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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의 심리학 교실 - 영화 <버드 맨>으로 본 ‘자기 심리학’

[월간중앙] 리건 톰슨은 한때 잘 나가던 할리우드 스타였다. 블록버스터 영화의 주인공으로 유명세를 탔지만 지금은 브로드웨이에서 미국 소설가 레이먼드 커버의 연극을 올리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다. 감당하기 어려울 정도로 연극에 쏟아붓고 있는 돈은 둘째치고, 그의 내면에 기생하는 비대한 자의식이란 놈 때문이다.

영화 <버드 맨>의 한 장면. 주인공 리건 톰슨은 한때 잘나가던 할리우드 스타였다. 연기파 배우와 톱스타의 길 중 하나를 택해야 했던 그는 결국 자아갈등 끝에 창문 밖으로 뛰어내린다.


그의 내면 자아는 끊임없이 자신을 세계적인 톱스타 조지 클루니와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와 비교한다. 또한 명품 연기자로 인정받으려고 몸부림치는 그에게 내면 자아는 ‘그러지 말고 대중에게 관심을 끌 수 있는 블록버스터 영화를 찍어 다시 한 번 스타가 되어보자’고 속삭인다.

리건 톰슨의 생애를 다룬 영화 <버드 맨>으로 지난해 아카데미 감독상을 수상한 알레한드로 곤잘레즈 이냐리투 감독은 “그 누구라도, 심지어 아이들 조차도 자아의 희생양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일깨워 주고 싶었다”고 한다. 인간의 자아는 우리를 끌어올려주지만 눈 깜짝할 사이에 죽일 수도 있는 위험한 것이란 이야기다. 실제로 자아는 이중적인 성질을 지녔다. 자아의 부정적 면에 힘을 내주고 휘둘리게 되면 끔찍한 일이 벌어지는 반면에 때로는 위로가 되기도 하는 신비한 힘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자의식을 갖게 된 속사정

자기 인식(self-recognition)’은 대부분 생후 18~24개월부터 나타난다. 이들 영아는 사진 속의 자기 모습을 인식했으며, 이 사진을 명명하기 위해 자기 이름이나 대명사 ‘나’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영화 <버드 맨>을 보면 저절로 이렇게 질문하지 않을 수 없다. 대체 자아는 언제부터 존재했을까? 인간은 왜 이 부작용이 있는 ‘나’라는 의식을 뇌 속에 장착하게 된 걸까? 그 때문에 종교학에서는 신의 문제에 비견할 이 자아의 문제를 연구하기도 했다.

발달심리학자 마이클 루이스(Michael Lewis)와 쟌 브룩스 건(Jeanne BrooksGunn)은 1979년 흥미로운 실험을 했다. ‘거울 루즈 검사’라는 이름의 이 실험에서 실험자들은 영아 몇 명의 코에 빨간 루즈를 바른 뒤 거울 앞에 서게 했다. 만약 영아가 자기 얼굴에 대한 도식(圖式)이 있어 거울에 비친 모습이 자신의 것임을 인식한다면 유아는 곧 빨간 루즈 때문에 생긴 코의 붉은 점에 주목하고 손을 뻗어 콧등을 닦아낼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저 멀뚱멀뚱 딴짓만 하게 될 것이다.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생후 9~18개월 된 어린 영아일수록 자기에 대한 인식은 낮았다. 영아는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타인’의 얼굴인 것처럼 대했다. 그러나 두 살 정도 되는 아이들은 달랐다. 대부분 얼굴 위의 낯선 루즈를 인식하기라도 한 것처럼 자신의 코를 만지고 비볐다. 실험 결과 ‘자기 인식(self-recognition)’은 대부분 생후 18~24개월에 나타나는 것으로 보인다. 흥미로운 점은 자연 속 유목민의 영아는 거울을 한 번도 본적 없었는데도 도시에서 길러진 영아와 같은 시기에 동일한 자기 인식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또한 생후 18~24개월 된 영아는 사진 속의 자기 모습을 인식했으며 이 사진을 명명하기 위해 자기 이름이나 대명사 ‘나’를 사용하기까지 했다

자기 인식은 마음을 발달시키는 기초가 되는 한편 ‘감성지능(emotional intelligence)’의 중추를 이룬다. 일례로 친구가 빨간 옷을 샀다면 ‘이 친구는 자신에게 빨간 옷이 어울린다고 믿는다’라고 생각한다. 즉 인간은 자기 인식을 통해 타인도 나처럼 어떤 의도가 있는 행동을 한다고 파악하는 것이다. 인간의 행동이 믿음, 바람, 의도와 같은 마음 상태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이해하다 보면 자연히 타인의 마음 상태를 추론하려 든다. 이것이 바로 데이비드 프리맥(David Premack)과 가이 우드러프(Guy Woodruff)가 주장하는 ‘마음 이론(Theory of Mind, ToM)’의 핵심이기도 하다.

