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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연구] 김종필 증언록과 현대 정치사의 새 쟁점

[월간중앙] 신화와 전설이 사실 또는 거짓으로 밝혀질 때, 새로운 진실이 오래된 거짓을 대체할 때가 있다. 한국 현대사의 영역에서도 그런 바람이 불고 있다. <중앙일보> 연재 풍운아 김종필의 증언록을 통해서다. 증언록의 제목은 ‘소이부답(笑而不答)’. 알지만 미소지을 뿐 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궁금증을 증폭시키는 제목이다. 그가 새롭게 내놓은 역사적 사실의 파장은 넓고 깊다. 5대 주요 쟁점의 핵심을 중간 점검했다.



풍운의 정치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중앙일보>에 연재 중인 증언록 ‘소이부답’을 통해 한국 현대사를 새롭게 써야 할 메가톤급 증언을 쏟아내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1. 사라진 ‘김종필-오히라 메모’는 어디에 - JP는 왜 ‘제2의 이완용’되기를 자청했나



그간 아무런 의심 없이 ‘김종필-오히라 메모’로 알려진 서류(사진)에 대해 JP는 “회담 때 내가 쓴 것도, 오히라가 작성한 것도 아니다”라고 증언해 파문이 일었다. [사진·중앙포토]
광복 70년을 맞는 해라 한일관계가 더욱 핫한 이슈가 됐다. 아베 정권의 우향우 독주와 이에 대한 우리측의 반감 때문에 양국 정상은 단 한번의 회담조차 갖지 못하고 있다. 국가적 차원의 군 위안부 동원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일본의 태도는 요지부동이다. 식민지 지배에 대한 청구권 협상에서 종군 위안부 문제가 빠졌다는 것이 불행의 씨앗이었다. 현재의 관점에서 당시의 협상안을 질타해선 안 된다는 주장도 있지만 두고두고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5·16 직후부터 시작된 한일 국교정상화 비밀협상의 의제는 크게 5가지였다. ‘한·일 기본관계’, ‘재일 한국인의 법적 지위’, ‘대일 재산청구권’, ‘어업 및 선박 문제’, ‘문화재 반환’ 등이다.



가장 큰 난항이었던 게 청구권 자금이었다. 종군위안부 문제의 포함 여부는 당시 한일 양측 모두 생각하지 못했다. 보편적 인권에 대한 인식도 지금과는 달랐다. 오직 얼마를 주고 받아야 할 것인가의 문제가 됐다. 주는 쪽은 깎으려 했고, 받는 쪽은 ‘액수의 마지노선’을 지키려 했다. 1962년 무렵이다. 당시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8억 달러’ 지침을 JP에게 주었다는 것이 이번 증언을 통해 밝혀졌다.



JP의 협상 상대는 오히라 마사요시(大平正芳) 외상이었다. 일본 언론은 그의 별명을 둔우(鈍牛·둔한 소)라고 했다. 굼떠 보이지만 확실하며 힘이 세다는 뜻이다. 오히라는 무상 2억 달러, 유상협력기금 형식의 3억 달러, 총액 5억 달러를 제시했다. 결국 JP가 제안한 ‘3억(무상)+2억(유상)+1억 플러스 알파(민간)’ 선에서 합의가 이뤄졌다. 마지막 쟁점은 돈을 어떤 방식으로 지불하느냐에 관한 것이었다. 갑론을박 끝에 타결했지만 자금 규모의 합의에 비하면 부수적인 일이었다. 그 내용을 적은 게 바로 유명한 ‘김종필-오히라 메모’다. 메모의 내용은 ‘①무상 3억 달러 ②유상(대외협력기금) 2억 달러 ③수출입은행에서 1억 달러+α를 제공한다’였다.



청구권 자금은 나라 세우는 밑천



1962년 11월 12일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왼쪽)이 일본 외무성에서 오히라 마사요시 외상과 대일(對日) 청구권 자금을 협상하는 모습. [사진제공·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김-오히라 메모의 6억 달러+알파는 1965년 양국 외무부 간 최종 타결 과정에서 8억 달러로 조정됐다. 대일 청구권 자금은 포항제철(1억3천만 달러)과 경부고속도로, 소양강 다목적댐 건설에 요긴하게 쓰였다. 특히 종합제철소인 포철은 입지 선정과 제철기술 도입 등에 JP가 직접 나섰다. 동해안을 돌아다니며 항구 건설이 용이한 포항을 제철소 부지로 선택했고, 신일본제철의 이나야마 요시히로(稻山嘉寬) 회장으로 하여금 공장 설립과 기술 도입을 도와주도록 했다. 포철은 한국이 세계 5위의 자동차, 세계 2위의 조선 생산국이 되게하는 결정적인 철강 자재 공급원이 됐다. 당시 ‘제2의 이완용’이란 비판에 시달렸지만 JP의 입장은 요지부동이다. “청구권 자금을 나라 세우는 밑천으로 삼겠다는 혁명정부의 구상이 성공했다”고 증언했다.



한일 밀실협상의 상징이었던 ‘김종필-오히라 메모’가 이번 증언을 통해 다시 수면에 떠올랐다. JP가 그 메모의 진위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이다. 그 과정은 이렇다. 2005년 외교부는 3만5천 쪽짜리 비밀 외교문서를 공개했다. 그중 2쪽짜리 A4 용지 맨 위에 영어 필기체로 ‘Top Secret’이라는 제목과 일본어로 대일 청구권(請求權) 자금의 액수와 조건이 적힌 서류가 끼어 있었다. 이 서류에 대해선 그저 ‘오히라 외상이 (김종필 정보부장에게) 각 문제 토의 때 설명한 별첨 메모’라는 애매한 표현이 붙어 있었다.



