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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文산책] 勉菴 최익현의 고언 … 흥망은 총칼 아닌 조약으로

“옛날에 나라가 멸망한 것은 전쟁 때문이었는데, 오늘날 나라가 멸망하는 것은 계약 때문이다(古之滅國也以兵革, 今之滅國也以契約).”



구한말의 의병장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이 을사늑약 이후 의병 활동에 나서기 직전에 쓴 '팔도의 사민에게 널리 고함(布告八道士民)'이라는 글의 서두다. 최익현은 성리학을 공부하고 과거에 급제하여 호조 참판까지 지낸 전형적인 학자이자 문신이다. 그러나 격변하는 시대는 그를 책상에서 벗어나 직접 무기를 들고 투쟁의 최전선에 나서게 했다.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최익현은 도끼를 들고 광화문 앞에 나와 이 불평등한 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기요타카(黑田淸隆)의 목을 베라는 상소를 올렸다. 이후에도 그는 적신(賊臣) 처벌과 국정 쇄신을 요구하는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다. 그러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 조약을 성사시킨 이른바 을사오적(乙巳五賊)의 토죄(討罪)를 청하는 두 차례의 상소를 올린 다음 곧이어 직접 의병활동에 나선다.



이듬해 최익현은 전라도로 가서 낙안 군수를 지낸 임병찬(林炳瓚)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다. 그해 음력 윤4월 13일 태인의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출발한 최익현의 의병부대는 정읍, 순창, 곡성으로 진군하며 800여 명으로 불어났다. 그러나 곧 의병을 해산하라는 고종의 조서가 내렸고, 이 명령에 따라 일본군이 아닌 전라 감영의 진위대가 의병의 진격을 막았다.



최익현은 상대가 누구인지를 알고, 같은 동포끼리 싸울 수는 없다 하여 전투 중지 명령을 내렸다. 하지만 양측이 모두 그 명령을 듣지 않고 총격전을 벌였다. 의병은 흩어지고 최익현은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돼 일본군 헌병 사령부에 구금되었다. 4개월 후 다시 대마도로 압송돼 위수부 경비대에 갇혀 있다가 그곳에서 함께 갇힌 임병찬에게 유소(遺疏)를 구술하고 음력 11월 17일(양력 1907년 1월 1일) 순국했다.



이후 석방되어 돌아온 임병찬이 유소를 바치면서 전한 최익현의 마지막 모습은 이렇다. 대마도에 도착한 직후 일본인 장수가 갓을 벗기고 머리를 깎으려고 협박하자 최익현은 그를 꾸짖고 "목을 끊고 죽을지언정 머리를 깎고 살 수는 없다"며 단식을 감행했다. 곧 일본인 대장이 와서 사과하며 밥 먹기를 권했지만 "너희들이 주는 밥은 먹을 수 없다"며 단식을 계속했다. "음식 값은 대한에서 보내온 것"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3일 만에 단식을 풀었다. 그러나 이미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데다가 풍증(風症)까지 겹쳐서 결국 그곳에서 사망했다.



19세기의 조선은 국제사회에서 참으로 무력한 나라였다. ‘무지’라고 말하기조차 민망할 정도로 청나라와 일본 이외의 다른 나라에 대해서는 존재조차 생각하지 않은 것 같기도 하다. 아편전쟁 이후 서구 세력에 잠식당하는 청나라를 보면서 국제 판도를 파악하고 대처할 방법을 모색하는 대신 나라의 빗장을 걸어 잠그는 쇄국의 길을 택해 스스로를 세계사에서 열외 시킨 나라가 조선이었다. 그 결과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사이에 국가의 모든 이권이 외국으로 넘어가고 내정의 자주권을 잃고 외교권까지 넘겨주었으며 결국에는 나라를 통째로 빼앗기고 36년의 식민 지배를 받게 된 것이다. 그것이 전쟁 아닌 조약으로 망한 나라의 말로였다.



지금도 잠깐만 방심하면 누가 어떤 조약으로 우리의 무엇을 빼앗아갈지 모르는 상황 속에 있다. 경제적으로도 외국 자본이 이미 깊숙하게 이 땅에 발을 들여놓았고, 동시에 우리 기업들도 해외에 많이 나가 있다. 총칼이 아니라 조약으로 우리 국부를 지켜야 하는 시대다. ‘오늘날은 조약 때문에 나라가 망한다’던 100년 전 면암의 외침이 새삼 마음에 와닿는 오늘이다.



김성재 한국고전번역원 역사문헌번역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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