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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의 차지철 경호실장 임명은 육영수 유작이었다

1967년 4월 25일 춘천 공설운동장에서 열린 대선 유세에 참석한 김종필 공화당 의장(왼쪽)과 박정희 대통령, 육영수 여사. 박 대통령에게 육 여사가 말을 건네고 있다. 육 여사는 앞서 4월 17일 대전 유세 땐 몰래 청중 틈에 끼여 있다가 주위 학생들에게 발견돼 사인공세를 받기도 했다. 이때 장내 소란으로 연설이 3분간 중단되자 박 대통령은 엄민영 내무장관에게 “유세방해죄로 집사람을 고발해야겠다”고 농담했다. [중앙포토]


고(故) 육영수 여사의 영결식이 열린 1974년 8월 19일, 전국이 비통함으로 무겁게 가라앉았다. 염천(炎天) 무더위에도 200만 인파가 육 여사의 마지막 가는 길을 지켜보기 위해 중앙청 영결식장에서 동작동 국립묘지에 이르는 연도를 가득 메웠다. 흰 소복을 입은 부녀자와 가슴에 검은 상장을 단 노인들이 흐느끼며 애통해했다. 박정희 대통령은 청와대 정문 앞에서 육 여사에게 마지막 작별을 고했다. 노란색과 흰색 국화로 덮인 영구차를 어루만지는 대통령의 모습이 사진으로 전해져 국민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

[김종필 증언록 '소이부답'] <60> 영원한 퍼스트레이디 육영수 ② 박종규 문책과 차지철 발탁



 8월 20일, 8·15 저격사건에 책임을 지고 박종규(1930~85) 청와대 경호실장이 물러난다. 61년 5·16혁명 이후 13년 동안 박 대통령 곁을 그림자처럼 지켜온 ‘피스톨 박’ 박종규의 시대가 저물었다.



 박종규와 나의 인연은 1949년 6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육사를 8기로 졸업하고 육군본부 정보국 전투정보과에 배속됐다. 숙군(肅軍)으로 군복을 벗은 박정희 소령이 문관(文官)으로 정보국에서 일하고 있던 때다. 박종규와의 첫 만남이 기억에 생생하다. 정보국 배치 다음날, 사무실 한 구석에서 이등중사 한 명이 큰 소리로 책을 읽고 있었다. “디스 이즈 어 맵(This is a map). 댓 이즈 어 데스크(That is a desk). 스프링 해즈 컴(Spring has come). 아이스 앤드 스노 멜티드 어웨이(Ice and snow melted away)….” 그 모습이 재미있었다. 다가가서 “귀관 이름이 뭐야”라고 물었더니 “박종규입니다”라고 했다. 내가 “영어공부를 열심히 하는 모양이다”라고 하자 그가 막 웃더니 “열심히 하는 걸로 보입니까? 영어를 하는 것이 장래에 좋을 듯해서 중학교 영어교과서를 좀 읽고 있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싹싹한 기질이 괜찮아 보였다.



1961년 6월 진해 육군대학 졸업식에 참석해 행사장을 걷고 있는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부의장(앞줄 오른쪽). 그 옆으로 차례로 부관 손영길 대위, 경호팀의 차지철 대위, 박종규 소령이다. [사진 국가기록포털]


 이듬해 6·25 전쟁이 터지고 육본이 부산으로 옮겨갔다. 전쟁 중 장교를 단기간에 양성하기 위해 부산에 육군종합학교가 세워졌다. 나는 일등중사로 승진한 박종규에게 “이 전쟁은 몇 년은 갈 거다. 장교가 돼야지, 사병으로 있으면 아무 것도 못한다. 종합학교에 들어가라”고 권했다. 박종규는 “장교? 난 하기 싫습니다. 이 전쟁 곧 끝납니다”라며 말을 듣지 않았다. 싫다는 그를 억지로 지프에 태우고 가 종합학교 5기로 입교시켜 장교로 만들었다.



