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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는 어떻게 진화했나] 케인스의 ‘자판기’ 경제학, 세계경제 황금기 이끌다

그림 1 기계를 시연하고 있는 필립스, 1958-1967년. 물·커피·설탕의 양을 지정하듯 정부가 경제 변수를 적절히 조정하면 성과를 거둘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
그림 1은 상업적 목적의 기계장치를 설명하는 모습이 아니다. 이 사진은 영국의 런던정경대(LSE)에서 경제학 강연이 진행되는 광경이다. 사진 속의 인물은 빌 필립스(A. W. “Bill” Phillips)라는 경제학자다. 실업률과 명목임금 변화율의 단기적 역관계를 보여주는 이른바 ‘필립스 곡선’으로 경제학 교재에 등장하는 학자다. 그가 시연하는 기계장치는 ‘필립스 기계(Phillips Machine)’라고 불리는 것으로, 20세기 최고의 경제학자로 손꼽히는 존 메이너드 케인스(John Maynard Keynes)의 경제이론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선 케인스와 필립스가 활약했던 시대에 대해 살펴보자. 20세기 전반에 인류는 두 차례에 걸친 세계대전과 전례 없는 대공황으로 인해 거칠고 힘든 시절을 경험했다. 전쟁·학살·빈곤·실업·억압·불안·공포 등 어둡고 부정적인 개념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이 되자 사람들은 자유롭고 편안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지기를 갈망했다.

그림 2 노먼 록웰, ‘결핍으로부터의 자유’, 『새터데이이브닝포스트』, 1943년 3월 6일.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친지가 모여 식사를 하기 전의 화목한 모습을 그렸다.
1950~73년 세계경제 유례없는 성장
이런 분위기를 잘 표현한 화가로 미국의 노먼 록웰(Norman Rockwell)을 꼽을 수 있다. 그는 시사 잡지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Saturday Evening Post)』에 수많은 표지그림을 실었는데, 특히 1943년에 발표한 ‘네 자유(Four Freedoms)’ 시리즈가 눈길을 끈다, 록웰은 전후 사회가 가장 시급히 이뤄야 할 덕목으로 신앙의 자유, 표현의 자유, 공포로부터의 자유,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꼽았다.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의 1941년 연두교서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한다. 그림 2는 그중 ‘결핍으로부터의 자유’를 표현한 작품이다. 크리스마스에 가족과 친지가 모여 식사를 시작하려 한다. 인자한 표정의 주인 내외가 방금 조리된 큼직한 칠면조 구이를 내놓는다. 식탁에 다른 음식과 음료는 변변치 않다. 그러나 이 정도만으로도 사람들은 충분히 행복해 보인다. 당시 부유한 국가로 손꼽히던 미국에서조차 궁핍한 생활에서 벗어나기를 사람들이 얼마나 간절히 원했느냐를 느끼게 해준다.

전쟁 직후의 이런 상황과 대조적으로, 이 시점부터 1970년대 초반에 이르는 기간에 세계경제는 역사적으로 유례가 없는 성장을 기록했다. 1950~1973년에 1인당 실질소득이 매년 미국에서 2.45%, 서유럽에서 4.08%, 동아시아에서 3.83% 올랐고, 일본은 무려 8.05%를 기록했다. 어느 지역이건 이 성장률은 19세기 이래 현재까지 다시 도달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빠른 경제성장은 일자리의 증가를 낳았다. 서구 국가들을 중심으로 여성의 사회진출이 본격화됐다. 가전제품과 피임제의 등장이 이를 가능케 했다. 그래도 부족한 노동력은 해외로부터의 유입으로 보충했다. 언어와 문화에 대한 이해가 있어야 유리했으므로, 주로 과거에 식민지였던 지역으로부터 인력을 받아들였다. 이런 면에서 한국 광부와 간호 인력이 서독으로 향한 것은 세계적으로 예외적인 사례였다.

세계경제의 황금기는 케인스 경제학의 전성기였다. 과거 경제학자들이 시장의 자율조정 기능에 큰 신뢰를 보냈던 것과 달리 케인스는 정부가 경제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설파했다. 각국은 전쟁을 치르면서 통제경제 체제를 실시했고, 미국은 대공황 시기에 불황을 극복하기 위해 뉴딜정책을 편 경험이 있었다, 이런 경험은 평화 시에도 정부가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하는 체제를 채택하기 쉽도록 만들었다. 케인스는 각국 정부가 적절하게 총수요관리정책을 펴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 사이에서 정부가 유효한 선택만 한다면 경제 번영을 보장할 수 있다는 그의 경제이론에 대해 전 세계의 학자들과 정치가들은 적극적 수용으로 답했다. 대다수의 국가가 케인스 경제학을 받아들이고 수많은 사람이 정부의 경제관리 능력에 대해 신뢰를 보이자, 경제주체들은 미래를 장밋빛으로 보면서 낙관적으로 소비와 투자 판단을 했다. 이런 대중의 신뢰는 다시 경제 번영에 중요한 밑거름이 되었다.