1961년 12월 서울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 공관에서 열린 송년 파티.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왼쪽·대장)과 재건복을 입은 김종필 중앙정보부장이 칵테일 잔을 들고 담소하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당시 언론은 너나 할 것 없이 이 서류를 사진과 함께 게재하면서 1962년 11월 12일 김-오히라 회담에서 두 사람이 작성한 비밀 합의문서로 보도했다. 검증도 반론도 논쟁도 없었다. 그런데 이 사진은 ‘김-오히라 메모’가 아니라는 것이 증언록 공개를 통해 밝혀졌다. JP는 인터뷰 과정에서 이 문서를 보고 “내가 모르는 서류”라고 일축했다. JP는 “나와 오히라 외상은 오히라 집무실에 있는 손바닥만한 메모지를 한 장씩 뜯어 4시간 협상한 내용을 각각 썼다. 나는 한글과 한자로 썼다. 지금 나도는 두 장짜리 서류는 회담 때 내가 쓴 것도, 오히라가 작성한 것도 아니다”라고 증언했다.



단추는 어디서 잘못 끼워진 것일까? JP는 회담 이튿날인 11월 13일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에게 보고한 뒤 메모를 배석한 최덕신 외무부 장관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최 장관이 이 문서를 외무부에 넘기지 않은 것인지, 넘겼는데 관리 소홀로 분실된 것인지, 아니면 외무부의 어두운 창고에서 아직도 ‘발견의 빛’을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가 규명되어야 할 문제다.



‘김-오히라 메모’의 진본을 찾는 일은 그러나 본질적인 차원의 문제는 아니다. 진본에 전혀 다른 내용의 협상안이 적혀 있을 리도 만무다. JP는 청구권 협상을 위해 일본의 정계 실력자 대여섯 명을 집중적으로 만났는데, 그중에서 제일 역할을 많이 한 건 이케다 총리였다. ‘김-오히라 메모’의 당사자인 오히라 외상도 중요했지만 그는 역시 이케다 총리의 영향권 안에서 JP와 협상을 했던 것이다. 다만 진실이 변질되는 과정에서 학계와 언론, 관료 사회의 게으름과 억측, 부실이 새삼 확인됐다. 메모의 존재는 거짓이라고 말하는 게 민망할 정도로 처음부터 논쟁 없이 한국 사회에 수용된 측면이 있다.



“미국이 한일수교 강박했다”



JP가 오히라와 협상하면서 “한·일 관계에 독도가 문제 된다면 폭파할 수 있다”고 말했다는 이른바 ‘독도 폭파론’이 존재했다. 폭발력으로 치면 ‘메모’보다 훨씬 크다. JP를 대일(對日) 굴욕외교의 주인공으로 몰아가는 데 ‘독도 폭파론’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JP는 항변했다. 오히라가 “독도 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넘기자”고 제안하자, “그렇게 할 수 없다. 독도, 폭파하면 했지 당신네들한테 줄 수 없다”고 반박했다는 것이다. ‘독도 폭파’에 방점을 둔 게 아니라 ‘일본에 넘겨줄 수 없다’를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독도 밀약설’은 ‘한국과 일본이 독도를 미해결의 상태로 놔두기로 밀약문을 작성했다’는 소문을 가리킨다. 밀약설은 밀약문서를 JP의 셋째 형인 김종락(작고) 씨가 갖고 있다 불태웠던 것으로 ‘그럴듯함’을 더했다. 그러나 JP는 이번 증언에서 밀약설의 근거를 허물었다. “내가 종락 형님의 움직임을 잘 아는데 형님은 처음부터 그런 문서를 갖고 있지 않았다. 형님이 과장했다”고 말했다.



JP가 주도한 한일협상에 대한 비판은 아직도 힘을 잃지 않고 있다. 당시 미국이 한·미·일 동맹 구축에 대한 필요 때문에 사실상 한일수교를 강박했다는 것이 그 핵심 논리다. 일본의 입장에서는 미국의 주문도 있었지만 전후 청산과 시장확대 그리고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회복이라는 현실적 욕구도 작동했다고 본다.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은 정통성 결여로 인해 미국의 요구를 즉각적이고 전폭적으로 수용할 수밖에 없었으며, 취약한 권력을 유지 강화하기 위해 경제개발의 재원 확보와 정치자금의 조성이 시급했다…. 요컨대 삼자 간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져 이뤄진 졸속 회담이었다는 비판이다.



이동준 기타큐슈대 국제관계학과 조교수는 “한국 측이 무엇보다 중요시했던 ‘숫자’를 채워 넣기 위해서는 청구권을 사실상 포기하고 일본이 원하는 경제협력 형식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일본은 일제의 식민통치를 합법적이었다고 전제한 후 그 틀 속에서 ‘합법적으로’ 이뤄진 한국인의 경제활동에 따른 재산 및 권리의 ‘반환’만을 인정하겠다는 입장을 취했다는 것이다. 김종필 당시 중앙정보부장의 행보는 청구권이라는 명분을 양보하더라도 어떻게든 총액을 맞춰 보려는 정치담합의 역정이었다는 것이 이 교수의 시각이다. JP는 그러나 이 같은 주장을 결과론으로 일축한다.



