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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 대통령 종신집권이 중정 기본 임무” 김재규, 청구동 찾아가 압박

1975년 1월 31일 건설부(정부종합청사)를 초도 순시하는 박정희 대통령과 차지철 경호실장(왼쪽 둘째), 김재규 건설부 장관(오른쪽). 김재규는 76년 12월 4일 중앙정보부장에 발탁되면서 차지철과 치열한 충성 경쟁을 벌이게 된다. 박 대통령은 고향 구미 후배이자 육사 동기인 그를 군 시절부터 중용했다. 김재규는78년 초 김종필 전 총리에게 “박 대통령을 종신대통령으로 모시는 게 정보부의 기본 임무”라고 말하기도 했다.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1978년은 유신헌법 2기의 대통령선거(7월)와 제10대 국회의원 총선(12월)이 있는 해였다. 통일주체국민회의가 뽑는 6년 임기의 대선엔 박정희 대통령의 재출마가 당연시됐다. 여기에 도전할 사람은 없었다. 나는 상상으로도 그럴 생각이 없었다. 그런데도 박 대통령은 무슨 마음에선지 나를 계속 견제했다. 김재규 중앙정보부장이 2월 어느 날 나를 찾아왔다. 김재규는 잔뜩 굳은 표정으로 자못 비장하게 말했다. “각하, 중앙정보부를 각하께서 창설하셨지만 정보부의 기본 임무가 달라졌습니다.” 김재규는 나를 부를 때 ‘각하’ 혹은 ‘총리 각하’라는 호칭을 썼다. 내가 “각하는 대통령 한 분밖에 안 계시는데 각하라고 하지 말라”고 해도 그는 “입에 오랫동안 붙어서 그러니 받아달라”며 말을 이어갔다. 그때 김재규의 발언이 워낙 충격적이어서 지금까지도 대화 내용이 머릿속에 생생히 들어 있다.

[김종필의 '소이부답'] <66> 김재규의 과잉 충성
정치에 염증 느낀 JP “떠나겠습니다”
박정희 “안 돼, 부여서 출마해”



 ▶김재규=“이승만 박사가 여든 세 살이 넘으셨어도 정정하게 대통령직을 수행하셨습니다. 중앙정보부는 박정희 대통령을 종신 대통령으로 모시는 임무에 모든 기능과 자원을 집중하기로 했습니다.”



 ▶나=“대단한 임무로구려. 도대체 정보부가 그런 일을 하는데요?”



 ▶김재규=“그러니까 중앙정보부의 창설자인 각하께 기본 임무가 달라졌다는 얘기를 하러 온 겁니다.”



 ▶나=“앞으로 종신 대통령 얘기 나올 때 딴소리하지 말라고 날 협박하러 온 거요?”



 김재규는 부인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이제 지위고하, 수하(誰何)를 막론하고 정보부의 기본 임무에 저촉되는 자는 취체(取締·단속) 대상이 됩니다.”



1978년 1월 대만을 방문한 김재규 정보부장(왼쪽)과 김계원 주대만 대사. 그해 12월 김계원은 청와대 비서실장에 임명된다. [중앙포토]
 내가 “정보부의 기본 임무 변경이 박 대통령의 지시냐”고 물으니 그는 “그렇지 않습니다. 제가 발상한 겁니다”라고 답했다. 참 기가 막힌 세상이었다. 정상적인 생각과 판단력을 가지고는 내놓을 수 없는 말을 이 사람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정보부의 기본 임무는 국가가 필요한 정보를 수집·분석·해석해 작성·배포하는 일이라고 법에 규정돼 있는데 그걸 정보부장이 맘대로 바꿨다는 얘기다.



 그래서 나는 “염려하지 마시오. 거기 하는 일에 반대도 않고 찬성도 않고 그냥 보기만 할 겁니다”고 대답해줬다. 박 대통령을 종신으로 모시겠다던 김재규가 나중에 민주주의 운운하면서 대통령을 향해 총부리를 겨눴으니 도대체 자기가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녔는지 기억이나 할까 궁금할 따름이다.



