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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언호의 세계 책방 기행] 고서점 170여 곳의 위용 … 진보초는 책의 숲이자 책의 城

3 기타자와는 서양 문학가들의 전집을 대거 확보하고 있다.
일본 도쿄(東京)를 방문할 때 나는 진보초(神保町) 서점거리와 인접해 있는 한국YMCA 호텔에 머물곤 한다. 1919년 2월 8일 도쿄의 한국 유학생들이 조선독립을 선언한 현장의 작고 소박한 호텔이다. 그 독립정신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한국문화를 학습하는 프로그램이 진행된다.

호텔 가까이에 JR 스이도바시(水道橋)역이 있다. 역에서 호텔로 가는 도로변에 니혼(日本)대학 경제학부가 있고, 그 건물 외벽에 표지판이 둘 있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과 프랑수아 케네의 『경제표』 초판본을 소장하고 있다는 내용이다. 길손들에게 역사를 만든 고전, 그 존재와 의미를 말하는 것이다. 책의 거리 진보초와 잘 어울리는 메시지다.

5년 전 봄날, 나는 도쿄에서 열린 고서 전시회에 갔다.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초판본이 전시된다는 소식을 접했다. 나는 우리 대학들에 소장을 권유하고 싶었다. 그러나 『국부론』은 출품되지 않았다. 이미 다른 애서가의 손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제2차 대전 때 미군의 공습도 피해
책 애호가들은 일본의 어느 곳보다도 도쿄의 진보초 서점거리를 사랑한다. 책을 탐험하는 매니어들의 발길은 고서점 170여 개가 줄지어 있는 진보초로 향한다. 주제를 달리하는 서점들이 책의 숲, 책의 성(城)을 이루는 풍경. 진동하는 서향(書香)과 지향(紙香)에 애서가·탐서가·교양인들은 현혹된다. 여기에 5개의 신간서점에 진열된 새 책들의 잉크향이 싱그럽다. 진보초 서점거리는 메이지(明治) 시대에 형성되기 시작했다. 130년이 넘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미국의 공습으로 도쿄는 쑥대밭이 되었지만, 진보초 서점거리는 온전했다. 문화재의 도시 교토(京都)와 나라(奈良)는 공습하지 말라는 맥아더 사령부의 군령이 있었다지만, 진보초 서점거리가 공습을 면한 것은 ‘책의 신’이 음우(陰佑)했기 때문이라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지금도 진보초 서점인들과 애서가들 사이에 유전되고 있다.

출판인으로서 나는 탐서(探書) 여행을 누리고 있다. 책을 탐구하고 탐험하는 여행은 나의 삶이다. 그 여정에서 나의 주제를 발견하고 나의 프로젝트를 설정한다.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다.

진보초 서점거리에는 내가 관심을 갖는 온갖 주제와 과제가 임립(林立)해 있다. 인문·예술·사회과학, 역사와 문명의 세계가 존재한다. 동과 서가 있다. 서점마다 전문 주제가 있다. 학술적이고 예술적인 책에서부터 지극히 대중적이고 선정적인 잡지까지 공존한다. 공예작품처럼 아름답게 장정된 세계문학전집에서부터 동서고금의 인문학 고전들과 현란한 미술관처럼 디자인된 미술책들, 위대한 사상가와 문학가의 개별 전집이 손짓한다. 인류문명과 인간의 모든 사유가 책으로 구현된다는 것을, 무한한 책의 세계를 체험할 수 있다.

1 기타자와서점에 들어서면 오래된 책의 향기가 진동한다.
2 진보초서점거리의 한 책방. 책마다 책 이름과 값을 자욱하게 붙여 놓았다.
가와바타 야스나리, 오에 겐자부로도 찾아
기타자와(北澤)서점은 진보초 서점거리에 있는 영문(英文) 고서점이다. 1902년 18세의 청년 기타자와 야사부로(北澤彌三郞)가 시작했다. 청신한 기운이 넘쳐나는 신간서점과 달리 고서점 기타자와에는 오래 숙성된 지혜의 향이 은은하다. 지금은 야사부로의 손자 이치로(一郞)가 경영한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가 드나들었다. 역시 노벨문학상을 수상한 소설가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가 찾는다. 영국의 전 수상 해럴드 맥밀런이 방문했다.