“그래서 8억(달러)까지 받아오면. 어디 나라 경제 좀 일으킬 수 있겠다…. 박 대통령도 그렇게 생각하고 나도 그렇게 생각했어. 그대로 했어. 그랬는데 나더러 매국노라 그러더라. 제2의 이완용이라고. ‘제3의 이완용이라도 좋고, 매국노도 좋다. 두고 봐라.’ 내 속으로 그랬어. 내가 나라 팔아먹으려고 가나. 그때 흔히 잘 한 소리가. 일본 돈 들어오면 매판자본이 돼서 나라가 팔려가지 않느냐. 그래서 내가 그걸 대항하는 소리로 뭐라고 했는지 알아? 대학생한테도 내가 나중에 강의할 때. ‘이봐. 매판자본이건, 무슨 자본이건, 외자가 들어오기까지가 어렵지. 들어온 다음에는 내 거야. 가져갈 수 있겠어? 뭘 걱정하느냐’고. 그러니까 박수 치더라고, 학생들이.”



2. 혁명공약 1조에 ‘반공’이 들어간 이유 - 박정희는 과연 ‘어떤’ 좌익이었는가



1948년 10월 ‘여순사건’ 진압을 위해 광주 토벌사령부에 내려간 박정희 소령(왼쪽)이 송호성 사령관과 협의하고 있다. 박 소령은 서울에 복귀한 뒤 남로당 군사책 혐의로 숙군 대상에 올라 사형 위기를 맞았다. 사진 전문잡지 <라이프>에 실린 사진이다. [사진·중앙포토]
김종필(JP) 전 국무총리의 증언록 ‘소이부답’의 첫 회는 자못 충격적인 이야기로 시작됐다. JP가 직접 구상한 ‘혁명공약’ 제1조,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1의로 삼고…”라는 대목은 박정희 소장의 좌익 경력을 의식한 문장이었다는 것이다. 공산주의와 싸우다 휴전한 지 10년도 채 안된 시점에서 결행된 거사였다. 그 지도자가 사상적으로 의심받는다는 것은 곧 실패를 의미했다. “그렇다면 반공이 앞에 놓여야 한다”는 것이 ‘혁명의 설계자’ JP의 판단이었다.



JP 증언록에 따르면 박정희는 “나를 간판으로 하면 여러 가지 부작용이 생길지 모른다”고 걱정했다. 이 말은 두 가지 를 내포했다. 육군 최고 지휘관인 참모총장을 내세워야 군 내부를 장악할 수 있다는 전략적 판단, 또 하나는 과거 좌익 연루 전력이 재론되리란 우려였다. 그가 정점에 서면 좌익 꼬리표를 빌미로 집중 공격당할 것이었다. JP가 ‘반공을 국시(國是)의 제 1의(義)로 삼는다’는 문구를 공약 첫머리로 내세웠지만 박 소장은 그것만으로 충분치 못하다고 여긴 듯했다. 장도영을 혁명의 얼굴마담을 삼게 된 것에도 결국 좌익 연루 전력이 작용했다는 결론이다.



JP의 사상을 불온하게 본 김형욱



당시 박정희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에서 완전히 자유롭지 못했다. 1949년 그가 소령 시절 남로당에 휘말려든 사건 때문이었다. 몇몇 군 인사는 공공연히 “박정희는 빨갱이다”고 떠들 정도였다. 미국도 의심의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당시 미 8군 사령관 매그루더는 한국 정부에 박 소장을 예편시키라는 요구를 했을 정도다. 영리한 전략가 JP가 그 점을 놓칠리 없었다. JP는 마치 여담을 하듯 박 소장이 이 반공 국시 조항을 읽으면서 ‘빙그레 웃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JP는 “박 전 대통령이 당시 좌익 콤플렉스를 아주 크게 느끼고 있었다”며 “이 때문에 박 소장이 혁명 후에도 ‘나 그만두겠다’는 소리를 여러 번 했다”고도 말했다. 6·25 당시 구미 고향집에 있었던 박정희가 6월 28일 오후 5시 수원에 마련된 임시 육본에 나타나면서 문관 박정희에 대한 사상적 의심은 완전히 거둬냈다는 것이 JP의 회고다.



황태성은 박정희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남쪽으로 내려온 후 친구의 아들 김민하에게 “박정희는 민족적 양심이 강하다, 날 만나면 반가워 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사진·중앙포토]
박정희가 한때 남로당에 몸담았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당시 육본 정보국장 백선엽 대령은 박정희 소령이 중형을 면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고 봤다. “첫째 군부 내 남로당 조직책이라고는 했지만 다른 군인을 포섭하는 활동을 하진 않았고, 둘째 붙잡힌 뒤 자신이 아는 군대 내 남로당 조직을 수사팀에 알려줬다”는 것이다. 백 대령은 미군의 동의와 이응준 총참모장의 재가를 얻어 박정희의 형 집행정지 허락을 받아냈다. 백선엽 대령, 김안일 방첩과장, 김창룡 대위(1연대 정보주임) 세 사람의 보증을 받고 박정희 소령은 2심에서 형 집행정지로 풀려났다.



한국현대사 전공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는 “박정희의 좌익 경력 때문에 JP가 반공 국시를 혁명공약에 넣었다는 대목을 그의 입으로 직접 들으니까 더 재미있다”는 입장이다. 한 교수는 한 발 더 나아가 박정희보다 JP의 군 입대 전 사상에 의심의 눈초리를 던지고 있다.