자의식이 있어야 거꾸로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고 모방할 수 있으며 궁극적으로 ‘우리’라는 협동체를 만들어낸다. 간지럼 태우기 놀이나 까꿍 놀이는 자의식이 발달하는 두세 살 아이들이 유독 좋아하는 놀이다. 이 놀이는 ‘나’라는 자의식이 가능할 때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아기는 엄마가 간지럼을 태우며 웃는 모습을 흉내 낸다. 엄마는 또 아기의 그 표정을 흉내 낸다. 이때 엄마와 아기는 동일한 정서적 경험을 하게 된다. 완벽한 ‘우리’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인간의 의사소통은 이런 방식으로 시작된다. 각기 다른 주체가 동일한 경험을 하면서 서로를 이해하는 것. 이것이 바로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의 기원이다. 자의식의 발달과 흉내내기 기제가 인간 의사소통의 기원이 되는 것이다.

‘자아’를 택한 인간, ‘본능’을 택한 동물

돌고래는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자기 인식이 가능한 동물이다. 돌고래처럼 자기 인식이 가능한 동물의 경우 다른 개체를 알아보거나, 죽은 동료의 주검 옆을 떠나지 못하고 애처롭게 울기도 한다.


그렇다면 과연 자의식은 인간의 고유한 특권일까? 동물은 자의식이 없을까? 만약 동물에게도 조금이라도 자의식이 있다면 왜 동물은 인간처럼 자의식 성장을 통해 폭발적으로 지능을 증가시키는 방향으로 진화하지 않았을까?

뉴욕주립대의 고든 갤럽 교수는 이미 1970년 대에 동물을 대상으로 거울 루즈 실험을 진행했다. 대부분의 실험 대상 동물에게 거울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준 후 거울에 반사된 모습에 보여 주면 동물은 반사된 자기 모습과 친해지려고 들었다. 일부 동물은 입을 벌리고 입 속을 들여다보는가 하면 자신의 혀가 움직이는 것을 신기하게 관찰했다. 거울 속의 나를 ‘다른 개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대상 동물을 재운 후 이마에 빨간 점을 그려두고 거울 앞에 놔둬봤다. 대다수 동물은 깨어나 거울을 봐도 반응이 없지만 몇몇 동물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관심을 보이고 이마의 빨간 점을 만지려고 들었다. 구체적으로는 일부 침팬지, 오랑우탄, 돌고래, 범고래, 코끼리 및 제비는 초보적인 수준이지만 자기 인식이 가능하다는 결과가 나왔다.

그렇다면 돌고래나 범고래는 인간보다 뇌의 용량이 더 크고 원시적인 자기 인식도 가능했는데도 왜 인간처럼 자기 인식을 발달시키는 쪽으로 진화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에 대해 샌디에이고 의과대학 석좌교수인 아지트 바르키와 애리조나대학 분자세포생물학과 전 교수 대니 브라워는 저서 <부정본능>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우리는 종종 TV 다큐멘터리에서 아프리카 코끼리가 동료 코끼리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을 본 적 있다. 코끼리는 먼저 세상을 떠난 친구의 주검 옆을 떠나지 못하고 애처롭게 운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코끼리가 다른 개체를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나아가 죽음에 대해서도 인지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데 문제는 아프리카 코끼리가 ‘나도 언젠가 친구처럼 죽을 것이다’라는 인식을 하게 되면 일상생활에 심각한 부적응을 일으킨다는 점이다. 코끼리는 죽을 운명이라는 혼란스러운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번식할 기회를 얻는 짝짓기 경쟁에서 성공할 가능성이 낮아진다. 위험한 몸싸움으로 상처를 입어 죽으면 모든 게 끝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이처럼 대부분의 생물체는 타 개체에 대한 인식을 통해 생존의 두려움을 얻기보다 그냥 본능에 충실한 평화로운 삶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자의식 과잉을 대처하는 방법 ‘방어기제’

초월 심리학은 자의식을 통해 자신의 사회적인 역할이나 가면을 벗고 ‘진정한 자신’을 찾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거의 허물을 벗어던져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와는 반대로 인간은 다른 선택을 하게 된다. 자의식을 가진 데 머무르지 않고 엄청난 지능을 가진 고등생물로 진화하는 쪽을 선택한 것이다. 물론 아프리카 코끼리의 사례가 보여주었듯이 자기 인식은 매우 위험하고 동시에 부작용이 많은 진화의 산물이기도 하다.