미치코(美智子) 왕후가 2007년 5월 유럽을 방문하면서 기자회견을 할 때 “신분을 숨기고 투명인간이라도 되어 하루를 보낸다면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싶으냐”는 질문을 받았다.

“학창 시절에 다니던 진보초 고서점에 가서 책을 읽고 싶습니다.”

왕후는 대학 시절 기타자와서점에 들르곤 했다.

윌리엄 모리스를 컬렉션하기 시작한 서점
나는 새 책을 출판하는 출판인이지만, 한 권의 새 책은 옛 책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경험으로 실감한다. 한 권의 책을 만드는 일은 한 시대의 정신과 사상을 구현하는 미학적 탐험이다. 위대한 책의 장인들이 만든 지상의 아름다운 책들을 하나의 교과서로 오늘의 출판인들은 주목한다.

19세기 중·후반을 살면서 책의 높은 경지를 구현해낸 영국의 토털 아티스트 윌리엄 모리스가 말한 바 있다.

“예술작품의 가장 아름다운 성과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첫째는 집이고, 그 다음은 책이다.”

1891년 켈름스콧 프레스를 설립하여 근대 출판역사상 불후의 아름다운 책 53종 68권을 펴낸 출판장인 윌리엄 모리스. 나는 기타자와서점에서 그의 장시 『지상의 낙원』 전 8권을 구입하면서 윌리엄 모리스 컬렉션을 시작했다.

기타자와서점은 처음엔 일본책을 취급했지만 영문학 교수였던 아들 류타로(龍太郞)가 서점을 맡으면서 영문책 전문서점으로 변신했다.

“18세에 서점을 시작한 할아버지가 1958년에 작고하면서 아버지는 도쿄도립대 영문학과 교수를 그만두고 가업을 이어받았습니다. 서점이 아니었다면 맡지 않았을 겁니다. 저도 82년 아버지가 작고하면서 서점을 맡았지만, 서점이 아니었다면 저도 이어받지 않았을 겁니다.”

일본의 60~80년대는 책의 시대, 독서의 시대였다. 출판사와 서점의 전성기였다. 영어책도 잘 팔렸다.

“아버지는 ‘사장님’이 아니라 ‘선생님’이었습니다. 국내외에서 간행되는 신간과 새 잡지를 늘 손에 들고 있었습니다. 경영보다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고객도 선생님이라고 불렀습니다. 아버지는 영업에는 관심이 없고 오직 ‘좋은 책’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영문학자가 경영하는 기타자와서점은 그래서 더욱 별난 존재였다. 그는 고객에게 책과 독서를 컨설팅해주었다.

기타자와서점의 제3대 경영자 기타자와 이치로.
서양의 지적 흐름 꿰뚫는 기타자와
류타로에게 책은 신앙 같은 것이었다. 책에 대해 연구하는 자세를 흐트러뜨리지 않았다. 서양의 지적 흐름을 꿰뚫고 있었다.

“돈 많이 벌고 싶으면 서점 아닌 다른 사업 하라고 말씀하시곤 했습니다. 좋은 책이란 언젠가는 팔린다고 했습니다. 네가 모르는 책도 손님은 알고 있다면서 그런 손님 맞을 준비를 하라고 했습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책의 문명이 이렇게 급속하게 변할 줄 몰랐을 겁니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시대에는 그분들의 책에 대한 문제의식이 옳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버지가 작고한 뒤 영문학을 전공한 어머니 기타자와 에츠코(北澤悦子) 여사가 10여 년 간 사장을 맡았다. 이상주의자였던 아버지와 달리 어머니는 현실주의자였다.

