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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미식의 바다, 부산은 맛있다

무엇부터 먹어야 하나. 잠시 들르는 부산이라면 갈등이 크다. 위로부터 돼지국밥, 밀면, 어묵. [중앙포토]
부산역에서 어묵을 사고 싶다면 열차 출발 1시간 전에는 가야 한다. 역사 2층 삼진어묵 앞에 늘어선 줄은 좀처럼 줄지 않는다. 열차에서 내리고 타려는 이들이 뒤엉켜 매장 안은 종일 북새통이다. 계산대가 두 곳이지만 20~30분은 보통 기다린다. 어깨가 부딪치고 손에 기름이 묻어 짜증을 내면서도 손님들은 줄을 선다.

 부산은 어느새 미식의 메카가 됐다. 회·복국·곰장어를 비롯한 온갖 해물은 물론이고, 돼지국밥·해장국·우동·국수·밀면·냉면·통닭·양곱창에 이르기까지 육·해·공이 다 모여 있다. 어묵은 그중 하나일 뿐이다. 일부러 시간을 내 먹으러 가는 이도 많다. 부산의 맛은 넓고 깊다. 머리를 쥐어뜯으며 동선을 짜더라도 하루이틀로는 즐길 수 없다. ‘짬뽕문화’가 부산 음식의 독특한 매력을 만들었다. ‘비빔문화’라고 할 수도 있겠다. 대륙과 해양이 만나고, 그 길에서 사람과 물산이 교차하며 부산은 근현대를 치열하게 관통해 왔다. 세 가지 시대 배경을 바탕에 깔면 부산 음식의 줄거리가 보인다.

 첫째는 코앞의 일본이다. 부산에서 쓰시마 히타카쓰항까지는 50㎞가 안 된다. 쾌속선으로 1시간10분이면 닿는다. 신의주가 대륙문화를 받아들이는 북문이라면 부산은 해양문화를 받아들이는 남문이었다. 조선 세종 때 설치한 왜관이 그 첫발이다. 임진왜란의 시발점, 일제의 대륙 침공 전진기지 또한 부산이었다. 1980년대에는 부관페리를 타고 일본인들이 몰려왔다. 6·25 뒤 미군부대 인근에서 퍼져나간 부대찌개처럼 세월을 거치며 일본 음식문화는 부산으로 알게 모르게 녹아들었다.

 둘째는 지난 세기를 흔든 두 번의 전쟁이다. 1945년 광복 뒤 부산 인구는 크게 늘어난다. 해외 동포 10만 명가량이 돌아왔다. 뒤이어 6·25가 터졌다. 전쟁통에 남쪽 부산 음식은 북쪽, 특히 함경도 음식과 섞인다. 50년 12월 흥남철수 때 군인 틈에 섞여 민간인 10만 명이 내려온 게 계기다.


 남해 출신 음식 칼럼니스트 박정배는 말한다. “생사의 경계에 섰지만 피란민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지요. 남자들은 막일을 하고 여자들은 음식을 파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밀면은 이 과정에서 탄생했다는 게 정설이죠. 미국의 원조 밀가루와 전분을 쓰는 함경도 국수가 만난 겁니다. 우암동이나 당감동처럼 당시 북한 사람들이 모여 살던 동네에 냉면·밀면 가게가 많이 있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서울에도 피란민들이 많던 오장동에 함흥냉면집이 몰려 있잖아요.”

 셋째는 경제개발이다. 전쟁 전 부산의 인구는 47만 명이었다. 55년에는 100만 명이 넘고 72년에는 200만 명을 넘는다. 부산의 행정구역이 묘한데, 동구는 중구의 북쪽에 있고 남구는 동쪽에 있다. 북구는 동구와 부산진구보다 북쪽에 있다. 전쟁과 경제 도약기에 도시가 급팽창하면서 행정구역이 새로 생기다 보니 실제 방위와 어긋나는 지명이 붙었다.

