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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범의 생각지도…] 항명의 추억

이훈범
논설위원
안 보려는데 자꾸 보인다. 편견이라 믿는데 떨쳐지지 않는다. 우리 대통령 주위에 어른거리는 아버지의 그림자 말이다. 딸이 아버지 닮는 걸 어찌 탓하랴마는 그 기운이 꼭 상서롭지만은 않아서 걱정스럽다.



 대통령은 자기가 소속한 당의 원내대표한테서 ‘항명(抗命)’의 기운을 느꼈으리라. 대통령과 다른 생각이 ‘자기 정치’로 읽혔을 테고 친박들의 입을 빌려 경고했는데도 바뀌지 않음이 ‘배신’으로 다가왔을 터다. 뜻을 거스르는 자는 응징해야 한다. 이미 봤던 일이다.



 1969년이다. 야당인 신민당이 권오병 문교부 장관 해임결의안을 발의한다. 그런데 몇몇 공화당 의원들이 지도부 뜻을 거슬렀다. 찬성표를 던져 해임안을 통과시켰다. 이른바 ‘4·8 항명 파동’이다. ‘3선 개헌’에 반대하던 구주류 김종필계가 개헌안 발의를 막기 위해 세를 과시한 것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진노했다. 자신에 대한 정면도전이자 반당행위로 규정하고 숙당(肅黨)을 지시했다. 이에 주동자급 의원 5명(양순직·예춘호·정태성·박종태·김달수)이 의원총회에서 제명된다. 자기정치가 싱겁게 진압되고 배신은 확실히 응징된 것이다. 이후 40명에 달하던 개헌 반대 의원들은 모두 개헌 지지로 돌아섰고, 그해 9월 개헌안은 예정된 수순에 따라 통과되고 만다.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사퇴하는 과정과 참 많이 닮았다.



 1971년에도 있었다. 야당이 제출한 오치성 내무부 장관의 해임건의안이 통과됐다. 공화당에서 나온 찬성표가 20표가 넘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노발대발했다. 이후락 중앙정보부장에게 항명 주동자를 색출하라는 엄명이 내려졌다. 공화당 의원 23명이 중정에 끌려가 곤욕을 치렀다. ‘10·2 항명 파동’이다



 항명을 주도한 사람은 실세 4인방이던 김성곤·길재호·백남억·김진만 의원이었다. 3선 개헌의 일등공신들이다. 이들의 세력이 커지자 박 대통령은 오치성 장관에서 대대적 인사로 4인방의 수족을 자르게 시켰고 이에 반발한 4인방이 실력행사에 나선 것이다. 역시 항명은 응징됐다. 김성곤과 길재호는 결국 출당돼 정계를 은퇴해야 했다.



 이로써 공화당은 청와대를 견제할 수 있는 마지막 장치를 잃었다. 집권당의 권위를 상실하고 권력의 주변부로 밀려났다. 그 결과는 모두가 잘 안다. 종신집권이 가능한 유신헌법이 만들어지고 ‘유정회’라는 세계 정치사상 전무후무한 사이비 의원집합이 탄생했다.



 언제냐 싶던 권위주의 시대의 일이다. 그런데 오늘날의 모습이 그리 달라 보이지 않는다. 아버지 대통령에 비하면 절반의 힘도 못 가졌지만 딸 대통령도 뜻을 다 이뤘다. 국회의원 3분의 2 이상이 찬성한 국회법 개정안을 거부해 휴지통에 넣었다. 항명하는 원내대표도 날려 보냈다. 자기 뜻에 거슬러 선출됐던 국회의장과 여당 대표는 대통령 앞에서 투명인간이 됐다. 대통령의 군기잡기에 잔뜩 주눅 든 집권당의 모습도 과거와 닮은꼴이다. 원내대표를 사퇴시킨 당 대표의 일성이 “묵언(默言)”이었다. 고민이 느껴지는 말이지만 스스로 유정회가 되는 현실을 막지 못했다.



 강요된 권위에는 대가가 따른다. YS 정부 때 정무수석을 지낸 이원종 이승휴사상선양회 이사장의 신간 『국민이 만든 대한민국』 5장의 제목은 ‘누가 박정희를 쏘았나’다. 차지철 경호실장과의 파워게임에서 밀린 김재규 중정부장이 쏘았음을 우리는 안다. 이 전 수석의 생각은 다르다.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이 김재규의 손을 빌렸을 뿐이라는 것이다. 몇 차례 투표로 보여줬는데 독선과 아집에 가린 눈이 민심을 읽지 못하니 다른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그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역사의 고비마다 우리 국민은 대한민국이 나아가야 할 길을 정확히 짚어냈다. 위정자들이 그 뜻을 읽지 못해 돌아가야 했을 뿐이다. 그리고 그런 위정자들은 대가를 치렀다. 먼 길을 돌아갈수록 그 대가는 컸다. 우리는 지금 얼마나 돌아가고 있는가.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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