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Load Image preLoad Image
검색 바로가기
주메뉴 바로가기
주요 기사 바로가기
다른 기사, 광고영역 바로가기
중앙일보 사이트맵 바로가기
닫기
닫기

작은 골목에서 문득 느끼는 평화 그래서 여행을 갑니다

여행지에선 늘 허덕인다. 계획을 잔뜩 세워놓고 쫓겨다닌다. 꼭 봐야 하고, 꼭 먹어봐야 한다는 무엇을 찾기에 바쁘다. 이런 내가 여행기를 쓴다면 ‘이제껏 본 적 없는 멋진 풍광’에 ‘처음 먹어보는 황홀한 맛’이 있는 그 땅에서 ‘사람‘은 찾아보기 힘들 수도 있다.

출간 동시 베스트셀러 진입 … 여행산문 『내 옆에 있는 사람』의 이병률

이 사람은 반대다. 소위 ‘베스트셀러 여행작가’인 그가 찾아간 낯선 땅의 그림 같은 풍경들은 좀체 말이 없다. 말을 하는 것은 그 속의 사람들 또는 사랑의 기억들이다. 처음 만난 사람들도 그에겐 금방 속을 털어놓는다. 만화 ‘심야식당’의 마스터처럼 사람 마음을 터놓게 하는 묘한 재주가 있는 걸까. 그가 먼저 사람을 사랑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이병률(48) 시인의 세 번째 여행 산문집 『내 옆에 있는 사람』도 그렇게 사람을, 사랑을 이야기한다.


시인의 여행기엔 많은 게 없다. 낯선 지명의 어딘가에 있지만 딱히 그곳이 목적지인지는 모르겠다. 그곳에 어떻게 가야하고, 무엇을 보고 먹어야 하는지 따위는 절대 가르쳐주지 않는다. 우리가 타인의 여행기에서 얻고 싶은 많은 것들을 그저 여백으로 비워둔 채, 그의 여행은 오직 감성으로 채워진다.

전작 『끌림』(2005)과 『바람이 분다 당신이 좋다』(2012)에서 60여 개 국을 돌며 흔히 만나기 어려운 이국적 풍광을 담았다면, 신간엔 이마저도 없다. 그저 대문만 나서면 볼 수 있을 법한 풀꽃들, 어제 저녁에도 본 듯한 노을, 언젠가 걸어본 듯한 산길···. 그리고 정말 내 옆에 있을 것 같은 사람들만 있다.

“도시의 뒷모습 전하고 싶어”
직업이 ‘시인’인 사람과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 좀 긴장했다. 물기가 뚝뚝 떨어지는 감수성 넘치는 문장이 자판기처럼 술술 나오는 40대 싱글남이라니, 혹시 말도 시처럼 하는 게 아닐까. 자신이 아주 좋아하는 공간이라는 서울 삼청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약속시간보다 30분 일찍 나타난 시인은 유쾌했다. 말수가 많진 않았지만 왠지 전부터 알던 사이 같은 편안함에 끝없이 수다를 떨고 싶어졌다. 그가 여행지에서 만난 많은 사람들처럼.

이번엔 국내편입니다.
“해외 여행만 여행이 아니잖아요. 다니면서 알게 된 친구들을 만나러 지방에서 술 약속을 잡기도 했죠. 그러다 보니 또 많은 인연들이 생겼더라구요.”

수록 사진 절반 이상을 필름 카메라로 찍었는데요.
“옛날 생각이 나서 들고 다녀봤어요. 느낌 자체가 다르거든요. 둔탁한 질감, 올드한 분위기 때문에 필름에 정이 많이 가요. 디지털 결과물을 바로 볼 때보다 필름이 맡겨지고 인화가 돼서 돌아오는 과정도 기쁨을 주죠. 애완동물 바라보는 기쁨이랄까.”

주요 관광지가 아니라 남들이 잘 안가는 곳을 찾아다니는 이유는요.
“저도 맛집도 가고 뮤지엄도 갑니다. 하지만 누구나 접근할 수 있는 열린 정보들은 제가 드려야할 몫은 아니죠. 저는 제가 본 도시의 뒷모습을 전하고 싶어요. 하나의 도시가 한 사람의 인상으로 가려져서 시장이고 뮤지엄이고 다 보이지 않는 상태. 그런 걸 그 도시를 기억하는 방법으로 좋아해요.”