“징병제도 없던 시절인데 서울대 다니던 JP가 무엇 때문에 사병으로 군에 입대했을까. 좌익 활동을 하다가 경찰 추적을 받을 때 가장 안전한 탈출구가 군에 입대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박정희는 용인했지만 김종필은 용인하지 않았다는 것인데, 그 근거는 신뢰도가 떨어지는 김형욱 중앙정보부장의 회고록을 통한 증언이다. “박정희는 좌익에서 우익으로 완전히 전향을 한 인물이었고, JP는 믿을 수 없다는 것”이 김형욱의 관점이었다. 육사 8기 동기생이었지만 두 사람 관계가 썩 좋지 않았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JP의 혁신적인 생각은 정적들의 표적이 되기도 했다는 이야기다.



JP의 증언록을 통해 처음으로 확인된 것은 박정희의 6·25 전 좌익 행적이 5·16 거사 당시에도 부담으로 작용했다는 점이다. 박정희는 집권 후 강력한 반공정책을 국정의 최우선 과제로 추진했다. 진보진영 학자들은 그 배경에도 레드 콤플렉스가 작용했을 것이란 그럴듯한 심리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3. 황태성 사건의 진실 - “정권을 위협하는 자는 간첩일 수밖에 없어”



1960년대 후반 공화당 4인 체제를 이뤘던 백남억 정책위의장, 김성곤 재정위원장, 김진만 원내총무, 길재호 사무총장(왼쪽부터)이 한자리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중앙포토]




‘거물 간첩 황태성 사건’은 한 편의 드라마다. 1961년 10월 북한 정권 무역성(省) 부상(副相)인 황태성은 김일성 지시로 남파됐으며 밀사(密使)를 자처했다. 황태성은 박정희의 셋째 형(박상희·朴相熙)과 동갑 친구. 박상희는 김종필(JP)의 장인이다. 그는 박정희·JP와의 면담을 요구한다. 어려서부터 박정희(1917~1979)는 형의 친구인 황태성(1906~1963)을 친형 박상희보다 더 잘 따랐다고 한다. 박정희가 대구사범과 만주군관학교 갈 때도 황태성이 조언을 해주었고, 훗날 박정희가 남로당에 입당할 때도 황태성이 보증을 서줬다고 한다.



JP의 증언도 흥미진진하지만 황태성 사건에 얽힌 ‘남쪽 두 사람’ 김민하(세계일보 회장·가운데), 권상능(조선화랑 대표) 씨도 JP 증언록을 계기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은 동갑(1934년생)·동향(경북 상주)·동창으로 처남·매제 사이다. 권씨는 고향 어른인 황의 조카사위다. 두 사람은 황의 부탁으로 박정희·김종필과의 인연 고리를 찾다가 구속된다. 김·권씨는 옥고(1년4개월, 1년10개월)를 치렀다. 권씨는 간첩죄로 처형(1963년 12월)된 황태성의 시신을 거둬 상주에 묻었다. 박정희 친일 논란의 단초가 됐던 만주군관학교 입학의 의미도 새로운 해석이 가능하게 됐다. 김민하 회장의 증언이다.



“황태성은 ‘박정희는 민족적 양심이 강렬하다. 날 만나면 반가워할 거다’라고 말했다. 박정희는 모든 얘기를 자신과 상의했다고 했다. 박정희가 만주군관학교에 갈 때도 찾아왔다고 한다. 나라와 민족을 위해 옳은 길인지 고민하기에 만주로 가라고 권유했다고 한다. ‘가서 일본군 내부에서 실력자가 돼라. 민족을 위해 큰 일을 할 기회가 올 거다’고 격려했다는 것이다.”



황태성 등장에 새하얗게 얼굴 질린 박정희



정보부의 수사 결과 황태성은 임진강을 건너 1961년 8월 31일 서울에 잠입했다. 황태성이 서울에 도착해 먼저 찾아간 곳은 김성곤(金成坤·공화당 재경위원장·쌍용그룹 창업자) 이사장으로 있던 동양통신사(남대문로2가)였다. 남로당(南勞黨) 재정부장을 지낸 김성곤은 황태성과 친한 사이였다. 하지만 김성곤이 일본 출장 중이어서 만나질 못했다. 황태성은 대신 고향 친구 아들인 김민하를 찾아갔고, 그 집에서 50일 간을 숨어 지내다가 잡혀왔다. 황태성을 잡아서 가둬놓고도 JP는 박정희 의장에게 아무 보고도 하지 않았다. 과거 좌익혐의 전력 때문에 박 의장이 이 보고를 받으면 얼마나 놀라고 당황할지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JP는 그래서 가급적 조용히 자신의 선에서 알아서 처리하려고 했다. 그러나 황태성이 김일성 지시로 내려온 게 분명한 이상 박 의장에게 보고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태성을 체포한 지 며칠이 지나 장충동 최고회의 의장공관으로 찾아갔다. 박정희 의장 얼굴이 갑자기 새하얘졌다. 그는 “난 안 만나”라고 말했다고 한다.