일단 자의식은 앞서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십중팔구 두려움의 씨앗을 품게 된다. 게다가 과잉 자의식은 사람의 마음을 끊임없이 괴롭힌다. 나 자신을 타인에 비춰봤을 때 뭔가 잘못된 것 같고 사람들이 나만 지켜보는 것도 같은 마음이 그것이다. 이게 더 심해지면 편집증을 일으킬 수도 있다. 부정적 자아 개념으로 분류되는 낮은 자존감 또한 자의식의 산물이다. 드문 경우 우리의 두뇌는 ‘내 머릿속에 다람쥐가 있다’는 식의 완전히 잘못된 자의식을 가질 수도 있다. 즉 자의식은 인간만이 발전시켜온 매우 특별한 진화의 산물이면서도 부작용의 위험성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떻게 이러한 자의식의 부작용을 딛고 자의식을 다룰 수 있게 됐을까? 인간은 현실을 부정하거나 왜곡해서 자신의 마음을 방어하는 ‘방어기제(defense mechanism)’를 발전시켜왔다. 타인의 죽음을 목격한 인간은 당분간은 자신이 죽지 않을 것이며 아주 오래 살 것처럼 죽음을 부정한다. 때로는 내면 속의 깊은 질투나 욕망이 자신이 아닌 타인에게 있다고 ‘전가(투사)’하기도 한다. 혹은 시어머니에게 혼난 며느리가 부엌에서 기르는 강아지를 때리는 식으로 복수의 대상을 치환하는 방법도 알고 있다. 즉 인간은 자의식이 내면에 상처를 주지 않도록 적당히 마음을 요리하는 법을 끊임없이 발전시켜 오면서 다른 동물과의 월등한 지능 격차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가면을 벗고 참 자신의 모습을 깨달아야”

분명 방어기제는 인간 생존에 필수가 된다. 그러나 방어기제를 남용 혹은 오용하다 보면 현실을 투명하게 보지 못하는 단점도 생겨난다. 이에 인간은 또 다른 대처방안을 마련한다. 이번에는 아예 자기를 초월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어떤 사람은 명상을, 어떤 사람은 종교를 갖기도 한다. 또 어떤 사람은 약물 같은 극단적인 방법으로 자아를 벗어나는 체험을 하려 든다.

때문에 ‘초월 심리학(transcendence psychology)’에서는 자아가 어떤 집착을 가지고 있는지 바라 보도록 노력하라고 권유한다. 어떤 부분에 대한 집착과 동일시를 넘어서서 ‘탈(脫) 동일시’를 시도하라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돈에, 어떤 사람은 육체에, 또 어떤 사람은 자신의 강박에 사로잡혀 있다. 이런 인간에게 이것보다도 더 큰 자신이 있음을 체험하게 함으로써 자의식 과잉에서 벗어나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전쟁을 경험했거나 호스피스 병동 체험처럼 죽음과 삶의 경계를 넘나드는 경험을 하게 된 사람들은 때론 놀라운 자기 변용이 가능해진다.

조나단 하이트의 TED 강의에서 소개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용사들의 경험을 살펴보자. “전투에서 함께했던 고생의 경험들이 인생에서” “가장 절정의 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나도 모르게 ‘우리’가 되고 개인적인 믿음은 의미를 잃게 됩니다.” “자기희생을 비교적 쉽게 만들어버리는” “불멸에 대한 확신과 다를 바 없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넘어 질지 모르나 죽지는 않습니다.” “진실된 내면의 나는 앞으로 나아가 내 목숨을 바쳐 구하려고 한 동지들과 같이 살기 때문입니다”

결국 초월 심리학적 관점에서는 ‘나는 배우다. 나는 교수다. 나는 엄마다’ 같은 어떤 역할이나 가면의 내가 아닌, 진정 몸과 마음이 통하는, 더 깊숙한 감정과 욕망을 깨우치려는 ‘참 자기’를 체험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영화 <버드 맨>의 리건 톰슨은 어떻게 됐을까? 그는 온갖 무시무시한 비평가의 협박과 내부의 자기 혐오적인 순간을 뒤로 하고 연극 무대에서 총으로 자신의 코를 날려버린 후 배우로서 아낌없는 찬사를 듣는다. 이후 리건은 병원 창문 밖으로 힘껏 날아오른다. 리건의 딸은 이 모습을 보며 빙긋 웃는다. 결말에 대한 해석은 분분하다. 우울증을 앓고 있는 내 내담자(상담 받으러 오는 이)는 이 장면을 두고 그가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나는 그가 과거의 자아를 벗어 던지고 새로운 단계로 나아간다는 것으로 보였다.

영화 <버드 맨>은 자의식이 당신에게 온갖 험악한 소리를 내뱉을 수 있지만 결국 당신의 날개가 되어 당신을 아주 다른 사람으로 만들어버릴 수도 있다는 점을 상기시킨다. 이토록 불완전하지만 경이로운 자의식. 이 고통스러운 축복을 선택해준 과거의 인간들, 내 선조의 선조들에게 감사하고 싶다. 삶은 비가 멈추기를 바라는 것이 아니라 빗속에서 춤추는 법을 배우는 것이기에, 자아를 버리고 싶어 하기 보다 자아가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춤추게 하라. 내가 누구인지 말할 수 있는 자는 바로 나일 뿐이니까.

심영섭 - 1966년생. 서강대 생명공학과 졸업. 고려대 심리학 석·박사. 현재 대구사이버대학교 전임교수, 심영섭 아트테라피&상담센터 사이 소장, 한국사진치료학회장으로 활동 중이다. 저서로 <영화, 내 영혼의 순례> <대한민국에서 여성평론가로 산다는 것> <영화치료의 이론과 실제> <영화치료를 위한 영화수첩>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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