 박종규는 나를 잘 따랐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럭비공 같았다. 내가 대위였던 박종규를 정보국 행정과 인사계장으로 데려다 놓은 지 얼마 안 됐을 때다. 개인적인 문제로 고민하던 그가 죽어버리겠다며 하필 우리 집 앞 우물에 풍덩 뛰어들었다. 아내 박영옥이 내게 전화로 급히 알려와 집에 가보니 박종규가 우물 속에서 양 다리를 쫙 벌린 채 두 발로 벽을 밀며 지탱하고 있었다. 우물에 뛰어들었다가 솟아올라오자 다시 빠지지 않으려고 다리로 버티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꺼내줄까? 그냥 빠져 죽을래?”라고 하니 꺼내달라고 사정했다. 나는 “뛰어들 땐 언제고 꺼내달라고 하느냐”고 나무란 뒤 망을 넣어서 구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번엔 박종규가 행방불명이 돼 찾을 수가 없었다. 육군 방첩대(CIC)에 부탁해 찾아봤더니 제주도에서 발견됐다. 그를 서울로 붙들어 와 왜 거기 갔느냐고 물으니 “일본으로 밀항하려고 했다”는 엉뚱한 대답을 내놨다. 나는 박종규의 인사 이동에 여러 번 힘을 써줬다. 전방부대로 가고 싶다기에 수소문해서 보내줬고, “영어를 좀 배워야겠으니 미군 부대에 보내달라”고 하기에 부평 미군부대에 파견장교로 가게 해줬다. 그 시절 박종규는 “나는 박정희 소장과 김종필 중령 이외는 사람으로 보지 않는다”는 소리를 하고 돌아다녔다.



 61년 5·16혁명 때 박종규가 맡은 임무는 장면 국무총리를 체포하는 일이었다. 박종규는 실행 하루 전에 미리 장면 총리 숙소인 반도호텔 8층을 답사했다. 혁명 당일 새벽 박종규는 공수단 중대장 6명을 이끌고 반도호텔을 급습했다. 하지만 이미 장 총리가 10분 전에 빠져나가 체포에 실패했다. 화가 난 박종규와 그 팀은 괜히 하늘에 대고 총질을 해대며 화풀이를 했다. 같은 시각 광명인쇄소에서 혁명공약문을 인쇄 중이던 나는 그 총소리를 듣고 무력충돌이 일어난 줄만 알고 바짝 긴장했다.



8대 총선을 앞둔 1971년 5월 8일 경기도 광주의 유세장에서 김종필 공화당 부총재(왼쪽)가 지역구에 출마한 차지철 의원을 소개하고 있다. [중앙포토]
 박종규는 최고회의 의장 경호대장과 청와대 경호실 차장을 거쳐 64년 경호실장에 오른다. 박 대통령은 그의 저돌성이 써먹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경호실장이 돼서도 술만 먹으면 호기를 부리는 버릇은 여전했다. 가끔 술에 취하면 “박정희! 내가 그냥 안 둔다”고 소리소리 지르기도 했다. 그런 짓을 한 다음날 새벽이면 정신이 든 박종규가 청와대 계단 밑에 쭈그리고 앉아 기다린다. 그의 전날 행각을 이미 보고 받은 박 대통령은 계단을 내려오면서 편한 아랫사람 대하듯 “술을 삼가든지, 좀 인간이 되든지 해라”라고 야단치곤 했다.



 대통령을 가까이서 모시는 박종규의 위세는 대단했다. 실세 중의 실세였던 이후락조차 박종규에겐 꼼짝하지 못했다. 수 틀리면 권총을 꺼내 들어 ‘피스톨 박’으로 불리던 박종규이다 보니 이후락도 건드리지 않은 것이다. 권력에 맛을 들이면서 박종규는 사람이 변해갔다. 그렇게 나를 따르고 좇아 다녔던 그도 경호실장에 오르더니 나와의 인연은 싹 잊어버렸다. 세상 무서운 게 없게 되니 제 눈에는 내가 더 이상 보이지 않은 것이다. 인심이 이렇게 달라지는 게 바로 세상이다. 오죽하면 일본 속담에 ‘사람을 보거든 우선 도둑이라고 생각하고 대하라’는 말이 있겠는가. 돈을 훔쳐가는 것만 도둑이 아니다. 마음을 훔쳐가는 것도 도둑이고, 그게 더 고약하다. 돈을 훔쳐 가는 건 한도가 있지만 마음을 훔치는 건 한도가 없기 때문이다.



 육 여사 피격사건으로 박종규를 경질한 박정희 대통령은 내게 “후임 경호실장으로 누가 좋을까?”라고 물으셨다. 나는 오정근 의원을 추천했다. 해병 출신인 오정근은 5·16혁명 때 해병여단 전차대대를 이끌고 혁명군 선두에 섰다. 정의감과 신념이 있는 것이 내 뇌리에 박혀 있었다.



