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뻥 뚫린 국립극장 … 문세광, 허리춤에 권총 숨긴 채 입장 … “흉탄 맞은 육영수 여사 절명” 박정희는 엉엉 통곡했다

따가운 봄 햇살을 가리기 위해 JP가 공화당보를 접어 고깔모자를 만들었다. JP가 “예쁘시네요”라고 하자 육 여사가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이날 육 여사는 평소처럼 흰 치마저고리를 입고 박정희 대통령과 함께 유세장에 왔다. [중앙포토, 자료사진 동아일보]

이상하리만큼 싯누런 구름이 잔뜩 낀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나는 충남 서산의 삼화목장에 내려가 있었다. 박정희 대통령이 “별일 없을 테니 총리는 며칠 쉬고 오라”고 하셔서 휴가를 보내던 중이었다. 서울 장충동 국립극장에서 열린 제29주년 광복절 기념식이 TV로 중계됐다. 오전 10시23분 박 대통령이 기념사 중 “조국 통일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대목을 읽어 내려가던 순간이었다. 갑자기 “탕, 탕”하는 총소리가 나더니 중계 화면이 깜깜해졌다. TV를 지켜보던 나는 ‘어이쿠, 일이 났구나’ 싶었다.

 초초하게 기다리는데 10시40분쯤 국무총리 정보비서실에서 전화가 왔다. 기념식 중 총격이 있었고, 대통령은 무사하지만 영부인이 총에 맞아 서울대병원에 실려 갔으니 빨리 상경하시라고 했다. 궂은 날씨로 헬리콥터가 뜨기 어려웠다. 자동차로 비포장도로를 거쳐 올라오느라 오후 4시가 넘어서야 병원에 도착했다. 육영수 여사는 조총련계 재일교포 문세광의 총탄에 맞아 머리에 관통상을 입었다. 병원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돌이키기 어려운 상태였지만, 어떻게든 살려보려고 5시간 넘게 수술을 했다. 병원에서 육 여사가 깨어나길 기다리던 박 대통령을 대신해서 나는 그날 저녁 경복궁 경회루에서 열린 광복절 경축연을 주재했다. 뒤숭숭한 분위기 속에서 내빈들과 악수를 나눈 뒤 청와대로 올라갔다.

1971년 4월 15일 7대 대통령 선거 유세를 벌인 춘천 공설운동장에서 김종필 공화당 부총재가 고깔모자를 육영수 여사에게 씌워주고 있다.
 병원에서 돌아온 박 대통령은 청와대 2층에 서서 해 질 녘의 서울 시내를 내려다보며 조용히 흐르는 눈물을 닦고 있었다.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아 위로의 말도 건넬 수가 없었다. 아무 말 없이 뒤에 서 있는데 보고가 들어왔다. 오후 7시, 육 여사가 운명(殞命)하셨다는 소식이었다. 그 소식에 박 대통령이 엉엉 큰소리 내어 울기 시작했다. 가슴 저 밑바닥에서 터져 나오는 통곡이었다. 강인하고 속이 깊은 박 대통령이 그렇게 슬피 우는 모습은 처음 봤다.

 박 대통령과 육 여사, 두 분은 사이좋은 부부였다. 육 여사는 결혼생활 24년간 한결같이 남편을 잘 받들고 섬기는 모습을 보였다. 그분도 남편 때문에 속상한 일이 없진 않았겠지만 겉으로 그런 기색을 드러낸 적이 없었다. 늘 자상하게 남편을 보필한 헌신적인 내조자였다. 사회의 불우한 이들에겐 따뜻한 봉사의 손길을 내밀었다. 육 여사가 만든 사회봉사단체 양지회(陽地會)는 전국에 흩어져 있는 나환자촌 지원의 대명사였다. 이런 일들로 국민들에게 퍼스트레이디란 어떤 역할을 하는 사람인지를 처음으로 알린 분이었다.

 육 여사는 내게는 처숙모가 된다. 우리 부부는 신혼 초인 1951년 대구에서 박 대통령 내외와 같은 집에 살았다. 안방과 윗방은 박 대통령 부부가 쓰고, 대청 건넌방을 나와 아내가 썼다. 아내가 큰딸 예리를 가졌을 때다. 배가 불러 몸이 무거워지는 아내를 육 여사가 살뜰히 보살펴줬다. 나는 그해 9월 만삭이던 아내를 두고 미국 보병학교로 유학을 떠났는데, 아내 곁에 육 여사가 있어서 안심할 수 있었다. 박 대통령이 취임한 뒤엔 청와대에 들어갈 때마다 나는 육 여사를 만나 인사를 드렸다. 청와대 1층에 내려와 계시지 않으면 2층 내실로 올라가서 꼭 안부를 여쭸다. 그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장면이 있다. 71년 4월 대통령 선거 유세 때인데, 태양이 단상 정면에 떠 있어서 눈이 부셨다. 나는 당에서 나눠준 민주공화당보를 접어 햇볕 가리개로 고깔모자를 만들어서 육 여사 머리에 씌워드렸다. 내가 “아, 예쁘시네요”라고 하자, 그가 소녀처럼 환하게 웃었다.