‘거물 간첩 황태성’에 대한 미국의 시각은 미묘했다. 김일성의 밀사로 자처한 황태성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친형인 박상희의 친구다. 박 의장과 그의 조카사위인 정보부장 김종필을 만나려고 시도했다. 그 때문에 미국은 박 의장에게 의심 섞인 눈초리를 보냈다. 서울 주재 미국 정보기관들은 황태성을 직접 신문(訊問)하려 했고, 그 문제로 양국 정보기관은 갈등을 겪기도 했다. 결국 미국 중앙정보국(CIA) 서울 지국장 피어 드 실바(Peer de Silva)의 요청으로 황태성의 신병은 미국 측에 넘겨졌다. 왜 미국은 황태성을 신문하려 했을까? JP는 이렇게 증언했다.



“미국은 박정희 의장의 과거 좌익 경력을 의심했다. 황태성이 남한에 내려온 것도 사전에 내통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여겼고, 황태성을 통해 박 의장의 정체를 알아내려고 한 것이었다. 나는 황태성을 처음 붙잡았을 때부터 빨리 재판절차를 마치고 간첩죄로 처리할 생각이었다. 이 문제로 곤란한 처지에 놓일지도 모르는 박 의장을 위해서였다. 그땐 툭하면 박 의장을 사상적으로 음해하는 세력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밀사였다는 주장도 있지만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황태성은 김일성이 보낸 간첩이라고 본다. 김일성은 박정희 의장을 잘 설득하면 북한에 합작할 수 있을 거라고 보고 황태성을 내려 보낸 게 분명하다. 박 의장이 대통령에 당선(63년 10월 15일)되자 미국 측의 황태성 조사 요구가 쑥 들어갔다. 박 의장이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상 미국 측도 더 이상 의심을 품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황태성이 밀사인가, 간첩인가에 대한 논쟁이 중요한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니다. 김일성의 입장에선 밀사였을 수 있지만 박정희의 입장에선 간첩일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다. 의도와 동기가 순수하다 해도 정권을 위협하는 자를 밀사로 부를 수는 없기 때문이다. 권력 기반이 아직 취약했던 박정희와 JP 입장에선 황태성을 가까이 할 수도, 살려둘 수도 없었다.



1963년 대선 때 중앙정보부 책임자는 김형욱(4대 부장)으로 바뀐 뒤였다. 63년 10월 22일 대법원은 황태성에게 간첩 죄로 사형을 확정했다. JP가 8개월간 외유를 마치고 귀국하기 하루 전 일이다. 그해 12월 14일 황태성에 대한 총살형이 집행됐다. 군부대의 처형 현장엔 국방부 출입기자를 입회시켰다고 한다. 사형이 집행됐다는 걸 증명해줄 손 끝 매서운 기자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사형이 집행됐을 때 JP는 6대 국회의원(총선 11월 26일)으로 당선돼 공화당 당의장을 맡고 있었다. 대통령 취임식을 사흘 앞둔 박정희 의장이 황태성의 처형 사실을 보고받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봤다. 박 의장은 표정이 굳은 채 “그렇게 했어…”라며 고개를 끄덕일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는 것이 JP의 회고다. 황태성은 박 의장이 어려서 친형처럼 따랐던 사람이니 고민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혼자 참았다. 황태성 문제를 잘못 처리했다가는 정권은 물론 자신의 신변에도 큰 위기가 닥칠 것이란 점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황태성 등 간첩 남파자금으로 TV 방송국 설립



황태성과 관련해서는 그간 갖가지 소문이 난무했다. 김일성이 남로당 출신 박정희를 회유하기 위해 거액의 자금을 보냈고, 그 돈이 공화당의 조직자금 등으로 쓰였다는 소문도 돌았다. 심지어 그가 총살당하지 않았으며 공화당 창당의 구체적인 방법론을 조언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가 상당한 자금을 갖고 내려왔다는 것은 JP 증언을 통해 분명해졌다.



“‘황태성 사건’ 하면 1961년 KBS TV방송국 개국이 떠오른다. 61년 여름, 나는 오재경(吳在璟, 1919~2012) 공보부 장관을 만나 TV 방송국 설립 계획을 논의했다. 서로 뜻이 통했고 오 장관도 그런 구상을 갖고 있었다. 정부 예비비에서 1억 환을 마련해 TV 방송국을 연내에 짓기로 했다. 개국 예정일을 두 달 남짓 남겨놓은 10월 남산 기슭에 TV 방송국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방송 스튜디오 건물은 착공됐지만 방송용 기자재를 사올 돈이 부족했다. 나는 오재경 장관을 불렀다. 중앙정보부는 그동안 간첩들로부터 압수한 공작금 20여 만 달러를 갖고 있었다(61년 20만 달러는 2억6000환). 거기엔 황태성이 가져온 돈도 포함됐다. 내가 ‘이 돈으로 방송 기자재를 사면 크리스마스 이브에 개국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오 장관은 ‘해보겠다’고 했다. 나는 박 의장에게 보고도 하지 않고 그 돈을 오 장관에게 넘겨줬다. 그 돈으로 카메라를 포함해 필요한 기자재를 미국에 주문했다. 결과적으로 김일성이 KBS TV 개국에 큰 역할을 한 셈이 됐다.”



