험한 요지였다.

님 웨일스(Nym Wales)의 『아리랑(Song of Arirang)』에는 신흥무관학교에 대한 김산(본명 장지락)의 회고가 나온다. “대한독립군 군관학교. 이 학교는 신흥학교라 불렀다 … 학교는 산속에 있었으며 열여덟 개의 교실로 나뉘어 있었는데 비밀을 지키기 위해 산허리를 따라서 줄지어 있었다. 우리들은 군대 전술을 공부했고 총기를 가지고 훈련을 받았다. 그렇지만 가장 엄격하게 요구됐던 것은 산을 재빨리 올라갈 수 있는 능력이었다. … ‘그날’을 위해. 방과 후에 나는 국사를 열심히 파고들었다.” 신흥무관학교의 특징 중 하나는 철저한 국사 교육에 있었다. 이상룡이 지은 『대동역사(大東歷史)』가 국사 교재였는데, 만주를 단군의 옛 강역으로 기술한 사서(史書)였다.

1911년의 큰 흉작으로 경학사는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어 해체되고, 1912년 가을에 새로운 한인 자치 조직인 부민단(扶民團)이 신흥무관학교와 같이 합니하에 조직됐다. 이상룡은 부민단 설립에 대해 설명하면서 “정부의 규모는 자치가 명분이고, 삼권분립은 문명국을 따른 것이네(政府規模自治名, 三權分立倣文明)”라고 삼권분립에 의한 민주공화국 수립이 독립운동의 목표임을 분명히 밝혔다. ‘합니하 군교(哈泥河軍校)’로도 불렸던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8월 폐교될 때까지 약 3500여 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이 항일 무장투쟁의 중심 인물이 됐다. 1920년 10월 박영희·강화린·오상세·백종렬·김훈 등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은 김좌진 장군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의 중견 간부로서 청산리대첩을 치른다.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과 함께 일본 정규군 1200여 명을 사살한 청산리대첩은 신흥무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장교들이 독립군을 지휘했기에 가능했던 전투였다. 1919년 11월 10일 만주 길림시 파호문(巴虎門) 밖 중국인 반(潘)모의 집에서 결성돼 일제를 경악에 빠뜨리는 의열단도 신흥무관학교 동문 모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요약=김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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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