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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 묻기 전 민낯 보여주는 쿠바發 로드 무비

저자: 정승구 출판사: 아카넷 가격: 2만 2000원
대륙과 대륙 사이에 대단한 섬이 있다. 나는 그 섬에 가고 싶었다. 누군가는 시간이 멈춰버린 어른들의 동화라 생각하고 또 누군가는 누더기를 입은 성녀 혹은 창녀라고 생각하는 곳, 쿠바. 정승구 감독은 지난해 가을 훌쩍 그곳으로 떠났다. 오랜 동경과 친밀감은 있었지만 무엇이 그를 그 먼 곳으로 이끌었는지 처음에는 알지 못했다.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

하지만 미국의 손길이 닿기 전, 자본주의의 때가 묻기 전 쿠바의 마지막 민낯을 보고 온 그는 그 잔상이 달아나기 전에 이를 기록하기로 했다. 베르길리우스가 단테의 마음을 안내해주었듯 쿠바라는 미로를 안내할 누군가가 필요한 시점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쿠바에서 만난 헤밍웨이 귀신도 한 몫 했다. 무릎이 안 좋아 서서 글을 썼던 헤밍웨이처럼 오른쪽 무릎이 아파올 때면 글로써 고통을 다스렸기 때문이다. 글을 쓰면 통증이 멈췄다니 신기한 노릇이다. 그렇게 틈틈이 쓰고 찍은 글과 사진은 기대와 기억 사이를 메우는 훌륭한 징검다리가 됐다.

이 책은 저자가 지난 3월부터 넉 달간 중앙SUNDAY에 연재중인 ‘쿠바에서 본 쿠바의 미래’의 확장판이기도 하다. 기사가 체 게바라ㆍ동성애ㆍ시가 등 키워드를 중심으로 구성됐다면, 책은 영화 감독답게 인물과 대화를 중심으로 엮은 로드 무비 형식으로 전개된다. 말하고 생각하는 화자로서의 ‘나’는 분명히 살아있지만 혁명 이후 태어난 민박집 주인 마그다와 그의 아들 페페, 그리고 정말 친한 여자친구 다리아나가 그 못지 않은 주요 인물로 등장한다. 정 감독에게 쿠바를 안내한 베르길리우스였던 전직 기자 출신 가이드 하비에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의 대화는 자연스레 쿠바의 현실과 맞붙는다. 이를테면 여전히 현재진행형인 아메리칸 드림이 그렇다. 커피는 알아서 내려 먹으라던 마그다는 저자가 미국에서 살다 온 걸 알곤 틈만 나면 커피를 들이밀며 궁금증을 해소한다. “그들이 말하는 자유는 돈이야?” “돈이 없으면 선택의 자유도 없어지잖아?” 등등. 그녀 역시 아들과 함께 미국행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는 미사일 위기 이전 기득권층이 떠났던 첫 이민 행렬부터 생계형 보트 피플의 엑소더스에 이르기까지 쿠바의 굴곡진 현대사와 궤를 같이 한다. 과거 그들을 실어나르던 게 배였다면 지금은 결혼 등 합법적인 수단으로 바뀐 점이 다를 뿐이다.

역사와 정치가 책을 엮는 씨줄이라면 젊은이들과 에피소드는 여행 곳곳에서 생생함을 불어넣는다. 외국인 동행 없이는 갈 수 없는 클럽과 식당에서 식기도구를 슬쩍하는 다리아나를 통해 관광산업으로 버는 외화를 나눠가져야 한다는 소시민의 사고방식을 엿보고, 다리가 끊어지고 정전이 돼 기름을 넣을 수 없는 주유소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쿠바의 국민 스포츠’인 기다림을 온몸으로 체득하게 된다. 젊은이들과 어울리는 것이야말로 한 사회의 현재와 미래를 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저자의 신념이 옳았음을 보여주는 예는 이외에도 수두룩하다.

저자는 “세월호 참사 이후 한국 사회와 인간이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총체적인 환멸을 느꼈던 내게 쿠바는 인간의 바람직한 원형을 상기시켜주며 희망의 불씨를 다시 지펴줬다”고 했다. 아마 어떤 이에게 이 책은 쿠바를 읽는 입문서가 될 것이고, 어떤 이에게는 쿠바행 비행기 티켓을 끊는 동력이 될 것이다. 저자의 사진론처럼 책 속의 쿠바가 독자에게 어떤 말을 걸어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다만 그 피사체에 대한 이해력이 늘 것만은 확실하다. 충분히 유머 있고 교양 있는 대화가 가득하기 때문이다. 때로 늘어지기도 하지만 지적 지층을 다진다는 마음으로 접근하면 충분히 감내할 만하다. 원래 사랑하는 연인과의 대화도 항상 즐거울 수만은 없는 법이니 말이다.


글 민경원 기자 storym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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