그는 63년 해병 준장으로 예편한 뒤 유정회 국회의원을 하고 있었다. 나의 추천에 박 대통령도 “아, 좋군. 오정근을 시키지”라며 선뜻 동의했다. 대통령도 이미 오정근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날 오 의원에게 경호실장으로 일할 준비를 하라고 통보까지 했다.







 이튿날 아침, 청와대에서 호출이 와서 가니까 박 대통령이 “차지철이를 시키기로 했어”라며 말을 바꿨다. 뜻밖이었다. 내가 본 차지철은 그런 책임 있는 일을 맡길 인물이 못됐다. 나는 “그래요? 차지철을요?”라고만 대꾸하고 더 이상 말을 잇지 않았다. 도대체 누가 차지철을 추천했나. 내 머릿속엔 그 생각뿐이었다. 세상에 알려지기로는 박 대통령의 사위인 한병기 전 대사가 차지철을 후임으로 추천했다고 한다. 그런데 진짜 추천인은 따로 있었다. 바로 돌아가신 육영수 여사였다. 생전에 육 여사는 “차지철 의원 같은 고지식한 사람을 데리고 일해 보시라”고 대통령에게 권유했다.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효자로 알려졌고, 술·담배를 하지 않는 차지철을 착실하고 믿음직한 사람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아마도 육 여사는 차지철을 박 대통령 곁에 두면 대통령 주변의 스캔들을 막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을 것이다. 박 대통령은 나와 얘기를 나눈 그날 밤 육 여사가 없는 방에서 혼자 주무시다 밤새 생각이 달라졌다. 차 실장 임명은 육 여사가 남긴 유작(遺作)인 셈이다.



 차지철은 53년 정규 육사 12기 시험에 떨어지고 이듬해 포병 간부후보생이 됐다. 그는 공수단 대위로서 5·16혁명에 참여했다. 그는 박종규가 이끌던 장면 총리 체포조의 일원이었다. 혁명 성공 뒤엔 박정희 소장의 신변을 보호하는 경호부대(GT)에 있었다. GT 팀원이 몇 명 안 되다 보니 박정희 소장이 차지철의 얼굴을 익혔다. 63년 전국구의원(6대)으로 국회에 입성한 차지철은 지역구(광주-이천)에서 7, 8대 의원으로 당선됐다. 그가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책도 냈다는데 본인이 직접 쓴 것인지 의심하는 시각도 국회 주변에 있었다. 그는 69년 35세 나이로 의정 사상 최연소 국회 외무위원장에 올랐다. 차지철이 공부도 할 겸해서 외무위원장을 시켜달라고 부탁하자 박 대통령이 그렇게 해준 것이다. 외무위원장이 된 차지철은 중절모자를 쓰고 키높이 구두를 신은 채 영국신사처럼 차려입고 다녔는데 그 모습이 우스꽝스러웠다.



 육 여사의 서거는 뜻하지 않게 권력 내부의 질서를 바꿔 놓았다. 생각지도 않았던 차지철이 급부상한 것이다. 권력이 말기로 접어들자 묘한 경위로 인해 묘한 인물이 박 대통령 옆으로 온 것만 같다. 역사엔 가정이 없지만 그때 차지철이 아닌 오정근을 경호실장에 임명했다면 아마 10·26이란 비극은 없었을 것이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대통령 경호실장의 위상=박정희 대통령 시대의 경호실장은 홍종철·박종규·차지철 3명이었다. 총리실과 공화당을 제외한 4대 권력기관은 청와대 경호실과 중앙정보부, 수도경비사령부와 보안사령부였다. ‘디바이드 앤드 룰(분할통치)’을 썼던 박 대통령은 이 권력기관들이 상호 견제·경쟁토록 해 균형을 유지했다. 1972년 유신 이후 윤필용 사건과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퇴진을 거치면서 수경사와 보안사의 위상은 약화됐다. 박 대통령 말년엔 경호실장(차지철)과 중앙정보부장(김재규)이 권력의 양 축으로 압축됐다.



● 인물 소사전 오정근(1929~82)=해병간부후보생(해간 3기) 출신으로 해병대 중령 시절 5·16에 가담했다. 5·16 당일 새벽 김포 해병 제1여단(여단장 김윤근)의 선봉에 서 한강 인도교를 돌파, 거사 성공에 공을 세웠다. 이후 최고회의 위원에 올랐고, 63년 해병 준장으로 예편했다. 초대 수산청장과 수산개발공사 사장, 2대 국세청장을 차례로 역임했다. 유신정우회 소속으로 9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대한체육회 부회장으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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