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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은행 오디세이] 조선은행법은 식민지 모순구조의 거울이었다

1931년 7월 만보산 사건 당시 중국 언론에 보도된 그림. 조선인들이 일본 관헌들과 합세하여 중국 농민들을 살육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다. 이런 오해 때문에 조선인들은 만주 현지에서 심한 테러를 당했다. 김동인의 『붉은산(1933년)』은 조선인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다뤘지만, 같은 해 발표된 리훼이잉(李辉英)의 『만보산』은 똑같은 사건을 중국인 입장에서 그렸다.
지난달 우리나라를 덮친 메르스의 맹위는 한국은행의 기준금리까지 낮췄다. 소비심리 위축의 가능성을 보고 한국은행이 전향적인 태도를 취한 것이다. 정책당국이 상황이 달라질 때마다 입장을 바꾸는 것 즉, ‘동태적 비일관성’이 바람직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사태의 정도가 심각하면, 정책의 일관성보다 ‘패러다임 쉬프트’를 모색해야 한다.

대공황이 바로 그런 때였다.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경기회복을 시장에 맡기자는 멜론 재무장관의 권고를 무시하고 재정지출을 파격적으로 늘렸다. 1931년 후버댐 건설을 착공하고 다음해에는 재건투자공사(RFC)를 설립했다. 그리고 첫 해에만 15억 달러(5년에 걸친 후버댐 총건설비용의 3배)를 금융회사 지원에 쏟아 부었다. 당시 미국 연방준비제도(Fed)의 최종대부자 기능이 시원찮았기 때문이다(당시 Fed는 금융안정 기능에 스스로 한계를 긋고 돈을 풀지 않았다).

대공황 당시의 미국. 존 스타인백은 집과 땅을 잃은 사람들이 서부 황무지에 이렇게 대책 없이 너부러져 있는 모습을 『분노의 포도(1939년)』를 통해 생생히 고발했고,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은 이런 상황들을 역으로 이용해서 사회주의적 성격이 강한 뉴딜정책을 밀어붙였다. 1935년 미 연준법도 개정되어 연준의 대출 시 담보물 범위가 대폭 확대되고, 공개시장조작이 공식 정책수단으로 인정되었다. 이는 미국의 금융전통을 완전히 뒤집은 것이다.
물론 실수도 있었다. 후버 대통령은 균형재정을 위해 소득세율과 법인세율을 인상하고, 수입관세율을 사상 최고 수준으로 올렸다(스무트-홀리법, 1930년). 그 실수를 후임 대통령인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케인즈주의자들이 놓치지 않고 과장해서 비판했고, 후버는 그 때문에 지금까지도 긴축만 추구했던 무능한 인물이라는 오해를 받는다.

쌀을 둘러싼 한·중·일의 갈등
일본의 대응은 훨씬 긴축적이었다. 하마구치(濱口雄幸) 내각은 대공황 즉, 쇼와공황(昭和恐慌)을 맞아 재정긴축, 관세인상과 함께 ‘산업 합리화’로 대응했다. 1930년 6월 상공성에 임시산업합리국을 설치하고 한계기업들을 정리했다. 여기서 살아남은 수출 대기업들은 절약과 긴축을 택했다. 노동자들의 임금 삭감과 제품 가격 인하를 통한 ‘기아 수출’ 즉, 덤핑 수출로 버텼다.

그러나 대공황이 가격조절로 해결될 문제는 아니었다. 공급과잉이 원인이었기 때문이다. 특히 농업이 그랬다. 일본의 대공황이 시작된 1930년 하필 대풍년이 들어 쌀 값은 폭락하고 농가부채가 폭증했다. 결식아동과 농촌소녀들의 인신매매가 커다란 사회 문제가 되고, 많은 자영농들이 소작농으로 몰락했다. 『분노의 포도(1939년)』를 통해 존 스타인벡이 고발했던 미국 서부 농촌의 비참한 모습이 태평양 건너편에서도 똑같이 진행된 것이다.