“내가 아무리 현실적으로 서점을 경영한다 하더라도 아버지의 영향을 많이 받은 것 같아요. 서점 일은 책 읽는 것에서부터 시작합니다. 독서인이 될 수밖에 없지요. 서점은 참 좋은 서재입니다.”

고서의 세계는 새 책보다 훨씬 어렵다. 전문적인 지식이 없으면 고서 취급은 불가능하다. 서양 고서란 서양의 문화사·문명사·예술사다.

“고서 공부하는 젊은이들이 많지 않습니다. 그만큼 어렵기 때문입니다. 고독한 작업입니다.”

기타자와서점은 113년 동안 한 번도 문을 닫지 않았다. 1945년 전쟁 통에 직원들이 모두 군대 가는 바람에 신간 판매 쪽은 일시 문을 닫았지만 고서 쪽은 계속 문을 열었다.

일본의 고서 거래량도 줄어들고 있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도쿄고서협동조합에서 고서 옥션이 열린다. 거래량이 1년에 30억 엔 정도 되는데, 20년 전에는 60억 엔이나됐었다. 역설적이지만 70~80년대 버블시대엔 돈이 돌아 도서관은 물론 개인들도 책을 대거 구입했다. 지금은 독자들이 줄어들기도 했지만, 구입하려 해도 예산이 없다.

“대학도 인문학이나 문학에는 관심 없고 기능만 가르칩니다. 옛날 부자들은 책을 구입했지만 요즘은 그렇지 않아요.”

은퇴자들이 자기 컬렉션으로 작은 서점
일본에서는 은퇴자들이 ‘작은 서점’을 새로 열고 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책으로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것이다. 자기 컬렉션이 서점의 콘텐트가 된다. 서점을 개설하려는 은퇴자들을 위해 고서협동조합은 서점개업을 위한 강좌와 세미나를 열기도 한다. 노부부에겐 생활비가 많이 필요하지 않기에 서점으로 이익을 내려 하지도 않는다. 함께 만나고 이야기할 수 있는 문화공간이면 좋다.

“전후 일본의 경제적 부흥에 생을 바친 사람들 가운데 고서 컬렉터가 많습니다. 고서 비즈니스가 좋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서점을 여는데, 자기 일 자기 공간을 갖고 싶은 거지요. 작은 서점이란 생을 마칠 때까지 할 수 있는 일입니다.”

내가 기타자와서점을 드나든 지도 20년이 넘었다. 이치로와 나는 친구가 되었다. 기타자와서점이 갖고 있는 고서의 내용을 나는 거의 파악하고 있다. 이치로도 내가 어떤 책을 찾는지 안다.

“좋은 책 새로 들어왔습니까?”
“김 사장님이 다 갖고 가셨잖아요.”

이치로와 이런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나는 진보초 탐서 여행을 시작한다. 요즘 나는 기타자와가 갖고 있는 서양의 위대한 문학가들의 전집을 살펴보고 있는 중이다.

이치로는 지난 4월 나의 출판체험록 『책의 공화국에서: 내가 만난 시대의 현인들, 책 만들기 희망 만들기』를 일본어로 번역·출판하는 후의를 보여주었다. 『책으로 만드는 유토피아: 한국출판 열정의 현대사』라는 제목으로 간행된 이 책은 ‘상업적’으로는 출간될 수 없는 것이다.

“선뜻 팔릴 것 같진 않지만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책은 구입해 놓습니다. 개인이 갖고 있으면 없어질 수도 있으니까요. 젊은이들에게 가치 있는 책을 권유하는 즐거움이 제게 있습니다.”



김언호 동아일보 기자를 거쳐 1976년 한길사 창립. 한국출판인회의·동아시아출판인회의 회장과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위원 역임. 파주북소리 조직위원장과 출판도시문화재단 이사장을 맡고 있으며 『책의 탄생』 『책의 공화국에서』 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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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용한 연구위원 : park.yonghan@joongang.co.kr (02-751-5516)
‘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