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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슬픈 세계문화유산

남정호
논설위원
영국 중서부의 항구도시 리버풀. 이젠 비틀스의 고향이라는 게 유일한 자랑인 한물 간 도시로 전락했지만 예전엔 달랐다. 아프리카와 신대륙을 잇는 삼각무역지로 유럽 물동량의 40%가 여기를 거쳤다. 19세기엔 런던보다 부유한 도시여서 “대영제국은 리버풀 덕에 가능했다”는 말까지 돌았다. ‘아메리칸 드림’을 꿈꿨던 미국 이민자들의 최대 출발지도, 초호화 유람선 타이타닉호가 떠난 항구도 이곳이었다. 그랬던 리버풀은 1970년대부터 형편없이 몰락한다. 버팀목이던 조선업이 쫄딱 망한 데다 식민지마저 속속 독립하면서 삼각무역도 시들해졌다.



 영광은 사라져도 역사는 남는 법. 경제난에 지친 리버풀시는 풍부한 관광자원을 통한 부활을 노린다. 그리하여 2004년 유네스코에 248쪽에 달하는 방대한 세계문화유산 신청서를 낸다. 이때 시 당국은 “리버풀이 세계 노예무역의 최대 중심지였다”는 부끄러운 과거를 낱낱이 밝혔다. 메이지 근대산업시설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면서 조선인 강제노동 사실을 애써 숨기려는 일본과 너무도 달랐다. 결국 리버풀 해양무역도시 시설은 같은 해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고 채택이유서엔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단 내용도 들어간다.



 그간 유네스코가 등재한 세계문화유산은 802개. 하나같이 아름답고 예술적일 것 같지만 비극의 현장도 다섯 곳 들어 있다. “인류의 비극도 직시해야 평화를 위한 역사의 교훈을 얻게 된다”는 게 유네스코 설명이다.



 그래서 78년에 채택된 게 아프리카 노예무역의 중심지였던 세네갈의 고레섬. 이후 유대인 학살의 현장 폴란드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강제수용소, 넬슨 만델라 등 수많은 흑인 정치범을 가뒀던 남아공 로벤섬, 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파괴됐다 복구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모스타르 옛 시가지의 다리도 같은 반열에 오른다.



 남은 하나는? 바로 원폭의 비참함을 보여주는 일본 히로시마 평화기념관이다. 일본 정부는 이곳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신청하면서 “같은 참극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비극의 현장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었다.



 그랬던 일본이 이젠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까지 나서 조선인 강제동원 사실을 지우려 한다. 일본인의 의식을 파헤친 명저 『국화와 칼』의 저자 루스 베네딕트는 수치를 중요시하는 게 이들의 특징으로 꼽았다. 수치스럽다고 역사를 비트는 것이야말로 가장 큰 수치다. 영국 철학자 에드먼드 버크의 충고. “역사를 외면하면 반복하게 된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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