4. 김성곤의 공화당 4인방 체제와 JP의 수난 - SK, 남로당 전력 신분세탁 부탁한 후 배신



1965년 베트남 전선을 향해 부산항을 떠나가는 파월 전투사단 장병들. 전투부대의 파병으로 대일 청구권 보상액보다 훨씬 큰 경제적 이익이 확보됐다. [사진·중앙포토]
JP는 1965년 말 민주공화당 의장에 오르지만 성곡 김성곤(SK)을 필두로 한 ‘4인 체제’의 견제에 간단 없이 시달렸다. 1960년대 후반 4인 체제는 공화당의 재정·공천·운영을 좌지우지하는 실세그룹이었다. JP의 주류 세력과 대비해 공화당의 ‘신주류’로 불렸다. JP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두 차례 외유(外遊)하는 동안 정치 지형은 빠르게 재편됐다. 구정치인 출신인 대구·경북(TK) 세력이 JP의 빈자리를 치고 들어왔다. 1965년 말 JP는 민주공화당 당의장으로 복귀하지만 이미 ‘4인 체제’가 당을 휘어잡고 있었다. TK의 김성곤·백남억, 이들과 손잡은 길재호·김진만 이렇게 넷이다. 그중에서도 선두는 김성곤(1913~75)이었다. 경북 달성 출신으로 고려대 전신인 보성전문 상과를 나온 그는 1980년대 재계 서열 5위였던 쌍용그룹의 창업자다.



김성곤이 공화당에 합류하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5·16 혁명 직후 중앙정보부장실로 금성방직과 동양통신사를 운영하던 김 사장이 찾아왔다. 이름만 알던 사이였다. 그는 JP에게 “나 좀 도와달라”고 청했다. 무슨 일인지 묻자 그가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치안국에 나에 관한 자료가 있을 텐데 그걸 보면 내가 남로당 출신 공산주의자라고 돼 있을 겁니다. 이게 언젠가는 나를 결딴 낼 기록인데, 김 부장께서 이걸 좀 없애 주시오.” 알고 보니 남조선노동당 재정위원이었던 김성곤은 1946년 대구 10·1사건에 연루됐었다. 대구 사건이 심상찮게 진행되자 그는 서울로 도망치듯 올라왔다. 이후 안양에 금성 방직을 세워서 큰돈을 벌었다.



신분세탁 부탁하며 박정희 의장에게 충성 맹세



1961년 11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의 방미는 그의 좌익 경력에 대한 미국의 의혹을 해소하는 계기가 됐다. 11월 14일 백악관을 방문해 케네디 대통령의 영접을 받고 있는 박 의장. [사진·중앙포토]
JP는 “기록을 어떻게 없앨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는 “정보부장이면 없앨 수 있습니다. 기록을 가져오라고 해서 치안국으로 다시 보내지 않으면 되지 않습니까”라고 답했다. JP는 “그렇게 해드리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라고 되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 “죽을 때까지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을 충성스럽게 모시겠습니다. 그러면 되지 않습니까? 여기서 손가락을 잘라서 피로 쓰라면 쓸 수 있습니다.”



그의 청이 간곡했고, JP는 그렇게 경력에 콤플렉스를 느끼고 있는 사람을 도와주면 정말 충성을 다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줬다. 치안국장에게 물어보니 김성곤의 말대로 그런 기록이 있었다. 그 서류를 가져오라고 해서 정보부에 두고서 다시 돌려주지 않았다. 그에겐 “기록을 없앴으니 약속대로 박정희 의장에게 충성을 해주시라”고 당부했다. 그는 얼마 동안 깍듯이 박 대통령을 모셨다. 공화당에서는 재정위원장을 맡아 성의를 보였다. 치안국(현 경찰청)에서 가져온 종이 서류는 JP가 없앴지만 기록의 원형은 마이크로필름 상태로 치안국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JP는 “김성곤 본인은 이 사실을 몰랐을 것”이라 증언했다.



김성곤을 포함해 백남억·박준규 등 TK 출신 구정치인들은 1963년 공화당 창당 때부터 참여했다. 엄민영 내무부장관을 비롯한 이들은 대구고보(현 경북고) 선후배들을 중심으로 똘똘 뭉쳤다. 이들은 박정희 대통령과 출신 지역이 비슷해 유·무형으로 친밀도가 높았다. 또 대통령을 돕는다는 이유로, 조금이라도 치고 올라오는 인물을 누르는 데 앞장섰다. 게다가 쌍용양회로 부(富)를 쌓은 김성곤 씨의 재력이 뒷받침됐다.



박 대통령 마음이 서서히 TK 쪽으로 움직였다. 한국 정치의 큰 파벌인 TK세력은 이렇게 형성됐다. 이들은 이후락 비서실장, 김형욱 정보부장 등과 함께 반JP 세력을 형성했다. JP는 자신의 남로당 활동 기록을 없애달라고 간청했던 김성곤의 모습을 떠올리며 인간에 대한 실망과 섭섭함, 배신감을 느꼈을 것이다. 1960년 정군운동 때부터 함께해온 혁명동지 길재호(육사 8기·평북 영변 출신)마저도 여기에 합세해 반JP로 돌아서는 것을 보며 JP는 큰 충격에 빠졌다. 그는 이렇게 증언했다.



“박 대통령은 아마도 자신이 그 세력을 이용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계셨을 거다. 하지만 내가 보기엔 경북 세력이 대통령을 이용해 힘을 키우고 있었다. 공화당 TK 세력은 나를 끌어내리려고 대통령 옆에서 자꾸 부추겼다. 1965년 12월 27일 나는 공화당 당의장에 오른다. 2차 외유 직전 당의장직에서 물러난 지 1년6개월 만이었다. 하지만 당총재에 이은 2인자로서의 실권을 쥐고 있진 못했다. 66년 1월 당 요직 개편에서 김성곤 씨는 국회 재경위원장에 이어서 당 재정위원장을 맡았고, 사무총장에 길재호가 임명됐다. 백남억 정책위의장과 이후 원내총무에 오르는 김진만까지, 이른바 ‘4인 체제’가 당을 장악하고 나를 포위해 맹렬하게 활동했다.”