여행기라기 보단 사람 이야기인데, 왜 굳이 여행을 가나요.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싶어서요. 낯선 사람 사이의 긴장감 같은, 그런 맛을 찾으러 가는 거죠. 저도 처음엔 내성적이었지만 맥주 한 잔 마시면서 용기 내서 옆 사람에게 말을 걸었어요. 그들은 뭐 하나라도 주려고 하더라고요. 그저 얘기 나누는 것만으로도 선물 받은 느낌이 들죠. 여행지를 결정짓는 건 결국 사람인 것 같아요. 사람만큼 영감을 주는 게 없거든요. 제가 정이 많아서 그런지 잠깐 만난 사람에게 정을 쉽게 주고, 그런 게 글의 재료가 되죠.”

‘심야식당’의 마스터처럼, 누구든 속내를 털어놓게 만드는 비결이라도 있나요.
“그는 어떤 식으로든 채워주는 사람이죠. 잠들기 전 비어있는 시간을 채워주고, 정신적 포만감까지 주는데, 저는 방송일을 오래 해서 구어체를 좋아해요. 여행 갔다 온 이야기를 쓰면 누구한테 들려주는 어투가 되는 거죠. 친구들끼리 잠들기 전에 맨발로 누워 듣는 재미난 이야기 느낌? 그러다 보니 저를 만나면 되게 달달할 것 같은데 생각과 다르다고 실망하는 분도 계세요(웃음). 하지만 모든 사람에게 달달하기만 하다면 오히려 무서운 사람 아닐까요.”

『내 옆에 있는 사람』중에서. 일상의 따뜻한 풍경을 필름 카메라에 가득 담았다.
국립 현대미술관 서울관에 설치된 레안드로 에를리치의‘대척점의 항구’ 앞에서
“여행길 열어준 신해철이 고마워”
그는 가장 바쁜 직업 중 하나인 방송작가 출신이다. DJ가 신해철, 유희열, 이소라로 이어지는 MBC ‘FM 음악도시’ 등 데일리 방송을 18년 동안 계속하면서 1년에 절반은 여행을 다녔고, 그렇게 100여 개 국을 돌았다. 도대체 어떻게 가능했을까. 열쇠는 고(故) 신해철이 쥐고 있었다.

“처음엔 눈치도 봤어요. ‘음악도시’할 때였는데, 인도에 가려고 잠깐 쉬겠다고 했죠. 그런데 신해철씨가 가서 원고를 보내라는 거예요. 너무 고마워서 가자마자 2~3일치씩 써 보냈죠. DJ의 원고를 쓰는 일은 그 사람을 좋아해야 가능한 일이거든요. 그는 제가 여행할 수 있도록 길을 열어준 사람이에요. 사실 그는 작가가 필요없는 DJ였죠. ‘고스트네이션’ 할 때는 심야방송이라 작가가 안 붙는다고 저한테 오프닝만 맡아 달라더군요. 딱 두 달만 도와주겠다, 당신은 혼자서도 충분하다고 했죠. 결국 같은 브랜드로 방송사를 옮겨 다니면서 방송한 유일한 DJ가 됐어요.”

방랑의 시작은 아주 어릴 때부터다. 밥을 안 먹어 삐쩍 곯은 아이였는데 유독 남의 집에 가면 밥을 먹었단다. 남의 집에서 먹는 다른 맛이 신기해서 그랬단다. 시골 할머니댁에 초등 3학년 때부터 혼자 다녔는데, 기차를 내리기까지 하염없이 창밖 풍경을 보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마냥 좋았다고.

“88년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자마자 후쿠오카에 갔어요. ‘바다는 어디입니까’‘이것은 얼마입니까’ 딱 두 마디만 외워 갔죠. 그때 처음 만난 일본인들은 정말 최선을 다해 살고 있더라고요. 길을 물으면 끝까지 알려주고, 목숨 걸고 라면 끓이고…거의 충격이었죠. 저 사람들은 어쩜 저럴까, 그 차이가 엄청 크게 느껴졌어요. 그 다름, 차이가 나를 어디로 이끌 것이라는 예감을 첫 여행 때 얻었죠. 자꾸 더 먼 곳으로 시선을 돌릴 수밖에 없었어요.

