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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을 바꾼 전략] 앞을 본 비스마르크, 독일 통일…상황 오판한 김일성, 분단 고착





한민족이 남북으로 분단된 지 70년이다. 타성에 젖을 긴 시간이다. 근대적 의미의 통일·분단·재통일을 이룬 대표적 국가는 독일이다. 1989년 베를린장벽이 갑자기 무너지고 이듬해 동서독이 통일됨에 따라 통일은 의지와 관계없이 그냥 닥쳐오는 것으로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동서독 통일 이전에 수많은 전략적 고려가 있었다.



지금으로부터 145년전인 1870년 7월 19일에 발발한 프로이센(독일 땅에 세워진 프러시아)과 프랑스의 이른바 보불(普佛)전쟁 이면에는 통일을 위한 프로이센의 치밀한 전략이 있었다. 전쟁의 직접적인 계기는 이른바 '엠스 전보(電報)' 사건이다. 7월 13일 아침 프로이센 국왕 빌헬름 1세는 휴양지 바트엠스에서 수행원들과 산책을 즐기고 있었다. 이 때 프랑스대사 베네데티가 방문해 "스페인 왕위계승에 영구히 관여하지 말라"고 빌헬름 1세에게 요구했다. 베네데티의 태도는 정중했지만 요구한 내용은 빌헬름 1세가 불쾌하게 받아들일 것이었다.





프랑스대사, 프로이센 빌헬름 1세 압박



이런 사실을 베를린에 있던 '철혈 재상' 비스마르크에게 전보로 알려졌고, 비스마르크는 전보 내용을 간단하면서도 자극적인 문투로 바꿔 공개했다. 프로이센 여론은 일개 프랑스 대사가 프로이센 국왕을 모욕했다고 여겼다. 프랑스 여론도 프로이센이 대국 프랑스의 요청을 무례하게 처리했다고 생각했다.



비스마르크는 독일 통일을 위해 독일의 여러 공국(公國)에 관여하고 있던 프랑스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년)의 연장선에서 프랑스와의 전쟁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다. 이미 국방 개혁과 대외동맹을 성공적으로 이룬 프로이센은 프랑스와 전쟁을 하게 되면 승산이 높다고 판단하고 있었다. 독일 통일을 위해서는 여러 독일 공국들을 아우르는 분위기 조성이 필요했는데, 비스마르크는 독일 공국들에 관여하고 있던 프랑스를 통일독일의 출범에 필요한 제물로 여겼다. 엠스 전보를 자극적으로 공개한 것은 독일 통일을 위한 비스마르크의 한 수였다.





우위로 오판한 프랑스, 무리한 선제 선전포고



이에 비해 프랑스는 사태 전개를 잘 내다보지 못했다. 당시 프랑스 지도자는 1848년 대통령으로 선출됐다가 3년 뒤 쿠데타로 의회를 해산한 후 1852년 황제로 즉위한 나폴레옹 3세였다. 그는 국내정치적 감각은 뛰어났지만 대외정책에서는 큰 삼촌 나폴레옹 1세를 따라가지 못했다. 나폴레옹 3세는 유럽질서와 프랑스 국내정치를 주도하기 위해자신이 프로이센 국왕보다 우위에 있다고 천명하고 싶었기에 프로이센에 전쟁을 먼저 선포했다.



나폴레옹 3세는 오스트리아-헝가리와 함께 프로이센 지배하의 남부 독일 공국(바이에른·뷔르템베르크·바덴)으로 진격해 독립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왜냐하면 오스트리아와 남부 독일 공국들은 프로이센에 패한 뒤 설욕을 벼르고 있었고 전쟁이 나면 프랑스 편에 합류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이 엠스 전보를 적대적으로 공개했다는 사실에서 프로이센의 전쟁 의지 및 승리 가능성을 높게 인지했어야 했다. 특히 프로이센이 주변 강대국뿐 아니라 독일내 여러 공국들과도 협력하고 있다는 사실에서 프랑스에 대한 프로이센의 태도는 결코 허세가 아님을 간파했어야 했다. 그렇지만 나폴레옹 3세는 프로이센의 군사력을 과소평가했고 주변국의 선호를 잘못 판단해 프로이센이 보낸 신호를 엄포로 받아들였다.





비스마르크의 함정에 빠진 나폴레옹 3세 패배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는 비스마르크가 친 함정에 빠진 선택이었다. 선전포고 이후 사태는 나폴레옹 3세의 기대와 전혀 다르게, 비스마르크의 기대대로 전개됐다. 프로이센군은 신속하게 동원돼 프랑스를 공격했으나, 앞서 몇 년 전에 프로이센에 참혹하게 패한 오스트리아는 프로이센 공격을 주저했다.



