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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 윤필용·이후락 밀착에 진노…군에 접근 못한 2인자 … JP “박 대통령은 하나회를 알면서도 묵인했다”

1968년 10월 주월 맹호부대(수도사단) 사단장에 임명된 윤필용 소장(왼쪽)이 박정희 대통령에게 출국 인사를 하고 있다. 가운데는 김계원 육군참모총장과 조상호 비서관. 윤필용은 72년 10월 이후락 정보부장에게 “각하의 후계자는 형님”이라고 말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무너지게 된다. [사진 국가기록원]

육사 8기 출신인 윤필용은 박정희 대통령의 사람이었다. 박 대통령은 5사단장 시절(1954년) 윤필용을 처음 만나 군수참모로 썼다. 이후 7사단장, 부산 군수기지사령관으로 자리를 옮길 때마다 그를 데리고 다녔다. 윤필용은 혁명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박 대통령은 그를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기용했다.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었던 모양이다. 민정(民政) 이양 뒤 윤필용은 군으로 돌아가 육군방첩부대장(65년)을 거쳐 맹호부대장으로 월남에 다녀왔다. 그리고 70년 수도경비사령관(소장) 자리에 올랐다. 서울을 포함해 수도권을 방위하는 수도경비사령부는 핵심 권력기관 중 하나였다. 당시 4대 권력기관으로 흔히 중앙정보부, 청와대 경호실, 군 보안사령부, 수도경비사령부를 꼽았다.

 수경사령관에 오른 윤필용은 박 대통령의 총애를 믿고 상당한 권력을 행사했다. 군의 주요 보직과 장성급 인사까지 관여하면서 ‘참모총장 대리’ 역할을 하는 게 아니냐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중장·대장급 군 선배 상당수가 설날이면 윤필용의 집에 세배를 다녀갈 지경이었다. 윤필용의 수경사가 있는 곳을 가리켜 ‘필동(筆洞) 육군본부’라 칭하는 소리까지 나왔다.

 나는 그에게 관심 두지 않았다. 윤필용은 나와 육사 동기지만 그와 대화를 주고받은 기억이 없다. 가까이 지낼 생각도 하지 않았다. 그가 최고회의 의장 비서실장으로 있을 때도 나는 비서실장을 거치지 않고 직접 박정희 의장과 이야기했다. 나는 그에 대해 ‘미구(未久)에 스스로 자리를 잃을 사람’이라는 생각을 가진 적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됐다.

1973년 4월 육군 보통군법회의 법정에 나온 수경사 윤필용 사령관(오른쪽)과 손영길 참모장(육사 11기). 두 사람 모두 박정희 대통령 측근이었다. [중앙포토]
 73년 3월 윤필용이 수경사령관직에서 해임된 뒤 구속됐다. 4월 28일 육본 보통군법회의는 윤필용에게 징역 15년형을 선고했다. 업무상 횡령과 알선수뢰, 군무이탈 방조 및 비호 등의 죄목이 적용됐다. 수경사 참모장 손영길 준장 등 장교 9명에게도 징역 2~15년의 실형이 선고됐다. 대통령 최측근의 갑작스러운 몰락이었다. 이른바 ‘윤필용 사건’이다.

 사건의 발단은 72년 10월 윤필용이 이후락 중앙정보부장과 술자리에서 나눈 대화였다. 윤필용은 “각하는 연만(年晩)하시니 더 노쇠해지기 전에 물러나시게 하고 후계자를 내세워야 한다”면서 이후락에게 “(후계자로는) 형님이 있지 않습니까”라고 했다. 평양 방문과 7·4 남북 공동성명 발표, 10월 유신 추진으로 이후락의 기세가 절정에 올라 있었을 때다. 권력의 핵심에 있던 이후락과 윤필용, 두 사람이 서로 가까워졌고 둘 사이에 불충(不忠)한 이야기가 오고 간 것이다.

 중앙정보부장과 수경사령관의 대화가 보통 일이 아니라고 여기고 보고를 올린 건 청와대 대변인을 지낸 신범식 서울신문사 사장이었다. 대통령이 크게 신임하고 있는 이후락과 윤필용에 관한 일이다 보니 직접 보고를 하지 못하고 박종규 경호실장을 통해 전달했다. 박종규한테서 보고받은 박 대통령은 신범식을 불러다 재차 내용을 확인했다. 그는 대통령께 “윤필용이 그냥 지나가는 말로 한 것이 아니라 꽤 깊숙한 이야기를 했다”고 보고했다. 박 대통령은 열화와 같이 화를 냈다. 강창성 보안사령관(소장)에게 윤필용에 대한 조사를 맡겼다. 육사 8기인 강창성은 동기생 윤필용과 경쟁 관계에 있었다.