 돌이켜보면 불길한 징조라고도 할 만한 작은 소동도 떠오른다. 70년대 초반 어느 날 전방부대에서 사슴 한 마리를 총으로 쏴 잡았다. 그 사단장은 사슴 고기가 대통령께 좋을 거라고 생각해 그 사슴을 새벽녘에 청와대로 올려 보냈다. 청와대에서 지내던 육 여사의 모친 이경령 여사는 매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청와대 경내를 한 바퀴 도는 게 일과였다. 그날도 청와대를 빙 돌아서 정문 앞을 지나가려는데 들것에 뭔가가 실려 와서 보니 죽은 사슴이었다. 깜짝 놀란 육 여사 모친이 “아이고머니야!”라며 비명을 질렀다. 그리고 “아니, 이걸 왜 여기 가져오느냐. 당장 가지고 나가라”고 호통을 쳤다고 한다. 전방의 사단장이 대통령께 보내는 사슴이라고 했지만 “안 된다. 불길하다”며 기어이 내쫓았다. 나중에 이 일을 전해 들은 육 여사는 “어머니, 그거 잘하셨다”고 했다. 육 여사가 돌아가시기 2년쯤 전의 일이다.

 육 여사가 피격 당한 국립극장의 경호체계는 구멍이 뻥 뚫려 있었다. 그때는 김포공항에도 금속탐지기가 없었다. 비표도 없이 로비로 들어오는 문세광을 어느 누구도 검문검색하지 않았다. 로비에서 마주친 경찰들은 일본어를 쓰는 그를 초청인사라고 보고 몸수색 없이 통과시켰다. 문세광은 허리춤에 숨긴 권총을 아무에게도 들키지 않은 채 식장에 들어와 앉았다. 나중에 경호원들은 그해 3·1절 행사 때 과도한 경호로 외국 대사 부인들의 원성을 샀다는 육 여사의 지적 때문에 소극적으로 검색했다는 변명을 내놨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나 싶을 정도로 그날의 경호는 허술하기 그지없었다.

1974년 8월 21일 육영수 여사의 동작동 현충원 묘소를 찾아 참배하는 박정희 대통령 가족. 왼쪽부터 육인수(육 여사의 오빠), 박근영, 박 대통령, 박근혜, 박지만, 이경령 여사(육 여사 어머니). [중앙포토]

 기념식이 시작되고 얼마 뒤, 뒤편에 앉아 있던 문세광이 38구경 스미스 앤드 웨슨 권총을 꺼내 들고 통로로 튀어나왔다. 그는 앞으로 뛰어가면서 총을 쐈고, 그 총알이 박 대통령의 연설대 왼쪽에 박혔다. 박 대통령이 순간적으로 방탄 연설대 뒤로 몸을 낮췄다. 더 뛰어나가려던 문세광이 발에 걸려 넘어지면서 오발한 총탄이 육 여사 쪽으로 날아갔다. 문세광을 발견하고 대통령을 지키기 위해 권총을 뽑아 들고 뛰쳐나온 사람은 박종규 경호실장이었다. 박종규는 연설대 앞으로 뛰어나가서 권총으로 응사했다. 하지만 단상으로 집중된 조명 때문에 눈이 부셔서 관객석 쪽이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디에 쏘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총을 쐈다. 이 와중에 불행히도 관객석에 앉아 있던 한 여고생이 총에 맞아 숨졌다. 단상에 있던 육군 대장 출신 정일권 국회의장은 총소리가 나자 바닥에 엎드린 채 피격된 육 여사 뒤쪽으로 피신했다. 이런 위기 때 4성장군이 취한 태도는 우리의 입맛을 씁쓸하게 한다.