일찍이 일본은 ‘쌀 소동(1918년)’ 즉, 쌀값 폭등으로 인한 사회적 소요와 정권교체를 경험했다. 이후 산미증식계획(産米增殖計劃)을 세우고 조선을 포함한 식민지에서 대대적으로 쌀을 수탈해 갔다. 그 결과 1920년대에 들어와서는 조선의 대일 무역 중 절반이 쌀로 채워질 정도였다.

산미증식계획이 너무 순조롭게 진행되다 보니 부작용도 생겼다. 일본 안에서는 쌀값이 계속 하락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1929년 5월 다나카(田中義一) 내각은 ‘외지미 이입통제(外地米移入統制)’ 방침을 세웠다. 식민지 쌀 수입을 허가제로 바꾸고, 다른 식량의 수입관세율을 높이는 것이 골자였다.

하지만 조선을 포함한 식민지들이 일본의 식량공급지로 완전히 개조된 상태에서 갑자기 수출길이 막히면, 경제가 타격을 받는다. 식민지 하층민의 주식인 만주산 조(粟)의 수입관세율이 인상되면, 생계가 어려워진다. 어쩌면 10년 전 일본이 겪었던 ‘쌀 소동’이 식민지 전역에서 재현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것이 식민지 현실에 정통한 마츠다(松田源治) 척무상과 사이토(齋藤實) 조선총독의 주장이었다. 그들은 “허가제는 내지본위주의(內地本位主義)”라며, 총리의 계획을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결국 허가제와 관세율 인상 계획은 유보되었다. 본토를 향한 식민지의 승리였다.

당시 재조(在朝) 일본인들은 고국의 방침을 거스르고 조선인 편에 섰다. 조선의 지주들도 쌀을 “수탈당한다”는 생각을 “수출한다”로 바꿨다. 조선총독부와 조선인 지주계급 사이에 형성된, 이런 애매한 유대감은 “무항산이면,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이라는 맹자의 말 그대로였다.

한편, 이 무렵 맹자의 고향 중국에서는 쌀 문제가 조선과의 관계를 악화시키고 있었다. 산미증식계획 이후 먹을 것이 부족해 진 조선의 하층민들은 만주로 진출했다. 수확물의 일부를 보장받는 조건으로 광활한 그곳 땅을 부지런히 개간했다. 미국이 독립하기 전, 가난한 유럽인들이 스스로 계약노예가 되어 북미 식민지에 도착한 뒤 광활한 땅을 일구던 것과 똑같은 모습이었다.

일본 정부의 ‘외지미 이입통제’ 방침을 다룬 신문 기사. 당시 조선총독은 “조선 농촌이나 농민을 절대로 데리고 온 자식(繼子) 취급할 생각이 없다”는 방침을 밝혀 조선인들의 환심을 샀다.
그런데 조선 이주민들이 늘어나면서 현지 중국인들과 크고 작은 마찰이 이어졌다. 1931년 7월 중국 지린성 창춘현 만보산 주변의 수로(水路)를 두고 원주민과 조선 이주민 사이에서 유혈사태가 빚어졌다. 이 사건 이후 조선과 중국 양쪽에서는 원주민의 테러로 이민촌이 초토화되는 일들이 속출했다. 이 사건의 메시지 역시 “무항산이면, 무항심”이다. 항일투쟁을 위해 합심했던 조선인과 중국인들이 먹고 사는 문제 앞에서 갈라선 것이다.

산미증식계획은 순전히 일본을 위해 시작되었지만, 과잉생산이라는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이렇게 쌀 문제가 실물경제의 골칫거리였다면, 금융경제의 골칫거리는 조선은행이었다. 1910년대 중반 이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늘린 대중(對中) 부실대출 때문에 1924년 2월 조선은행의 미노베(美濃部俊吉) 총재가 경질되었다. 1년 반 뒤에는 50% 감자(減資)와 함께 총재, 부총재가 또 경질되었다. 새로 부임한 스즈키(鈴木島吉) 총재는, 만주에서 조선은행과 경쟁하던 요코하마정금은행(横浜正金銀行)의 부총재 출신이었다. 그래서 그의 취임이 조선은행에는 치욕이었다.

