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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산에 밀린 주택용 전통기와 … 자동 생산 설비로 설 자리 찾겠다”

경북 고령군 개진면 전통기와 제조박물관에서 고령기와 김은동 회장(오른쪽)과 아들 김병주 대표가 불에 타 없어진 숭례문을 복원하기 위해 만들었던 기와를 들어보이고 있다. [프리랜서 공정식]
궁궐로는 경복궁 근정전·광화문과 창덕궁 인정전·낙선재, 덕수궁 중화전. 성곽으로는 수원화성과 남한산성 행궁 등. 사찰로는 부석사 무량수전과 불국사, 화엄사 각황전 등. 서원으로는 도산서원과 도동서원. 또 현대 건축물로는 국회의사당 영빈관과 남산골 한옥마을, 호암미술관 등.



고령기와 김은동 회장
경복궁·불국사에 기와 공급
70년대 ‘기와불사’ 아이디어 내
회사 대표 아들은 세라믹 전공
전통기와 박물관도 최근 준공

 이들 건축물의 공통점은 무엇일까. 모두 지붕이 기와로 덮여 있고, 그 기와는 경북 지역 고령기와가 납품했다. 국내의 웬만한 국보·보물급 문화재가 망라돼 있다. 안동에 들어서는 신도청 청사에도 고령기와 80만 장이 올려졌다. 여기에 경북도가 ‘경북형 한옥’을 개발하는 등 지방자치단체들이 한옥에 관심을 가지면서 전통기와가 다시 주목받고 있다.



 지난 2일 전통기와를 가업으로 이끌어가는 김은동(67) 고령기와 회장을 만났다. 고령군 개진면 구곡리 2층 회장실은 한옥으로 꾸며져 있었다.



 “전통기와는 일제 강점기를 거치며 맥이 끊겼어요. 대신 일본식 기와가 판을 쳤습니다. 일본기와는 우리보다 남쪽 지방이 주산지로 동파에 약해요.”



 그걸 안타깝게 여긴 선대 회장(김영하)은 1953년 국내 최고의 기와용 점토가 나는 고령에서 전통기와제작소를 만들어 복원에 나섰다. 20년 뒤 기와를 보며 자란 김 회장은 경북고를 졸업한 뒤 가업을 이었다. 전통기와의 복원에 매달려 중요 문화재 보수에 뛰어든 것이다.



 에피소드 하나. 1970년대 중반 해인사를 보수할 때다. 사찰은 예산이 걱정이었다. 김 회장은 ‘기와 불사’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신자들이 얼마씩 시주하면 대신 기왓장에 이름을 써주는 방식이었다. 십시일반으로 돈 걱정을 해결할 수 있었다. 기와 불사는 전국으로 퍼졌다. 화재로 소실된 낙산사 복원 때는 기금이 남아 비구니 사찰인 수덕사 견성암 수리도 도울 수 있었다. 제주목 관아를 복원할 때는 도민들이 앞다퉈 기와 2만 장의 기금을 내기도 했다.



 고령기와는 그동안 문화재 수리·복원 분야에서 독보적 위치를 굳혔다. 하지만 주택용 기와는 새마을운동 이후 시멘트 기와와 슬레이트에 밀려 사양 길을 걸었다. 그 많던 전통기와 공장은 하나둘 문을 닫고 이젠 전국에 10여 곳이 전부다. 특히 평판형 기와는 인도네시아 등에서 수입되는 저가 브랜드에 밀려나고 있다. 그래서 회장실이 있는 제1공장 건너편 제2공장(평판형 제조)은 지금 리모델링 공사가 한창이다. 평판형 대신 전통기와를 자동으로 생산하는 설비로 바꾸기 위해서다.



 고령기와는 2000년 3대로 이어졌다. 한양대 세라믹학과를 나온 아들(김병주)이 다시 대를 이은 것이다. 그는 개량 한식기와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제1공장 뒤쪽에는 전통기와를 만들던 도구와 가마, 그동안 문화재 수리·복원에 사용된 수막새 문양 등을 한데 모은 ‘전통기와 제조박물관’이 최근 준공됐다. 아직 준비할 게 많다며 개관은 미뤄진 상태다.



 김 회장은 “가업이 대를 이으며 기술은 발전한다”며 “우리 손주가 초등학교 2학년 때 장래 희망을 ‘와장(瓦匠)’이라고 써서 선생님을 놀라게 했다”며 내심 자랑했다. 가업을 4대까지 이으면 그건 정말 흔치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송의호 기자 yeeh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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