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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소설 읽기] 현실만 없다면 난 완벽할 텐데

‘고통을 면제받을 권리’ 같은 것이 주어진다면 얼마나 좋을까.

나는 갖가지 힘든 상황으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을 볼 때, ‘고통과 싸워 이길 용기’보다 차라리 ‘고통을 면제받는 환경’을 제공받는 것이 낫지 않을까 하는 상상에 잠긴다. 말하자면 ‘아픔을 극복하는 법’을 천 번 강의하는 것보다 제대로 된 복지정책 하나를 성공시키는 것이 낫다는 말이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사회를 바꾸는 법’은 너무 멀고 때로는 불가능하기까지 하다. 반면 우리 마음을 바꾸는 것은 그래도 ‘가능한 일’이고 ‘희망적인 일’일 때가 많다. 눈앞에 펼쳐진 거대한 바다를 도저히 건널 수 없다고 투덜거리며 바닷물이 사라지기를 기도하는 것보다 내가 직접 수영을 배우거나 배를 타는 것이 나은 것처럼.

그런데 신경증 환자의 전형적인 사고방식은 이와 정반대다. ‘현실만 없으면, 난 정말 아무 문제가 없을 텐데!’ ‘현실이 날 방해하지만 않는다면, 난 완벽할 텐데!’ 이런 믿음이 바로 신경증의 핵심적인 딜레마다.

◐G◑엘리트 청년의 신경증◐M◑
『죄와 벌』의 로쟈(라스콜리니코프)가 바로 그런 주인공이다. 그는 홀어머니와 누이밖에 없는 가난한 집을 떠나 혼자 자취하며 공부하고 있다. 용이 되지 못한 ‘개천의 이무기’가 낯선 도시에서 홀로 고학(苦學)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과외 아르바이트도 끊겨 하숙비를 내지 못해 여주인과 마주치는 것조차 두려워하던 로쟈는 추위와 굶주림에 우울증과 신경증까지 겹쳐 점점 극단적인 생각에 빠져들게 된다. 이런 상황이 되면 인간은 ‘희생양’을 찾게 된다. 내 분노와 내 좌절과 내 증오를 표출할 단 하나의 대상을.

원하는 만큼 돈을 꾸어주지 않는 전당포 노파 이바노브나는 로쟈에게 바로 그런 인간이었다. 돈만 밝히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구두쇠에 피도 눈물도 없는 전당포 노파를 죽여서 그녀의 돈을 얻으면, 나는 이 세상을 위해 훨씬 좋은 일을 할 수 있지 않을까. 저렇게 이 세상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은 차라리 없어지는 것이 현실을 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꾸는 데 도움을 주지 않을까. 평범한 사람들이라면 그저 “귀신은 뭘 하나…저런 사람 안 잡아가고”라고 푸념이나 할 상황에서, 신경증에 빠진 엘리트 청년 로쟈는 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나’를 바꿀 수 없으니 ‘현실’을 조작하려 드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다. 사람을 죽이기는커녕 살짝 때린 적도 없는 이 연약한 청년이 노파를 죽이러 갔을 때, 그는 공교롭게도 노파의 여동생 리자베타까지 연이어 살해해 버리고, 자기 안에서 튀어나온 무서운 악의와 폭력에 놀라 더 큰 정신적 공황상태에 빠진다. 로쟈는 전당포 노파만 증오했지 리자베타를 미워한 것이 아니었다. 죄책감이 점점 더 깊어진 로쟈는 노파의 돈을 훔치고도 그 돈을 제대로 쓰지 못한 채 끙끙 앓게 된다. 그런 로쟈의 삶을 완전히 변화시킨 것은 바로 그가 ‘도와주고 싶었던 불쌍한 이웃’ 소냐였다.