김성곤이 공화당으로 들어오는 걸 막지 않았으니, 결국은 JP가 화(禍)를 자초한 셈인지도 모른다. 거기에 신분세탁까지 해주었으니 아이러니다. JP는 “SK(김성곤의 이니셜)가 야심이 많은 건 알았지만 그렇게 변할 줄은 몰랐다. 사람이 변하는 걸 탓해봐야 소용없다. 그게 인간의 천성이니 말이다. 오히려 변하지 않는 게 좀 모자란 사람일지 모른다.”



JP는 원래 가는 사람 잡지 않고 오는 사람 막지 않는 스타일이다. 왕자불추 내자불거(往者不追 來者不拒)의 정신을 가지고 평생을 살았다. 김성곤이 올 때도, 길재호가 갈 때도 그는 막거나 붙잡지 않았다. 그러나 마음속의 쓰라림마저 완전히 제거할 순 없었을 것이다. 해방 전후 활동한 혁신계 인사들을 두루 잘 아는 언론인 남재희(전 국회의원) 씨는 김성곤의 신분세탁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다.



“대구를 중심으로 한 남로당의 경북도당은 막강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정희 대통령의 친형(박상희)은 그 간부로 이른바 대구폭동 때 희생됐다. 쌍용그룹의 총수였던 김성곤 씨도 간부였는데 그 지역 군 수사기관 책임자의 도움으로 무사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김성곤 씨가 나중에 공화당의 간부가 되어 중앙정보부의 이른바 존안자료에 있는 그의 경력을 말소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이야기가 그때 언론계에 퍼져 있었다.”



5. 월남전 파병과 김종필의 역할 - “전투병 파병 안 했으면 주한미군 2개 사단 철수했을 것”



1966년 10월 14일 월남에 파병된 비둘기 부대를 찾은 김종필(JP) 공화당 의장이 현지 여성으로부터 월남모자를 선물 받고 있다. 왼쪽부터 신상철 주월 대사, JP, 김택수 의원(공화당), 채명신 주월 한국군사령관. [사진제공·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혁명 9개월이 지난 1962년 2월 13일 중앙정보부장이었던 JP는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월남을 방문했다. 당시 월남은 북쪽의 공산 월맹군과 전쟁을 벌이고 있었다. 이튿날 북위 17도선의 최전선 1사단을 방문했다. 수도 사이공에서 1천㎞ 이상 떨어진 오지였다. 그곳엔 3년 뒤 대통령에 오른 구엔 반 티우(1923~2001) 사단장(대령)이 전쟁을 지휘하고 있었다. 티우 사단장은 17도선 표지판을 가리키며 “이게 한국의 38도선과 같은 것”이라고 말했다. JP는 10여 년 전 북한·중공군의 남침을 맨주먹으로 막아내던 6·25를 상기했다. 38도선을 넘어온 북한군이 의정부 야산 일대를 개미 떼처럼 새카맣게 밀고 올라오고, 정찰 나간 JP의 머리 위로 날아간 포탄이 펑펑 떨어지던 장면, 육사 8기 동기생 40%가 소대장·중대장으로 전사한 기억들이 떠올랐다. 북위 17도선을 설명하는 티우의 눈빛은 ‘미국 등 유엔 참전국들의 도움으로 한국이 살아난 것처럼 월남도 당신 나라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듯했다. JP는 이렇게 회고했다.



“이튿날 고딘디엠 대통령을 예방했다. 그는 ‘한국군이 월남을 지원해주면 좋겠다’고 간절하게 요청했다. 그러나 월남 파병에 대해 아무런 답을 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내심 ‘파병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일었다. 고딘디엠의 첫인상은 퍽 부드러웠으나 그 속은 열렬한 민족주의자였다. 가슴 깊은 데서 우러나오는 애국심을 느낄 수 있었다. 고딘디엠은 나와 만난 이듬해인 63년 11월 미국이 사주한 쿠데타 세력에 의해 살해돼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미국은 고딘디엠과 호치민, 두 민족주의자가 몰래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는 의구심을 가진 것이다.”



젊은이를 사지(死地)에 보내는 선택



귀국 후 박정희 의장을 바로 찾아가 동남아 순방 결과를 보고했다. 월남파병을 검토해 보자고 건의했는데 박 의장은 소극적이었다. 박 의장은 “우리나라의 지금 현실을 봐서 다른 나라에 군대를 지원하는 게 가능하겠느냐”고 반문했다. 박 의장은 파병이 가져올 인명 손실을 걱정했다. 야당이 반대하며 물고 늘어질 것을 염려하기도 했다.



월남파병 얘기는 61년 11월 박정희 의장이 미국을 처음 방문해 존 F 케네디(1917~63) 대통령과 만날 때도 나왔다. 박 의장은 미국의 원조를 받아내는 반대급부로 월남 파병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케네디는 신중했다. 이때만 해도 미국이 월남에 본격적으로 군대를 보내기 전이었다. 1964년 8월 미군의 구축함이 월맹군의 어뢰정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는 ‘통킹만 사건’이 벌어져 월남전은 전면전으로 확대됐다. 이때부터 미국은 한국을 비롯한 우방국에 월남전 지원을 호소했다.



