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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눈으로 바라본 인간 연산

‘세상에 저런 미친X이 있나’. 최근 개봉한 영화 ‘간신’에서 병적인 향락과 광기에 빠져 날뛰는 연산군을 보며 절로 든 생각이다. 영화는 천하의 간신배로 꼽히는 임숭재 등 연산의 주변 인물들에게 포커스를 맞춰 조선의 불행한 역사 무오사화와 갑자사화에 얽힌 서사를 풀어간다. 반전 끝에 간신 숭재는 폭정 종식의 영웅으로 거듭나지만 연산은 끝까지 ‘미친X’이다. 하긴 ‘간신’ 뿐 아니라 연산군을 다룬 대부분의 콘텐트에서 그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악역으로 그려진다. 그만큼 이해불가능한 희대의 폭군인 것이다.

연극 ‘문제적 인간 연산’, 7월 26일까지 명동예술극장

하지만 핑계없는 무덤은 없는 법. 연극 거장 이윤택의 ‘문제적 인간 연산’은 그에게 다소간 면죄부를 준다. 무대 위 연산은 ‘묻지마’ 폭정을 일삼는 타고난 ‘미친X’은 아니다. 이 연출은 연산이 폭군이 될 수밖에 없었던 인간적 이유들로 공감 코드를 만들고, 그를 비장미 넘치는 비극의 주인공으로 격상시켰다. ‘천하의 악역’이란 오명을 떨쳐내는 한판의 씻김굿인 셈이다.

1995년 초연된 ‘문제적 인간 연산’은 당시 유인촌, 이혜영이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연산과 녹수로 내세웠던 화제작이자, 그해 동아연극상, 백상예술상 등 온갖 연극상을 휩쓴 ‘한국 현대연극의 기념비적 작품’이다. 오랫동안 서구 리얼리즘 연극을 추종하던 연극판에 이승과 저승, 산 자와 죽은 자의 경계를 허문 초현실적 메쏘드로 한바탕 굿판을 벌여 한국 연극의 정체성 회복에 불을 붙인 것이 첫째 이유다. 하지만 이 연극의 진짜 미덕은 종래 우리 극문화에서 볼 수 없었던 비극적 인간의 탄생에 있다. 이윤택의 ‘연산’은 말하자면 소포클레스의 ‘오이디푸스’ 또는 셰익스피어의 ‘햄릿’인 것이다.

매일 밤 자신에게 화를 당한 이들과 폐비 윤씨의 망령이 출몰하는 악몽에 시달리는 연산은 오직 어미처럼 자신을 어르는 녹수의 치마폭에서 위안을 찾는다. 폐비 윤씨의 기일을 맞아 제사를 지내려는 그에게 대신들은 유교적 권위를 앞세워 반대한다. 왕권을 조롱하는 대신들에 맞서 연산은 스스로 ‘왕무당’을 자처해 제의를 벌이고, 이윽고 폐비 윤씨의 혼을 입은 녹수가 폐비의 죽음에 얽힌 음모를 토로하자 피의 대학살이 시작된다.

여기서 주목할 것이 관료 대신들이다. 이들은 도무지 말이 통하지 않는 ‘꼰대’들이다. 아예 중국말까지 써가며 ‘공자왈 맹자왈’에 여념이 없는 저들의 태도가 왕보다 더 왕 같다. 오랜 세월 자리보전과 권력싸움에 목을 매 온 썩어빠진 관료들이 어린 왕을 갖고 노는 부조리다. 연산은 ‘세상의 이치를 바로 잡겠다’며 박차고 일어선다. “나는 더 이상 이 낡은 기둥과 고색창연한 서까래 밑에서 살지 않겠다. (···) 지금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은 이 낡은 기둥이며 저 썩은 세상의 서까래를 부수는 일이다. 파괴다, 파괴!”

하지만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볼 수 없는 운명적 비극에 그는 차라리 미쳐버리기를 택하고, 낡고 병든 나라를 바로잡기는커녕 가일층 타락해 간다. “틀렸군, 다 틀렸어. 너희들 붓 끝에 놀아나는 이 세상, 그 속에서 나는 미친 광대였노라. 하하!” 마치 자기 눈을 찌른 오이디푸스 왕처럼, 스스로 비극을 극한으로 치닫게 해 얻어지는 절정의 카타르시스다. 연산의 폭정은 역사의 비극이기에 앞서 한 인간의 비극인 것이다.

2003년 재연 이후 12년 만에 돌아온 ‘연산’은 완전한 리모델링을 거쳤다. 무대 장치부터 싹 달라졌다. 무대 위에 궁을 지어 올렸던 사실적 무대는 사라지고 누렇게 변한 대밭으로 옮겨 왔다. 바닥은 깨질 듯 투명한 아크릴판이 뒤덮인 급격한 경사면에 여기저기 기둥이 쓰러져 가고, 권위의 상징인 용상도 반쯤 부서진 채 무너져 가는 왕실을 웅변하고 있다.

배우들의 연기도 사뭇 다르다. 유인촌의 광기와 이혜영의 농염함은 사라지고 차갑고 담백한 무대가 됐다. ‘21세기는 뜨거움과 스펙터클을 원하지 않는 시대’라는 이윤택 연출은 뜨거운 연기 대신 음악과 무용을 중요한 언어로 내세웠다. 소리꾼 이자람을 녹수 역에, 무용수 출신의 배우 백석광을 연산 역에 세워 ‘언어와 음악, 무용이 합을 이룬 컨템포러리 아트’를 지향한 것이다.

하지만 무용수와 소리꾼의 조합에 대한 기대가 컸던 탓인지, 그 비중은 미미하게 느껴졌다. 특히 이자람의 존재감이 돋보이지 않았다. 2013년 루마니아 연출가 가보 톰파의 ‘당통의 죽음’에서 거리광대로 나와 극을 넘나드는 초월적 캐릭터로 강한 인상을 심었던 그가 극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리니 특유의 매력이 반감됐다. 영화 ‘간신’에서 녹수역 차지연의 아니리 내레이션이 극에 감칠맛을 더한 것처럼 소리꾼으로서의 오리지낼러티를 돋보이게 하는 연출이었다면 어땠을까. ●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극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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