소냐는 몸을 팔아 식구들을 먹여 살리면서 알코올중독 아버지의 술값까지 대야 하는 최악의 상황에 있다. 술에 취해 거리에 쓰러진 아버지를 구해주고 이후 장례비까지 부담해 준 로쟈를 소냐는 살아 있는 구세주처럼 여기게 된다. 로쟈는 살인으로 인해 완전히 파괴되어 버린 자신의 영혼이 소냐네 가족을 돌봄으로써 조금씩 치유되는 것을 느낀다. 하지만 A에게 저지른 죄를 B를 도와줌으로써 면제받을 수는 없는 법. 로쟈는 점점 깊어만 가는 죄책감에 괴로워하다가 마침내 소냐에게 자신의 죄를 낱낱이 털어놓게 된다.

◐G◑나를 이해해줄 그 사람이 있는가◐M◑
고통을 면제받을 권한을 꿈꾸는 것은 인간의 본성인가 보다. 좀 더 편안한 방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면 결코 이전의 더 불편한 길로 가지 않으려 한다. 산에 오르는 과정은 싫지만 정상에 올랐다는 쾌감은 느끼고 싶다는 심리다. 심리학자 카렌 호나이는 『내가 나를 치유한다』에서 신경증 환자의 전형적인 심리 상태를 이렇게 표현한다. “인생은 끔찍해. 현실로 가득 차 있으니까.” 그녀가 만난 신경증 환자는 이런 식으로 말을 하며 세상을 저주하고 자기를 합리화했다고 한다. “세상은 내 마음대로 되어야 하고, 나는 속을 태우지도 신경을 쓰지도 않아야 해요.”

현실이 나를 가로막는 유일한 장벽처럼 느낄 때, 사실은 내가 바뀌어야 하는데 나를 바꾸는 것이 너무 어렵거나 짜증나거나 억울한 마음이 들 때, 사람들은 ‘나를 위해 세상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신경증 환자는 규칙이나 규율, 구속이나 통제 같은 것에는 몸서리를 치며, 자신은 반드시 ‘특별한 예외’가 되어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이런 식의 자기 방어는 결코 그의 상황을 나아지게 하지 못한다. 타인 속에서, 타인과 함께, 타인과 어우러져 사는 법을 배우지 못하면 신경증은 결코 치유될 수 없다.

도스토옙스키가 ‘니체의 스승’으로 불리고 전 세계 작가와 독자들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주는 이유는, 바로 심리학이 거의 발달하지 않았던 시대에 소설 속에서 이미 심리학의 기본 문제들을 날카롭게 진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인간이 자아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함으로써 끊임없이 왜곡되고 변형되고 오해되는 마음의 실체에 당시 어떤 심리학자나 과학자들보다도 더 깊숙이 들어간 작가다.

그는 정상인의 마음에 깃든 비정상성을 해부해 낼 줄 알았다. 남보다 월등히 뛰어나 보이는 사람의 마음에 숨은, 세상에 대한 깊은 증오와 분노를 읽어냈던 것이다. 노파를 죽임으로써, 즉 현실을 억지로 조작함으로써 자신의 상황을 타개하려 했던 로쟈는 돌이킬 수 없는 죄를 저지르지만 그 죄악마저 완전히 이해해 준 한 사람의 타인인 소냐를 향한 사랑으로 인해 스스로를 구원할 출구를 찾게 된다. 로쟈는 모든 죄를 자백한 후 감옥에 갇히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하다고 느낀다. 소냐가 감옥 문이 닳도록 매일 찾아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걱정해 주기 때문이었다.

우리에게는 바로 이런 사랑, 이런 우정, 이런 타인이 필요하다. 또한 상황에 따라 우리 자신이 그런 ‘소냐’가 되어야 한다. 로쟈는 공부도 잘하고 글도 잘 쓰며 말까지 청산유수인 뛰어난 청년이었지만, 무엇이 옳고 그른지, 인생에서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서는 거리에서 몸을 파는 여인보다도 더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심리학 이론이나 최첨단의 신약도 해내지 못하는 ‘마음의 치유’는 어떻게 가능한가. 바로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는 단 한 사람의 타인만이 해낼 수 있는 것이다.

정여울 문학 평론가 suburbs@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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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