월남전에 한국이 본격적으로 파병해야 한다는 생각은 시간이 갈수록 깊어졌다. 1964년 2차 외유(6월 18일~12월 31일) 중 미국에 체류하면서 JP는 월남 파병은 자신이 해결해야 할 문제처럼 느꼈다. 미 국무부는 JP의 외유 프로그램으로 하버드 대학의 헨리 키신저(이후 국무부 장관) 교수가 주관하는 정치경제 특별세미나 과정을 마련해줬다. 그는 하버드에는 적(籍)만 걸어두고 주로 워싱턴DC에 가서 미국 의원들을 만났다. 9월 16일 토머스 도드(1909~71) 의원 등 상원의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국군이 월남에 가서 미군과 함께 싸울 수 있다”는 소신을 밝혔다. 그때 월남전 전황은 몹시 악화됐으나 미국과 같이 피를 흘려줄 나라는 거의 없었다. 기껏해야 호주가 병사 몇 명을 보냈고, 태국이 공군기지를 빌려주고 심부름 해주는 정도였다. 유럽 국가는 하나도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우리마저 파병에 소극적일 경우 미국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 2개 사단 중 일부를 월남으로 옮길 가능성도 봐야 했다. 월남이 아니라 미국이 간절하게 우리한테 매달리는 형국이었다. 이제 파병에 따르는 고민의 나날에 매듭을 지어야 할 시점이었다. 우리의 의지와 힘을 보여줄 때가 왔다는 판단을 했다.”



월남 파병의 최종 결정은 박 대통령의 몫이었다. 우리 젊은이를 사지(死地)에 보내는 선택 앞에 박 대통령은 밤잠 못 이루는 고뇌에 직면했다. 1964년 12월 존슨 미국 대통령이 파병요청 친서를 보냈고, 이듬해 1월 8일 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결단을 내렸다.



1965년 3월 건설지원단으로 구성된 비둘기 부대가, 10월에는 해병여단 청룡부대가 월남으로 떠났다. 66년까지 전투 병력 3개 사단이 뛰어들어 본격적으로 월맹군과 전투를 벌였다. 1965년 5월 16일 박정희 대통령이 존슨 대통령 초청으로 미국을 공식 방문했다. 존슨 대통령은 파월(派越)에 무척 고마워하며 보답으로 뭔가를 선물하고 싶다고 했다. 그때 박 대통령은 한국인의 이민을 허용하고 한국군의 장비를 현대화하며 과학기술 연구기관을 지어줄 것을 요청했다. 미국으로 떠나기 전 박 대통령은 JP와 정상회담 때 제시할 요청 사항을 협의했다. 당시 한국군의 병기는 전부 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때 쓰던 걸 물려받은 것들이었다. 또 경제를 일으켜 세우는 데 선진 공업기술을 도입하고 연구하는 전문기관이 필요했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게 66년 2월 설립된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다. 미국 측에서는 공과대학을 세우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지만 공업기술연구소가 우선이었다. 먹고 사는 게 급한 나라에서 기초기술보다는 기업에 필요한 응용 기술을 제공하는 기관이 절실했던 것이다.



베트남 파병 이익이 일본 청구권 자금보다 컸다



JP의 증언을 요약하면 베트남 파병은 미국의 요청에 의해서 라기보다 우리의 적극적인 의지가 더 많이 작용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언급은 5·16 쿠데타 직후 11월 13~17일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미국을 방문해 가진 케네디 미국 대통령과의 비공식 정상회담에서다. 박 의장은 케네디 대통령에게 “미국의 승인과 지원이 이뤄진다면 한국은 베트남에 한국군을 파병할 수 있으며 만약 정규군의 파병이 바람직하게 여겨지지 않을 경우에는 지원자들을 모집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제안했다.(국가기록원, 박정희 정부 정상외교) 하지만 당시 미국은 베트남전에 깊숙이 개입하기 전이어서 한국 측 제안을 적극적으로 고려하지 않았다.



베트남으로 간 군인과 기술자들이 송금한 돈은 한국 경제성장의 밑거름이 됐다. 역사학자 서중석은 “베트남전쟁 참전의 대가로 받은 여러 부문의 총수입은 10억 달러를 넘는 것으로 추산된다”고 말했다. 일본에서 무상으로 받은 청구권 자금 3억 달러의 3배가 넘는 액수다. 여기에 정확히 그 액수를 파악하기 어렵지만 미국이 지원한 저금리의 공공·상업차관도 있다. 이 같은 이익을 포괄적으로 감안하면 20억 달러가 넘는다고 보는 전문가도 있다.



물론 그 반론도 있다. 베트남전 참전의 물질적 대가에도 불구하고 당시 국민의 삶은 여전히 어려웠다는 주장이다. 역사학자 박태균(서울대 국제대학원 교수)은 베트남전이 한국경제중흥의 토대를 마련했다는 주장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는 “베트남 파병으로 국내 저축이 큰 폭으로 증가했음에도, 1969년부터 부실 기업이 속출하고, 1972년에 가서는 급기야 8·3 조치라는 대통령 긴급명령을 발효한 것은 무엇 때문이었는가”라고 반문한다. 베트남전에서 벌어들인 재화가 국민들의 방 곳곳을 따뜻하게 해주는 데는 실패했다는 문제제기다.



한기홍 월간중앙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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