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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배, 그것도 운명 … 힘들게 바둑 두니 인생이 재미있다

한·일 바둑의 살아 있는 전설 조치훈(59) 9단. 지난 26일 그가 민얼굴을 드러냈다. 과묵하고 결연하던 과거의 그가 아니었다. 조훈현 9단과의 기념 대국이 어이없는 시간패로 끝났는데도 그는 승부사의 자괴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바둑이 약해지니 사람이 훌륭해졌다”며 덤덤해했고, 진행자가 유머감각을 칭찬하자 “(나를) 연예계에 소개해달라”고 한 술 더 떴다. 대국 상대였던 조훈현 9단은 물론 후배 유창혁·이세돌 기사 등과 훈훈한 미소를 주고받으며 복기(復碁)와 인터뷰를 하는 장면은 가슴이 찡할 정도였다. 1986년 전치 25주의 교통사고를 당하자 휠체어에 앉아 대국한 차가운 승부사의 내면에는 따듯하고 정감 넘치는 한국인이 들어 있었다.

  그를 따로 만났다. 노래방까지 이어진 술자리. 그는 바둑과 인생을 털어놓았다.

일본으로 바둑 유학을 떠나 당시 세계 최강이었던 일본 바둑을 평정한 조치훈 9단. 그는 “인생은 너무 짧다. 그냥 스쳐 지나가는 것 같다. 죽기 전에 꼭 한번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다”고 말했다. [사진 한국기원]
 - 시간패 승부가 나리라고는 예상 못했다.

 “괜찮다. 그것도 운명이다.”

 - 한국에 오면 소감이 남다른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어 기분이 진짜 좋다. 한국팬들이 좋아해 줘서 너무 행복하다. 한국팬들 앞에서 얘기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셔서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이다.”

 - 한국은 어떤 곳인가.

 “여섯 살에 한국을 떠나 지금까지 일본에 살고 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한국 생각이 난다. 일본에 사니까 오히려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 큰 것 같다. ”

 - 생각보다 한국말을 잘한다.

 “ 한국말로 전하고 싶은 가슴속의 말들이 정말 많다. 하지만 한국말을 잘 못하니 마음대로 잘되지 않는다. 부끄럽다.”

 - 한국어 공부를 따로 하나.

 “예전에는 한국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서 한국어 공부를 했다. 그런데 최근 한·일 관계가 나빠진 이후로 TV에서도 한국 드라마가 사라졌다. 참 섭섭하다.”

 - 일상생활에서도 불편을 느낄 정도인가.

 “몇 년 전 드라마 ‘겨울연가’로 욘사마(배용준)가 큰 인기를 누릴 때는 한국인이라고 하면 일본 사람들이 모두 좋아했다. 하지만 지금은 한국인이라고 하면 다 싫어하는 것 같다. 최근에는 우리 집에 걸린 ‘조치훈’이라는 한국 이름 명패를 보고 돌을 던진 사람도 있었다. ”

1962년 6살이던 조치훈이 숙부 조남철 9단(오른쪽)과 함께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는 모습. [중앙포토]
 - 당신에게 바둑이란.

 “만약 바둑이 없었다면 내 인생은 오히려 행복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인생이 행복하기만 하면 사는 게 재미없었을 것 같다. 불행하고 힘들기 때문에 인생이 재미있는 것이다. 어렵고 힘든 바둑 때문에 내 인생은 재미있다. 그래서 나는 바둑을 둔다.”

 - 요즘도 바둑 공부를 하나.

 “시합이 있는 목요일을 제외하고 매일 오후 3시부터 자정까지 밥 먹는 시간 빼면 8시간씩 연구한다. 과거 내 바둑이 강했을 때는 하루에 2시간도 채 공부를 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때보다 훨씬 더 많이 공부해도 실력이 다시 강해지지 않는다. ”

 - 그런데도 계속 공부하는 이유는.

 “나는 일본 기원에서 대국료를 받는다. 바둑을 이기든 지든 일본 기원에서 돈이 나온다. 형편없는 바둑을 뒀을 때는 돈 받기가 창피하다. 그래서 매일 공부한다. 공부한다는 사실 자체가 나 자신에게 중요하다.”

 - “목숨 걸고 바둑 둔다”는 말, 지금도 그런가.

 “그렇다.”

 - 바둑의 매력은.

 “바둑은 아무리 열심히 공부하고 또 공부를 해도 모르는 게 많다. 알면 알수록 알 수 없다는 점이 사람과 닮았다.”

 - 기대되는 한국 기사 한 명을 꼽는다면.

 “김지석 기사다. 인터넷에 김지석 기사의 기보가 올라오면 가장 먼저 챙겨 본다. 바둑 내용이 진짜 좋다. 같은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움을 느낀다. ”

 - 기억에 남는 다른 한국 기사는.

 “이창호 기사가 정말 바둑을 잘 뒀었는데 요즘에는 간단한 수도 실수를 많이 한다. 정말 눈물이 날 정도로 슬프다.”

 - 조훈현 9단과 오랜 라이벌로 알려져 있다.

 “라이벌이라기보다는 존경하는 선배다. 이번 대국을 앞두고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방법을 연구했다. 하지만 졌다. 선배에게 부러운 것이 있다면 형수와 사이가 진짜 좋다는 점이다. 내가 총각일 때 선배가 너무 형수를 챙기는 걸 보고 결혼하기 싫다고 말한 적도 있을 정도다. ”

 - 바둑 말고 좋아하는 다른 것은.

 “골프를 좋아한다. 사람들과 술을 마시고 노래 부르는 것도 좋아한다.”

 - 주량은 얼마나 되나.

 “마시다 쓰러질 때까지 마신다(조치훈 9단은 대국 후 술자리에서 사람들이 권하는 술잔을 사양하지 않고 모두 받아 마셨다). 쓰러지면 자고 일어나 또 마신다 ”

 - 좋아하는 한국 가수가 있나.

 “이미자·이선희·성시경이다. 셋 다 목소리가 너무 좋다. 이미자는 일본에 공연하러 왔을 때 만난 적이 있다. 이선희와 성시경은 아직 만나보지 못했다. 꼭 한 번 만나고 싶다.”

 - 요즘 고민이 있다면.

 “아내가 많이 아프다. 암 투병 중인데 병원에서 마지막을 보내고 싶지 않다고 해서 집에서 요양 중이다. 결혼해 40년 가까이 서로 사랑하며 살았는데 하루하루가 너무 마음 아프고 힘들다.”

 - 앞으로 계획은.

 “없다. 다만 죽기 전에 잠깐이라도 한국에서 살아보고 싶다.”

정아람 기자 aa@joongang.co.kr

◆조치훈 9단=1956년 부산생. 통산 71차례 타이틀 획득(일본 역대 최다). 대삼관(기성·명인·본인방 동시 보유) 통산 4회. 1987년 사상 첫 그랜드슬램(일본 7대 타이틀 제패) 달성. 기도상(棋道賞) 최우수기사상 9회, 슈사이상(秀哉賞) 8회 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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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