 부산 토박이 음식 칼럼니스트 박상현은 말한다. “피란민들이 돌아가면서 전쟁 특수를 누렸던 부산의 경기는 주춤해졌죠. 그런데 바로 박정희 정권이 경제개발을 밀어붙여요. 경부라인이 그 중심인데, 수출 기업들이 몰리면서 내수형 항구도시 부산은 국제항구가 돼요. 이 과정에서 농촌을 떠난 인력이 대거 흘러들죠. 노동자들의 허기진 배를 채우기에 싸고 푸짐한 돼지국밥만 한 음식이 없었지요. 밀면과 돼지국밥 가게는 70년대에 크게 늘어납니다.”

 현실은 모질고 피폐했지만 생의 의지는 보다 강렬했다. 시대가 깔아놓은 고난의 멍석 위에서 사람들은 생선을 다루고 고기를 끓이고 면을 삶았다. 질곡의 역사가 녹아 있어 부산의 음식은 하나같이 서민적이다.

 돼지국밥집 중에서 한 군데를 간다면 어디냐고 물었다. 박정배, 박상현, 셰프 박찬일 모두 범일동 할매국밥을 말했다. 공교로운 일이다. 그래도 부산은 해물이다. 동네 친구들과 가는 횟집이 어디냐고 토박이 성형외과 전문의 김경원에게 물었다. 미포 경북횟집을 꼽았다. 선장인 주인이 직접 잡은 선어를 썰어낸다. 배용준도 왔던 집이란다.

 부산 전경을 스케치하려고 봉래산에 올랐지만 ‘영도할매’ 심술인지 비구름이 자욱했다. 송도해수욕장이 내려다보이는 천마산에 서니 비로소 안개가 걷혔다. 그림 바로 앞이 남항이다. 자갈치시장은 그 옆에 붙어 있다. 오른쪽의 영도와 뭍을 부산대교와 영도대교가 잇는다. 저 멀리 길이 3331m, 주탑 높이 190m인 부산항대교가 웅장하다.

 “꽃피~는 동백섬에~ 봄이 왔건만~.” 오랜만에 듣는 노래로군요. 가오리 탄 젊은이들이 즉석 노래방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이봐요, 그 곡의 본래 주인이 누구인지 알아요. 조용필? 아니거든요.

부산=글·그림 안충기 기자 newnew9@joongang.co.kr

[S BOX] ‘돌아와요 부산항에’ 원곡은 …

1971년 크리스마스 날 서울 충무로 대연각호텔에서 큰불이 났다. 지은 지 1년6개월 된 22층 빌딩이었다. 주한미군 소방차까지 출동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163명이 죽고 63명이 다쳤다. 희생자 중에 김해일(본명 김성술)이 있었다. 한 해 전에 ‘돌아와요 충무항에’를 취입한 가수였다. 황선우가 쓴 곡에 자신이 가사를 붙인 노래였다. 그때 가사는 이렇다.

 “꽃 피는 미륵산에 봄이 왔건만, 님 떠난 충무항에 갈매기만 슬피우네….” 정작 이 노래는 주목을 받지 못했다. 황선우는 제목을 ‘돌아와요 부산항에’로 바꾸고 가사도 살짝 고쳐 72년에 조용필에게 줬다. 재편곡을 하고 창법을 달리해 조용필은 이 노래를 다섯 번 다시 불렀다. 76년 버전에서 노랫말이 ‘님 떠난→형제 떠난’ ‘보고픈 내 님아→그리운 내 형제여’로 바뀐다. 미8군과 밤무대를 뛰던 무명 가수 조용필은 이 곡으로 벼락 스타가 됐다. ‘가왕 신화’의 시작이었다. 당대 한국과 일본의 내로라하는 가수들이 앞다퉈 이 노래를 불렀지만 그 덕에 조용필의 가치는 더 높아만 갔다. 음식의 도시이자 음악의 도시인 부산, 이태리타월·찜질방·노래방도 부산이 고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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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