 그 10년 전인 1968년 벌어졌던 이른바 ‘국민복지회 사건’과 정계 은퇴가 떠오른다. 그때도 중앙정보부장이었던 김형욱이 정치공작을 벌였다. 내가 마치 박 대통령의 재선이 끝나는 71년을 향해 대권 욕심을 부리고 있다고 덮어씌우려 했다. 나와 가까운 김용태 의원이 국민복지회라는 조직을 만들어 일을 꾸미고 있다는 투서가 출발이었다. 그 투서도 박 대통령이 어디선가 받아 김형욱 정보부장한테 건넸다. 나는 대통령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민주공화당 의장뿐 아니라 국회의원직을 포함한 모든 공직을 버렸다.



 78년 상황은 놀랍도록 68년과 비슷했다. 김재규 정보부장은 박 대통령이 던져준 투서를 바탕으로 내가 78년 대권을 탐내고 있는 증거를 잡으려고 했다. 이게 실패하자 김 부장은 나를 직접 찾아와 ‘행여 딴마음을 품지 말라’고 협박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대통령의 의심에서 벗어나기 위해 또 한 번 정계를 떠나야겠다는 결심을 다져 갔다.







 78년 초여름, 청와대에 올라갔더니 박 대통령이 느닷없이 “해운대에 무슨 집을 지었어?”라고 물었다. 어디서 돈이라도 받아 호화 부동산을 산 게 아니냐는 식의 힐난조였다. 내가 “거 누가 그런 소리를 합니까. 해운대에 제가 무슨 집을 짓습니까”라고 되받았다. 대통령은 “그래? 없으면 그만이지 뭐…”라고 말꼬리를 흐렸다. 도대체 어떤 자가 그런 터무니없는 얘기를 대통령 귀에 입력시켰는지 알아봤다. 차지철 경호실장 밑에 있던 정보팀이 지어 올린 얘기였다. 정보팀은 이규광 전 헌병감(육사 3기)이 지휘했다. 김재규와 차지철은 경쟁하듯 나를 무슨 역모라도 꾸미는 사람으로 만들어 자꾸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대통령으로부터 나를 의심하는 말씀을 직접 듣게 되자 정치에 만정이 떨어졌다. 나는 유정회 의원이었지만 내가 회장으로 있는 한·일의원연맹 외의 정치적 사안엔 일절 간여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서울을 떠나 있으려 했다. 충남 서산목장에 자주 머물렀다. 이렇게 18년 권력은 종막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었다.



 그런 가운데 7월 6일 박 대통령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총회에서 유신 2기, 제9대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대의원 2578명 중 2577명의 찬성을 받았다. 김재규의 중앙정보부가 물샐 틈 없이 대의원들을 챙기고 단속한 결과였다.



1979년 3월 15일 제10대 국회 개원식에 참석하기 위해 여의도 의사당에 등원하는 김종필 ·박종규·오치성 의원(왼쪽부터). [사진 김종필 전 총리 비서실]
 정가의 관심은 12월 12일로 예정된 국회의원 선거로 옮겨 갔다. 그해 8월 서울 플라자호텔에서 열린 한·일의원연맹 간사장 회의를 마치고 기자 간담회를 하던 중 “12월에 있을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지역구에 출마하느냐”는 질문이 나왔다. 나는 평소 가슴에 쌓여 있던 얘기를 털어놨다. “지역구요? 그런 생각 해본 적이 추호도 없다. 나는 내가 앉을 수 있는 자리는 다 앉아 봤다. 이제 커가는 사람들이 중요한 자리를 맡아야 한다. 68년에도 정치를 떠난 일이 있었는데… 이제 진짜 정계를 떠날 때가 왔다. 모든 걸 청산할 생각이다.”



