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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칭의 굴욕 … 쑨웨이스에 연극 합작 부탁했다 딱지

시찰 나온 저우언라이에게 석유 노동자들의 생활을 설명하는 쑨웨이스(오른쪽). 1966년 5월 다칭. [사진 김명호]
문혁 시절 내내 요상한 소문이 나돌았다.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의 수양딸이 장칭(江靑·강청)과 예췬(葉群·엽군)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했다.”

마오쩌둥(毛澤東·모택동)과 린뱌오(林彪·임표)의 부인이 총리의 딸을 죽였다니, 소문치고는 고약했다. “총리는 친자식이 없다. 수양아들과 수양딸이 한둘이 아니다. 일찍 부모 잃은 혁명열사의 자녀들이다. 그럴 리가 없다”는 사람도 많았다.

1980년 1월, ‘린뱌오, 장칭 반혁명집단’ 주범 10명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판결문이 공개되자 떠돌던 소문이 사실로 드러났다. “린뱌오와 장칭을 필두로 한 반혁명 집단은 억울한 사건들을 지휘하고 선동했다. 당·정·군은 물론이고, 민주인사와 사회 각계의 간부들이 모함과 박해를 받았다. 죽음에 이른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작가 라오서(老舍·노사)와 쑨웨이스(孫維世·손유세) 같은 예술가들이 억울하게 세상을 떠났다.”

2009년 가을, 재판의 전 과정을 지켜본 재판장이 입을 열었다. “저우언라이의 수양딸이었던 쑨웨이스는 재기 넘치는 중국 최고의 극작가였다. 마오쩌둥과 주더(朱德·주덕), 저우언라이 등 중공 최고 지도자들의 총애를 받은 게 죄였다. 박해 받다 죽은 사람 중 나이가 제일 어렸고, 마지막도 가장 참혹했다. 주더나 저우언라이도 손쓸 방법이 없었다. 발단은 연극이었다.”

1964년 초, 마오쩌둥이 연극인들에게 불평을 늘어놨다. “중국의 무대를 양코배기들이 장악해버렸다. 우리의 노동자와 농민, 군인들은 밥 먹고 방귀만 뀌는 줄 알겠다. 이들에게서 얘기 거리를 찾아라.” 러시아 희극(戲劇)이 유행할 때였다.

쑨웨이스(뒷편 왼쪽)의 형제들. 쑨웨이스 앞이 딸 쑨샤오란. 1960년대 초, 베이징.
중국희극원 원장 쑨웨이스는 석유와 씨름하는 다칭(大慶) 유전의 노동자들에게 흥미를 느꼈다. 저우언라이도 동감했다. “인생은 체험이다. 다칭은 사방이 눈과 얼음이다. 진정한 예술가가 되려면 그 곳에 가서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해라.” 쑨웨이스는 남편 진산(김산·金山)과 함께 다칭으로 이사했다.

다칭에 도착한 쑨웨이스는 현장으로 달려갔다. 하루 일과가 끝나면 온몸이 진흙투성이였다. 환경은 열악했다. “따뜻한 밥과 야채 한 접시가 그립다”고 일기에 적었다. 훗날 식당 아줌마가 구술을 남겼다. “계란처럼 예쁜 얼굴이 겨울의 한풍(寒風)과 여름의 태양을 거치며 검게 변해갔다. 누구 집 딸이냐고 물었더니 다칭 노동자의 딸이라며 웃었다. 힘든 일을 할 수 있느냐고 물을 때마다 남들이 하면 나도 할 수 있다고 했다. 대변 치우는 일도 도맡아 했다. 이곳은 평범한 영웅들이 있는 곳이다. 언제고 이들을 노래하겠다고 했을 때 무슨 말인지 잘 몰랐다. 한때 위대한 극작가와 함께했다는 것이 꿈만 같다.”

4인방 몰락 후, 쑨웨이스를 회상하던 다칭의 노동자들은 한결같이 울먹거렸다. “우리의 웨이스 동지는 열정 덩어리였다. 우리들과 함께 먹고, 함께 일하고, 같은 방에서 생활했다. 무슨 일을 하건 전쟁터에 나온 사람 같았다. 잘난 척 하는 법도 없었다. 화를 내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더니, 여기는 화낼 사람이 없다고 했다. 피곤함이 뭔지를 모르는 사람 같았다. 노동자들의 사랑을 받는 진짜 노동자였다. 중국의 홍색공주라는 말을 듣고도 우리는 놀라지 않았다. 웨이스 동지야말로 우리의 공주였기 때문이다. 비참하게 죽었다는 말을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쑨웨이스는 다칭 생활 2년 만에 다칭의 노동자와 가족들을 주제로 한 극본 한 편을 완성했다. 문제는 연기자였다. 다칭에서 생활해보지 않은 전문 연기자들은 배역을 소화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쑨웨이스는 다칭의 노동자와 가족들을 무대에 올렸다. 공연은 성공적이었다.

중국 홍군의 창설자 주더(왼쪽)와 쑨웨이스의 부친 쑨빙원(孫炳文). 1918년 봄으로 추정.
1966년 봄, 다칭의 노동자와 가족들이 베이징의 공인문화궁(工人文化宮) 무대에 섰다. 관람을 마친 저우언라이는 “진짜 연극을 봤다”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베이징 주재 외교관들에게 관람을 권했다.
원수(元帥) 예젠잉(葉劍英·엽검영)은 전군에 지시했다. “연기자가 따로 없다. 사람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배우다. 군인과 군인 가족들도 쑨웨이스와 다칭의 노동자들에게 배워라.” 연극은 베이징과 다칭, 산둥(山東)에서 1년간 200여 차례 무대를 장식했다.

장칭은 쑨웨이스의 극본을 현대경극으로 개편할 생각을 했다. 중국희극원으로 비서를 보냈다. “만나서 의논할 일이 있다.” 며칠이 지나도 쑨웨이스는 나타나지 않았다. 직접 집으로 찾아가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쑨웨이스를 만난 장칭은 함박웃음을 지었다. “현대경극으로 개편할 극본을 찾는 중이다. 네 극본이 맘에 든다. 합작하자.” 쑨웨이스는 거절했다. “나는 내 일을 하겠다. 합작은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장칭은 다음날 예췬과 함께 다시 쑨웨이스의 집을 찾았다. 또 거절당하자 잘 생각해 보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떴다. 돌아오는 차 안에서 화를 내자 예췬이 진정시켰다. “아직 젊어서 그런지 애들 티를 못 벗었다. 하는 짓이 귀엽긴 하지만 성숙되긴 틀렸다. 20여 년 전 하얼빈에서 처음 볼 때부터 꼴 보기 싫었다. 세상에 없는 애로 치자.” 장칭도 고개를 끄덕였다. <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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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급변사태와 안정화 전략’을 주제로 북한학 박사를 받았다. 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ㆍ군사기획연구센터와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북한연구센터에서 군사ㆍ안보ㆍ북한을 연구했다. 2016년부터는 중앙일보에서 군사ㆍ안보 분야 취재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