9월 2일 프랑스 스당에서 나폴레옹 3세는 대패해 포로가 됐다. 나폴레옹 3세는 포로 신세로 독일 아헨에 머무는 동안 아헨 주민들로부터 "(다음 연금 장소인) 카셀로 빨리 꺼져라(Ab nach Kassel)"는 야유를 받았다. 카셀과 관계없이 그냥 ‘꺼져라’ 혹은 ‘서둘러라’는 의미로 오늘날 쓰이고 있는 독일어 ‘압 나흐 카셀’의 어원은 나폴레옹 3세가 이처럼 독일 국민을 결속시켰음을 보여준다. 스당 패전 이후 프랑스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해 전쟁을 계속 수행했지만, 결국 1871년 1월 수도 파리는 함락됐고 프랑스가 자랑하는 베르사유 궁전에 있는 거울의 방에서 통일 독일제국의 선포식이 성대하게 치러졌다.



이런 일련의 정책결정을 그림으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다단계 전개 상황에서의 전략 계산은 역순으로 따져보면 간단하다. 맨 마지막 단계인 단계 IV에서, 주변국은 프랑스가 승리하여 유럽 패권을 다시 갖는 결과(④)를 원치 않았기 때문에 프랑스를 견제할 독일의 등장(⑤)을 차라리 더 나은 결과로 생각했을 수 있다. 즉 단계 IV에서 주변국은 프로이센을 선택한다. 이런 사실을 내다보는 프로이센은 단계 III에서 전쟁을 선택하게 된다. 왜냐하면 진격하지 않으면 프랑스에 굴복하는 것(③)이 되고 진격하면 전쟁에 승리하여 통일을 이루는 것(⑤)이 되기 때문이다.



이런 전개상황을 제대로 내다보지 못한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게 되면 전쟁에서 승리(④)하거나 아니면 프로이센이 굴복할 것(③)으로 예상했기 때문에 단계 II에서 프로이센의 발언권을 인정하는 것(②)보다 선전포고를 선택했다. 끝으로, 엠스전보 사건 직전의 단계 I은 프로이센으로선 세 수를 미리 내다보고 선택해야 하는 단계였다. 전보 공개가 곧 독일의 통일(⑤) 아니면 적어도 발언권 확보(②)를 가져다주고, 이는 프랑스 우위를 인정해주는 것(①)보다 낫다고 판단했기 때문에 전보를 자극적으로 공개하게 되었다.





여러 수를 내다보고 치밀한 남북통일 전략을



통일 추진자의 정확한 판단과 통일 방해자의 잘못된 판단으로 통일이 이뤄진 사례뿐 아니라 잘못된 전쟁으로 분단된 사례도 있다. 독일은 1939년 일으킨 2차 세계대전으로 1945년에 분단되고 말았다. 아무런 전쟁 없이 동서독이 재통일을 이룬 1990년과 대비된다.



잘못된 전쟁으로 분단이 고착화한 사례가 바로 6·25전쟁이다. 6·25전쟁을 일으킨 김일성은 소련의 지원을 받으면서도 미국의 참전은 없을 것으로 판단했지만 미국은 즉시 개입했다. 심지어 남한주민이 북한군을 열렬히 반길 것이라고 오판했다. 김일성은 미국이나 남한주민의 신호를 나폴레옹 3세만큼이나 잘못 읽었다. 이런 잘못된 판단으로 시작된 전쟁은 민족통일은커녕 반세기 이상 분단을 고착화했다.



프로이센의 통일전쟁 대상은 독일내 다른 공국들이 아니었고 외부세력 프랑스였다. 이에 비해 6·25도발의 주대상은 외부보다 남한내 같은 민족이었다. 동포에게 총부리를 겨눈 섣부른 전쟁이 통일을 매우 어렵게 만들었다. 만일 6·25전쟁이 없었더라면 남북한은 이미 통일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주변국의 강한 견제를 받던 독일도 냉전 종식과 더불어 통일됐는데, 만일 남북한 간에 전쟁이 없었더라면 통일가능성은 독일보다 더 높았을 것이다.



통일은 그냥 무작정 기다리면 오는 것도 아니고, 무모하게 추진해서 이뤄지는 것도 아니다. 여러 수를 내다보는 정교한 전략 준비와 추진이 있어야 통일은 실현될 수 있다.



김재한 한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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