말이 안 통하는 나라도 많았을 텐데요.
“지구는 이미 여행자를 맞을 준비가 돼 있어요. 우리는 말이 안 통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지만 뭔가 필요할 거라는 것도 이미 알죠. 지구촌 누구라도 똑같아요. 그런 열린 상태에서 절도있는 보디랭귀지만 있으면 대부분 통하죠.”
‘절도있는 보디랭귀지’가 어떤 거냐 물으니 순간 기자의 손목을 ‘절도있게’ 덥석 잡고 자신의 이마에 갖다대는 시늉을 한다. 열이 나면 약국에 가서 그렇게 하란다.

특별한 계획도 세우지 않고 다니는데, 시간 낭비는 없나요.
“정해놔 버리면 틀이 생기니까요. 초보 여행자들은 하고 싶은 게 많겠죠. 하지만 기대치를 소화하느라 힘들지 않나요. 구멍을 좀 뚫어 놓으면 빈 곳은 문득문득 채워지죠. 사람이 없는 작은 골목에서 만나는 평화나 고즈넉함. 저는 이런 게 좋아요. 문득 맞닥뜨리게 되는 새로운 기류를 찾고 싶어 좁은 길을 갈지자로 걷는 거죠.”

여행과 사랑을 동의어처럼 쓰는데, 40대 후반 아저씨의 문장이 이토록 감수성 넘치다니요.
“제가 사랑의 감정이 많은 거 같아요. 사랑 없이도, 여행 없이도 못 살겠어요. 사랑할 때도 여행자처럼 사랑하죠. 혼자 있는 시간 속에 사랑의 감정을 잘 느껴요. 서로 사랑은 소모와 고통을 동반하는 거니까 웬만하면 혼자 컨트롤하고 지나가죠. 혼자 좋아하는 데도 두근거림이 있고, 살아있게 하는 힘이 되거든요.”

항상 혼자 다니면서 누군가를 그리워하는데, 누군가와 같이 다니고 싶다는 생각은 없나요.
“같이 다니면 서로 챙겨야 되잖아요. 배려를 잘하는 편인데도 여행지에선 힘들더군요. 백지의 상태에서 행복을 느끼려고 가는데, 그 안에 누군가 있다면 그 사람에게 맞춰줘야 하니까. 백지의 맛은 없는 것 같아요.”

끝없이 사랑을 얘기하고 사람을 소중히 한다면서 고독을 즐긴다니, 모순 아닌가요.
“아무리 혼자를 부르짖더라도 혼자서는 절대 살 수 없으니까요. 역으로 결혼의 속성과도 닮지 않았나요. 혼자 있기 싫어 결혼했으면서 혼자 있는 이병률을 부러워하고. 결혼한 친구들이 저를 만나면 바람을 한껏 쐬고 들어가는 기분이래요. 그럴 땐 좀 고소하죠.(웃음)”

그는 “가보니 어디가 제일 좋으냐”는 질문엔 좀체 답하지 않는다. ‘삿포로에 같이 가자는 말은 좋아한다는 뜻’이라는 책 속 구절로 넘겨짚으니, 매년 1월엔 꼭 간다는 말로 대답을 대신한다. “눈이 주구장창 오니까”란다. “눈은 정화기능이 있는 것 같아요. 사람을 살짝 미치게 하는, 어떤 환각을 도와주는 것도 같고. 그래서 좋아요.”

여행 정보라곤 절대 주지 않는 그에게 그 비싼 삿포로에서 매년 돈을 얼마나 쓰냐고 물었다. 1주일에 100만 원 정도면 된단다. “30만 원짜리 항공권이 있어요. 1박에 6~7만 원 하는 비즈니스 호텔에서 자고요. 천연온천 동네 목욕탕이 4500원에, 오타루에 놀러가는 기차 삯이 6000원 정도죠. 털게 요리만 안 먹으면 돼요. 저녁 7시에 백화점에 가면 모든 음식을 세일하죠. 스시 한 접시랑 맥주 한 캔 사서 호텔에 돌아가 눈 내리는 창밖 내다보면서 먹으면 더 바랄 게 있나요.”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전호성 객원기자·출판사 달

선데이 배너

AD
온라인 구독신청 지면 구독신청

PHOTO & VIDEO

shpping&life

많이 본 기사

댓글 많은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