스즈키는 취임 직후 숨겨진 결손의 표면화와 고정대출금 회수, 그리고 경비절감을 선언했다. 그리고 경성(서울)과 중국의 다롄에 담당이사 1인 씩만 남겨두고 본부를 도쿄로 옮겼다. 대장성의 눈앞에서 조선은행의 인원감축과 급여삭감을 주도한 스즈키는, 2년 뒤 일본은행 총재로 승진했다.

그렇다고 조선은행의 숨통이 트인 것은 아니었다. “구관이 명관”이라는 한숨 속에 취임한 후임 가토(加藤敬三郞) 총재는 홋카이도척식은행장 출신의 구조조정 전문가였다. 전임자의 출세공식을 본 그는, 취임사에서 “욕먹을 것을 작정하고, 일신을 바쳐 이 난국에 대처할 각오다. 제군들에게 전임 총재시절의 분투 이상을 요청한다”고 훈시했다. 그리고 100여 명을 한꺼번에 정리했다. 가토 총재는 추운 겨울철 난방을 끊은 집무실에서 외투를 입은 채 화롯불에 손을 쬐며 일을 했다. 뼈를 깎는 구조조정 끝에 1928년 9월, 마침내 총재실과 외환업무과만을 도쿄에 남겨 두고 본부가 다시 경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만주 영업망은 환원되지 않았다(가토는 10년 간 총재로 일한 뒤 귀족원 의원이 되어 귀국했다).

조선은행 본부, 도쿄로 이전
한때나마 조선은행이 본부를 도쿄에 둔 이유는, 이 은행이 조선총독부가 아닌 대장성의 감독을 받는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1927년 금융공황 당시 일본은행은 특별법(일본은행 특별융자 및 손실보상법)에 따라 두 달 간 20억 엔의 특별융자(특융)를 실시했는데, 이는 관동대지진 때 공급된 4억8000만 엔보다도 훨씬 많았다. 그때 조선은행 도쿄지점은 특융을 가장 많이 받는 기관이었고, 일본인들은 그 점에 대해 분통을 터뜨렸다. 본토에 누를 끼치는 식민지 은행이라면 없애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그래서 조선은행은 대장성의 감독을 받는 ‘일본의 은행’임을 강조해야 했다.

조선은행이 폐지되어야 할 대상으로 몰린 근본원인은 조선은행법에 있었다. 일본은 조선을 강제병합할 때 그들의 화폐제도에 조선을 편입시킬 생각이 없었다. 그래서 조선은행권을 따로 발행토록 했다. 그런데 조선은행은 준비금(gold reserve)이 없더라도 일본은행에 예치된 예금을 근거로 화폐를 발행할 수 있었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발행세를 내고 법정한도를 초과해서 발권할 수도 있었다.

당시 5%의 발행세율을 하루치로 계산하면 0.0137%인데, 이는 당시 일본의 콜금리보다 높았다. 따라서 발행세를 내는 것보다 콜머니를 조달하여 일본은행에 예치하는 것이 유리했다. 이런 유인 때문에 조선은행은 일본 콜시장에서 최대 차입기관이 되었고, 그 상태에서 1927년 금융공황이 닥쳤다. 결국 화폐제도 면에서 일본과 거리를 두기 위해 마련한 장치가 오히려 조선과 일본을 하나로 묶었다. 일본으로서는 그것이 낭패였다.

쌀 수입 허가제 문제는 대공황 기간 중 일본에서 여러 차례 논란이 되었다. 진퇴양난에 빠진 일본은 1930년대 들어 결국 조선의 공업화정책으로 선회했다. 조선은행 문제도 마찬가지였다. 이 은행이 일본 콜시장에 의존하는 것을 막고자 만주 재진출을 통해 자립토록 했다. 결국 군부에 기대야 했다. 그것은 쌀 수입 허가제를 두고 다나카 총리가 조선총독부(군부)를 의식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이것이 다음 이야기의 주제다.



차현진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0년째 한국은행에서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 『숫자없는 경제학』 『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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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