1974년 11월 20일 서울고법 항소심 선고공판의 문세광. 내란 목적 살인 등의 혐의로 사형을 언도 받고, 그해 12월 형이 집행됐다. [중앙포토]
 육영수 여사 장례식은 5일장인 국민장으로 치러졌다. 8월 19일 오전 중앙청 앞 광장에서 박근혜·근영·지만 세 자녀와 3부 요인, 각계 인사, 외국 조문사절 등 2900명이 참석한 가운데 영결식이 엄수됐다. 장의위원장을 맡은 나는 직접 쓴 조사(弔辭)를 읽어 내려갔다. “8월의 염천(炎天), 하늘에선 불볕이 내려쬐는데 땅 위는 비탄(悲嘆)과 무상(無常)이 무겁게 가라앉아 형용할 수도 없는 적막이 깃들이고 있습니다.…영부인께서는 큰일에서 작은 일에 이르기까지 실로 완벽하다 하리만치 자상하고 주밀(周密)하게 보살펴 주심으로써, 전형적이며 격조 높은 한국의 모상(母像)을 의연하게 부각해 오셨습니다.” 조사를 읽어 가면서 내 가슴은 미어지는 듯했고, 추모 인파 곳곳에서 울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육 여사 피격 사건은 한·일 관계에 어두움을 던졌다. 8월 22일 총리인 나는 사건의 배후 규명을 요청하는 친서를 다나카 일본 총리에게 보냈다. 문세광은 일본의 경찰 파출소에서 훔친 권총으로 육 여사를 쐈다. 9월 19일 일본 정부는 자민당 부총재인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郎) 특사를 진사사절로 서울에 파견, 다나카 총리의 친서를 박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청와대를 나온 시나 특사는 총리실로 나를 찾아왔다. 나는 그에게 이번 사건이 일본 정부의 책임임을 강조하면서 재일 조총련의 활동을 규제해줄 것을 요청했다. 문세광은 재판을 받았고 그해 12월 20일 사형이 집행됐다. 문세광이 김일성의 지시로 박 대통령을 시해하려 했다는 것은 불문가지(不問可知)다. 한국의 최고 지도자를 시해하는 것은 어떤 상황이라 해도 김일성의 직접 지시가 없이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양지회(陽地會)=정부 장·차관 부인과 국영 기업체장 부인, 군 장성 부인들로 구성된 봉사단체. 육영수 여사가 주도해 1963년 결성했다. 재해민 구호와 전방 국군 위문, 고아원과 양로원 돕기 등 자선사업을 활발히 펼쳤다. 매년 자선 바자회를 개최하고 벽지·낙도 학교에 어린이 문고를 무료로 나눠주는 활동도 벌였다. 육 여사는 양지회원들과 함께 전국 77곳의 나환자촌을 일일이 찾아다녔다. 초기엔 육 여사가 회장이었지만 66년부터 국무총리 부인이 회장을 맡고 육 여사는 명예회장으로 활동했다. 김종필 국무총리 재임 시절(71~75년)엔 부인 박영옥 여사가 양지회 회장을 맡아 육 여사 서거 뒤에도 양지회를 이끌었다.

◆조총련(朝總聯)=대한민국을 지지하는 민단(民團·재일본대한민국민단)에 대해 북한을 지지하는 제일동포 단체로 ‘조선인총연합회’의 약자다. 1955년 한덕수의 주도로 결성, 도쿄에 중앙본부를 두고 일본 전역에 하부 조직을 만들었다. 한덕수는 뒤에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된 김일성의 측근으로 2001년 사망할 때까지 46년간 조총련을 이끌었다. 현재 조총련 의장은 서만술씨. 조총련은 일본과 국교가 없는 북한의 사실상 공관 역할, 북한에 대한 경제적·물질적 지원 및 친북 재일동포에 대한 교육사업을 수행하고 있으며 한국에 대한 북한 공작원의 우회 침투와 간접적인 대남공작의 거점 역할도 했다.


● 인물 소사전 시나 에쓰사부로(椎名悅三郎·1898~1979)= 1965년 6월 22일 일본 도쿄에서 체결된 한·일 국교 정상화 협정의 일본 측 서명자. 시나는 당시 외상이었고 한국 측 서명자는 이동원 외무장관이었다. 대일굴욕외교 반대시위 속에 65년 2월 일본 각료로선 해방 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다. “양국 간 불행한 시간이 있었음은 유감스러운 일로서 깊이 반성한다”는 도착 성명을 발표했으며 한·일 협상의 난제였던 구조약(1910년 강제합병 당시 조약들)의 무효 시점(“이미 무효”) 등을 합의했다. 59년 관방장관 이래 외무대신, 통상산업대신을 지냈고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총리가 등장한 72년부터 76년까지 자민당 부총재였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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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