케인스 경제학이 출발부터 탄탄한 체계를 갖춘 이론으로 받아들여진 것은 아니었다. 케인스가 1936년 『고용, 이자 및 화폐에 관한 일반이론』에서 제시했던 주장이 정교한 이론으로 자리를 잡게 되기까지는 뛰어난 후학들의 기여가 컸다. 필립스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필립스는 뉴질랜드에서 태어나 기계와 전기장치를 다루는데 수완을 보이며 자란 청년이었다. 그는 영국으로 유학을 떠나 전기공학을 공부하다가 2차 세계대전을 맞았고, 종전 후 사회학을 전공했다. 그는 전공에서는 뛰어난 실력을 보이지 않았지만 당시 경제학계의 주목을 받고 있던 케인스 경제학에 깊은 흥미를 느꼈다. 이를 경제학 지식을 자신의 기계제작능력과 결합시키기로 마음먹었다. 그가 주위의 도움을 받아 완성한 기계가 바로 필립스 기계다.

케인스 이론을 빛나게 한 후학들
그는 각 경제부문을 의미하는 수조들을 설치하고 이들을 파이프로 연결하여 국민경제의 순환모형을 비주얼하게 표현했다. 예를 들어 물을 펌프로 끌어올리고 기계를 작동시키면, 소득에 해당하는 물이 저축, 조세 등을 의미하는 여러 개의 밸브를 통해 여러 경제부문으로 흘러간다. 이렇게 흘러들어온 물은 다시 다른 경제부문으로 이동하게 된다. 결국 물의 이동이 모두 끝나면 각 경제부문에 어떤 변화가 발생했는가를 최종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오늘날의 경제학 전문용어를 쓰자면 ‘개방경제 하의 IS-LM 모형’이었다. 필립스 기계는 정교한 자판기에 비유할 만했다. 고객이 물, 커피, 우유와 설탕의 양을 지정하고 스위치를 누르면 적절하게 배합된 커피음료가 만들어져 나오듯이, 정부가 경제변수들을 적절하게 조정함으로써 원하는 성과를 거둘 수 있다고 보여주었으니 말이다.

그림 3 『타임』, 1965년 12월 31일.
필립스가 대학 졸업반 때인 1949년에 시연한 이 기계는 경제학도들은 물론 교수들에게도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그가 케인스 경제학의 핵심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음이 확인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기계장치가 정부의 경제정책의 효과를 상당히 정밀하게 예측한다는 점도 놀라웠다. 곧 필립스 기계는 뜨거운 화제가 되었고 필립스는 경제학자로서의 길을 본격적으로 걷게 되었다. 이후 대학은 동일한 기계장치를 14개 더 제작해 교육 목적으로 영국의 다른 대학들은 물론 해외로도 보냈다. 필립스 기계의 명성도 더욱 높아졌다. 1946년 미국에서 제작되어 큰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대형컴퓨터 에니악(ENIAC)의 이름을 따서 ‘머니악(MONIAC)’이라는 별명도 얻었다. 화폐경제를 관리하는 데 유용한 아날로그 컴퓨터처럼 인식되었다는 뜻이다.

그림 3은 1965년 시사 잡지 『타임(Time)』의 표지를 장식한 케인스를 보여준다. 이때까지 케인스 경제학은 화려한 전성기를 누리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그의 표정에서 차분하면서도 자신만만함이 느껴진다. 그러나 그의 시대가 영원히 계속될 수는 없었다. 케인스 경제학이 결정적으로 쇠퇴를 맞게 된 것은 1970년대 초반의 일이었다. 경기침체와 인플레이션이 동시에 진행되는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 현상이 발생하자 케인스 경제학으로는 효과적으로 대처할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영원할 것 같았던 케인스 경제학은 이로써 정부 개입을 최소화하고 시장의 기능을 강조하는 시카고 학파의 새 이론에 자리를 내주게 되었다. 오늘날 세계경제질서의 근간이 된 신자유주의의 시대가 이렇게 시작되었다.



송병건 서울대 경제학과에서 학·석사 학위를 마친 뒤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경제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성균관대 경제학과 교수. 『세계경제사 들어서기』, 『경제사: 세계화와 세계경제의 역사』, 『영국 근대화의 재구성』, 『산업재해의 탄생』 등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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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