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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 위해 피 뿌리자” … 항일 투쟁 서곡 울린 의용군

중국 정규군 복장을 한 마잔산(馬占山). 연도 미상. [사진 김명호]
구체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역사는 만신창이가 된 보물과 화려한 쓰레기들의 혼합물이다. 1931년 9월 중순, 일본이 동북을 침략했다. 중국인들에겐 항일의 시작이었다. 도처에서 봉화가 올랐다.

깃발은 난무했지만 자위적 성격이 강했다. 조직이 원시적이고 구성원들의 출신 성분도 복잡했다. 농민이 50%, 동북군 출신 25%, 토비 출신 20%, 나머지는 노동자와 학생이라는 설이 지배적이다. 명칭도 구국군(救國軍), 의용군(義勇軍), 자위군(自衛軍), 홍창회(紅槍會), 대도회(大刀會) 등 다양했다. 통틀어 동북의용군(東北義勇軍)이라고 불렀다.

1년이 지나자 동북의용군이 체제를 갖추기 시작했다. 전문 연구자의 고증을 소개한다. “1932년 여름 무렵 동북항일의용군은 55만 내외에 달했다. 랴오닝(遼寧)성이 27만으로 가장 많았다. 지린(吉林)성 15만, 헤이룽장(黑龍江)성은 13만 정도였다. 1945년 8월, 항일전쟁에 승리하기까지 약 100만 명이 동북의용군에 가담했다. 의용군의 발기는 순전히 울분 때문이었다. 먹고살기 위해 참여했던 사람들도 시간이 갈수록 의분 덩어리로 변해갔다. 총탄이 비 오듯 하고 화약 냄새가 진동하는 속에서 어떤 희생이 따라도 애석해하지 않았다.”

현재 중국 국가인 ‘의용군 행진곡(義勇軍行進曲)’의 주인공들을 얘기하면서 장쉐량(張學良·장학량)을 빼놓을 수 없다. 동북의 지배자 장쉐량은 일본과의 전쟁을 포기했다. 막강함을 자랑하던 동북군을 산하이관(山海關) 내로 이동시켰다. 불복하는 지휘관들이 속출했다. 이들은 조직력이 있었다. 병력 2만 명을 결집해 130여 차례 혈전을 벌였다. 일본 관동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934년 11월 지린에서 희차(熙洽)의 회유로 투항 의식을 마친 후 일본 헌병 및 특무기관들과 사진을 남긴 지린(吉林)성의 마적두목들.
베이핑(北平)에 자리잡은 장쉐량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부저항 장군(不抵抗將軍)’이라는 질책은 그렇다 치더라도, 일본은 아버지를 죽인 원수였다. 난징(南京)에 있는 최고 통치자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눈치를 봐가며 의용군을 격려했다. 의용군 지휘관이 베이핑에 오면 무조건 만났다. 실탄과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동북의용군은 각 성마다 특징이 있었다. 랴오닝성은 의용군이 제일 먼저 일어났고, 조선 출신이 많던 지린성은 전투력이 뛰어났다. 헤이룽장성은 다른 두 성에 비해 영향력이 앞섰다.

초기 랴오닝성 의용군 중에는 황셴성(黃顯聲·황현성)의 활약이 돋보였다. 랴오닝성 경무처장과 선양(瀋陽)시 공안국장을 겸하던 황셴성은 국민당 정부의 부저항 명령에 코웃음을 쳤다. 평소 여자와 돈 문제에 관대하다 보니 따르는 부하들도 많았다. 공안부대와 경찰을 인솔해 선양에 입성한 일본군과 혈전을 불사했다. 선양이 함락되자 진저우(錦州)로 철수해 장쉐량의 명령을 기다렸다. 황셴성은 틈만 나면 부하들에게 일렀다. “일본에 투항하는 놈은 신분 여하를 막론하고 소멸시켜야 한다.”

장쉐량의 사촌동생 장쉐청(張學成·장학성)이 일본에 투항했다. 황셴성은 베이핑에 있는 장쉐량을 찾아갔다. 장쉐량도 부하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그런 일이라면 내게 올 필요도 없다. 쓰레기는 빨리 치워야 악취가 덜하다. 개미굴까지 뒤져서 없애 버려라.” 몇 달 후, 몬테네그로의 시궁창에서 장쉐청의 시신이 발견됐다.

지린성 의용군은 동북군과 마적 출신들이 주축을 이뤘다. 일본군이 동북을 침략하기 직전 지린성 주석은 고향에서 부친상을 치르고 있었다. 주석직을 대행하던 시차(熙洽·희흡)는 청 황실의 후예였다. 일본에 호의적이었던 시차는 성 정부가 있던 창춘(長春)을 일본군에게 송두리째 내줬다. 시차의 유혹을 거절한 동북군 장교와 마적들은 ‘지린자위군(吉林自衛軍)’ ‘국민구국군(國民救國軍)’ 등을 조직했다. 시작은 랴오닝성보다 늦었지만 전투력은 볼 만했다. 일본군과 천 여 차례 교전하며 13개 현(縣)을 장악할 정도였다.

중국인을 열광케 하고, 동북의용군의 존재를 세계에 알린 사건은 헤이룽장성 의용군이 해냈다. 1931년 11월, 랴오닝성과 지린성을 점령한 일본군은 헤이룽장성을 압박했다. 성 주석 마잔산(馬占山·마점산)은 항전을 결심했다. “3000만 동북인을 대신해 뜨거운 피를 허공에 뿌리겠다. 자유의 꽃을 피울 수 있다면, 생존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진저우에 있던 황셴성도 동조했다.

11월 4일 새벽, 일본군 1300여명이 전투기의 엄호를 받으며 헤이룽장성 타이라이(泰來)현 장차오(江橋)에 도착했다. 일본군은 철교 수리를 이유로 경비병들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오후가 되자 마잔산은 공격 명령을 내렸다. 정부의 명령을 거부한 중국군의 첫 번째 군사행동은 치열했다. 3일간 벌어진 전투에서 일본군 185명을 사살하고, 육박전에서 700여명을 죽였다.

승전보를 접한 장쉐량은 마잔산 등 옛 부하들에게 밀지를 보냈다. “앞으로 동북군 정규부대 명칭은 사용하지 마라. 자위군으로 자처하며 일본군에게 대항해라. 항일세력과 합작도 게을리하지 마라.”

전국의 언론매체가 마잔산의 항전에 갈채를 보냈다. 대도시마다 위문단을 조직했다. 학교도 들썩거렸다. 학업을 걷어치운 학생들이 동북으로 몰려갔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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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연구원 전력발전연구부ㆍ군비통제센터를 거쳐 1994년 중앙일보에 입사한 국내 첫 군사전문기자다. 국방부를 출입한 뒤 최장수 국방부 대변인(2010~2016년)으로 활동했다. 현재는 군사안보전문기자 겸 논설위원으로 한반도 군사와 안보문제를 깊게 파헤치는 글을 쓰고 있다.

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