 이틀 뒤 박 대통령이 나를 불렀다. 대통령은 내 생각을 뻔히 알고 있으면서도 “이번 총선에 부여에서 출마하라”고 권했다. 부여는 둘째 종익 형님이 현역으로 활동하고 있는 지역구였다. 나는 “직접 말씀드리려 했는데 이제 저를 정계에서 좀 물러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씀드렸다. 대통령은 대뜸 화를 내며 언성을 높였다. “나는 이거 뭐 하고 싶어서 하는 줄 알아?” 박 대통령은 내가 당신의 대통령 출마와 당선을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오해한 듯했다. “다른 뜻은 없습니다. 각하께서 저를 짐으로 여기시는 것 같습니다. 이만하면 슬하를 떠나도 괜찮지 않을까 싶습니다. 제가 빠지면 막혔던 일도 트일 겁니다.” 그러자 대통령은 “안 돼! 부여에서 출마해!”라고 고함을 쳤다.



 그러고 3개월이 지난 11월 초, 일본을 다녀온 결과를 보고하러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박 대통령은 “지난번에 얘기했던 부여 출마 생각해 봤어? 마음에 안 들면 종로에서 나오면 어때?” 대통령의 권유는 집요했다. 내가 빠져나갈 길을 막고 있었다. 그날 밤 공화당의 길전식 사무총장이 청구동 우리 집을 찾아와 대통령의 뜻이라며 재차 지역구 출마를 종용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충남 부여-서천-보령 지역구 의원으로 복귀했다. 10대 총선에서 내가 얻은 표는 8명 후보자 가운데 13만4000여 표(득표율 66.7%)였다. 유신 국회의원 선거는 중선거구제로 한 지역에서 2명을 선출했다. 전국적으로 정당 득표율은 신민당이 32.8%로 공화당(31.7%)보다 1.1% 앞섰다. 유권자가 국회의석의 3분의 1(77석)을 대통령이 유정회 의원으로 임명하는 것을 의식해 야당에 우호적으로 투표했다는 점을 감안해도 집권당 입장에선 큰 타격이었다.



 1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 대통령은 총동원령을 내렸다. 지역 주민의 지지를 많이 받을 수 있는 후보를 징발하듯 뽑아 지역구에 출마시켰다. 유신체제에 대한 도전이 국내외적으로 거세지고 있었기에 선거 압승으로 민주적 정통성을 증명하고 싶어 했다. 그때 대통령이 관심을 갖고 공천한 사람이 육영수 여사 피격사건으로 74년 경호실장에서 물러난 박종규(마산-진해-창원)였다. 김대중 납치사건으로 73년 중앙정보부장에서 쫓겨난 이후락(울산)은 공화당 입당이 불허됐다. 하지만 박 대통령은 그의 무소속 출마를 묵인했다. 세간에선 박 대통령 주변 인사들 중 누가 최고 득표율을 얻는가에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최고 득표율은 국회에서 여당 항명사건으로 해임안이 통과돼 71년 내무부 장관에서 내려온 오치성(연천-포천-가평-양평)이 기록한 70.7%였다.



 박 대통령이 이들의 출마를 종용하거나 묵인했던 건 당신의 주변을 떠난 사람들에게 자기의 길을 가도록 열어준다는 의미가 있었다. 그들이 가고 싶은 길을 가게 해야 딴마음을 품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박 대통령은 과거 실력자 행세를 했던 사람들은 관리 가능한 권력의 울타리 안에 두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무 가까이 있는 부담 때문에 떠나보냈지만 그렇다고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도 안 된다는 건 박 대통령의 독특한 권력 운용 방식이었다. 미국으로 망명해 대통령을 배신하고 곤혹스럽게 했던 김형욱(63~69년 중앙정보부장) 같은 사람이 더 이상 나오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 인물 소사전 길전식(吉典植·1924~ 2011년)=연희대(현 연세대)를 졸업하고 육사(8기)에 들어갔다. 육군 방첩부대에서 근무하던 중 5·16에 가담한 뒤 김종필(JP) 전 총리가 주도한 민주공화당 창당에 참여했다. 고향인 전남 장흥에서 내리 5선(6~10대)을 지냈다. 1971년 이른바 ‘10·2 항명 파동’으로 반JP 4인방(김성곤·길재호·백남억·김진만)이 퇴조한 뒤 79년 10·26까지 8년간 공화당 사무총장을 지냈다. 청와대의 지침을 받아 당무·자금·공천을 주물렀지만 정치색은 옅었다. 80년 정치규제 대상이 되자 정계를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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