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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희의 시시각각] 문재인의 허망했던 13일

박승희
정치부장
유승민 정국이 일단락되는 날이었다.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가 당 회의에서 말했다. “결말이 참 허망하게 됐다. 대한민국이 민주공화국이라는 헌법 기본이 무너졌다.”



 하지만 지켜본 입장에서 허망한 건 유승민의 사퇴가 아니었다. 제1야당 대표가 남의 다리 긁듯이 평론하는 걸 듣는 기분이었다.



 바둑에서만 복기(復棋)가 필요한 게 아니다. 대한민국 정치는 늘 복기해봐야 한다. 경부선을 타기로 해놓고 호남선·태백선으로 빠진 경우가 비일비재해서다. 이번도 예외가 아니다. 국회법 개정안 논란은 대체 왜 벌어졌는가. 누가 시작했는가. 야당이다. 세월호 시행령을 고치겠다며 국회법 개정을 주장한 게 발단이다. 새정치연합은 세월호 사고를 제대로 밝히려면 공무원들이 조사하고, 심사하도록 돼 있는 시행령을 고쳐야 한다고 했다. 잘못된 시행령을 고치기 위해 국회법을 개정해야 한다고 우겼다. 청와대는 그런 야당의 요구를 받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공무원연금 개혁을 하려면 이 정도 요구는 들어줘야 한다는 ‘소신’으로 유승민 원내대표가 사고를 쳤다.



 국회법 개정 논란이 출발선에 선 모습은 그랬다. 그래서 “결말이 허망하다”는 야당 대표의 평론을 듣는 기분이 더 허망했던 거다. 불을 지른 사람이 한 달 내내 불 구경만 하다가 소방관들의 솜씨를 탓한 것과 뭐가 다른가.



 대통령이 거부권을 행사한 날 문 대표는 대국민담화문을 발표했다. “거부권 행사는 정부 무능에 대한 책임면피용이자 치졸한 정치 이벤트다. 국민의 심판을 받아야 할 사람은 대통령이다.” 야당 대표로서 발표할 만한 담화문이었다. 문제는 제1야당의 그 다음 행보다.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를 비판한 야당은 국회 상임위 보이콧을 선언했다. 대통령의 잘못된 결정에 맞서기 위해 국회를 팽개치겠다는 해괴한 결정을 했다. 참으로 느닷없고, 허망한 대응이다.



 대한민국 헌법에는 국회가 대통령이나 정부 앞에 등장한다. 국민을 대표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잘못된 결정과 싸우겠다면서 국회 문을 닫아걸고 제1야당은 뭘 하겠다는 거였고, 실제 뭘 했는가. 당 대표인 문재인은 이 기간 중 ‘연평해전’ 영화를 봤고, 민생 행보를 내세워 메르스 병원들을 찾아다녔다. 그가 규탄한 건 “치졸한 정치 이벤트”였으나 그가 한 것도 이벤트의 정치였다. 그로 인해 정국을 떠들썩하게 한 국회법 개정 논쟁 동안 제1야당도 국회도 보이지 않았다. 당연히 문재인도 없었다. 대통령과 유승민 간 13일의 전쟁이 있었을 뿐이다.



 유승민 정국에서 보여준 제1야당의 모습은 지금 대한민국 정치가 앓고 있는 가장 심각한 질환이다. 정치는 언제부턴가 문제 해결 능력을 잃어버렸다. 대안을 제시하지도 못한다. 반대를 위해 더 강한 반대만이 존재하는 비토크라시(vetocracy)라는 바이러스에 온통 전염돼 있다. 대통령과 여당 사이가 그랬고, 여당과 야당이 그랬고, 당 안의 주류와 비주류가 그렇다.



 거슬러 올라가면 거부권 정국은 대통령과 여당 원내대표의 헤게모니 싸움이 아니라 행정부와 입법부의 권한과 영역을 둘러싼 수준 높은 논쟁이었어야 했다.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한 야당은 당연히 그 논쟁 속에 있어야 했다. 하지만 무능한 야당은 거부권 정국이 유승민 정국으로 변화될 기미를 보이자 판에서 떠나 버렸다. 여권 내부의 싸움이고, 그 싸움의 끝은 균열일 거라고 계산했을지 모른다. 유승민 정국을 구경만 한 야당은 지금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숨죽였던 비주류들은 지도부의 빈약한 정치력을 핑계로 분당이다, 탈당이다 시끄러운 판을 만들고 있다. 국민에게 대안으로 자리 잡지 못한 야당이 앞으로 겪을 일은 아마 더 험악할지 모른다.



 대저 정치란 뭔가. 공자는 ‘족식족병민신지의(足食足兵民信之矣)’라고 했다. 국민을 배부르게 하고, 위태로움을 예방하고, 믿음을 줘야 한다는 거다. 정치가 흔들리고, 경제가 골병 들고 있는 지금 문재인의 새정치연합은 이 가운데 하나라도 제대로 살피고 있는가.



박승희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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