 박 대통령은 아랫사람들의 사이를 갈라놓아 서로 견제하게 만들어 개별적으로 자신에게 충성을 바치도록 만드는 용인술(用人術)을 썼다. 부하들끼리 수평적으로 뭉치는 것을 경계했다. 소위 ‘디바이드 앤드 룰(divide and rule, 분할통치)’이다.

 예를 들면 박 대통령은 이후락을 불러 “왜 JP는 당신을 내쫓으라고 하면서 돌아다녀? 자기가 당신을 추천해놓고서”라고 지나가는 식으로 이야기한다. 나는 공개적으로 이후락에 대해 평한 적이 한 번도 없는데도 말이다. 자연히 이후락은 나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졌고, 결국 점점 나와 사이가 멀어지게 됐다. 이러한 디바이드 앤드 룰을 통해 박 대통령은 권력기관 간 균형과 상호 견제 체제를 지켜왔다. 이러한 권력 운용 원칙을 거스르고 이후락과 윤필용이 결합하는 것을 그는 용인하지 않았다. 오랜 심복인 윤필용을 가차 없이 제거했다. 박 대통령은 자신의 권력에 도전하는 사람에게 무자비한 면이 있었다.

1971년 11월 1일 주월한국군사령부를 시찰 중인 김종필 총리(왼쪽). 맨 오른쪽엔 백마부대(9사단) 29 연대장 전두환 대령의 모습이 보인다. [중앙포토]
 강창성 보안사령관의 수사는 윤필용과 가까운 군내 파벌인 하나회에 불길이 번졌다. 전두환을 비롯한 육사 11기들이 주도해 결성한 하나회는 군 내 사조직이었다. 군 내부에 그런 별도 조직이 광범위하게 만들어져 세력을 확장하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박 대통령은 이를 묵인해줬다. 자신에게 해로운 조직이 아니고, 결국 자신의 세력이 되리라고 여긴 듯했다. 군 수뇌부도 하나회를 건드리지 못했다. 하나회는 그대로 두면 자칫 권력 질서를 뒤흔들 수 있을 만한 엄청난 조직으로 커 가고 있었다. 윤필용 수사 중 하나회의 실체를 파악한 강창성은 이를 뿌리 뽑아 없애려 했다.

 하나회 소속 장교들 상당수가 수사 대상에 올랐고, 하나회 회장이었던 전두환(준장)도 예외가 아니었다. 군에서 내쫓길 위기에 처한 전두환을 구하기 위해 구명에 나선 건 박종규 경호실장이었다. 박종규는 5·16 혁명 직후 최고회의 의장 경호대장으로 있으면서 전두환 민원비서관과 가까워졌다. 아마 박종규는 본인의 권력을 키워나가기 위해 군부 내에 자기 사람을 키우려는 생각이었을 것이다. 일종의 동류상린(同類相隣)이었다. 10·26 이후 전두환이 군부를 장악하고 권좌를 넘보게 되기까지, 이 결정적인 고비에서 박종규의 지원이 있었다.

 박 대통령은 윤필용을 가혹하게 처리했지만 이후락은 일단 살려뒀다. 괘씸하게 여겼지만 대통령으로서는 그때 그가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후락만큼 대통령의 의도를 미리 알고 그에 대처하는 수단과 방법을 조언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렇다고 그를 용서한 것은 아니었다. 이후락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임은 추락했다. 초조해진 이후락이 궁리 끝에 죽을 꾀를 낸 것이 바로 김대중 납치 사건이다.



 윤필용 사건에서 나는 어디까지나 외부 관찰자의 입장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 문제에 대해 나에게 직접 얘기한 적이 없었다. 대통령의 자존심을 봤을 때, 부하가 자신을 물러나게 하려는 마음을 품었다는 사실을 내게 털어놓을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윤필용 사건의 여파는 국무총리였던 내게도 미쳤다. 그 이후로 박 대통령은 내가 군에 접근하는 것을 싫어하고 경계했다. 자신의 권력에 틈을 만들까 걱정했다. 박 대통령이 내게 “군에 대해 개입하지 말라”고 직접 말한 적은 없지만 그의 태도로 알 수 있었다.

 그때까지 나는 예비역 육군 준장이자 국무총리로서 수시로 군부대를 찾아가 위로하고 격려해줬다. 군대가 착실해야 이 나라도 제대로 설 수 있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군에서 비교적 인기가 있는 편이었다. 나와 가까이 지내려는 군 요인들도 적지 않았다. 총리로 취임한 뒤 71년 11월엔 월남에 가서 주월사령부를 시찰했고, 새해를 맞이하면 전후방 부대를 연두순시했다. 73년 2월엔 박 대통령의 지시로 경기도 수원 공군기지에서 열린 주월 백마부대 개선환영식에 대통령 대신 참석하기도 했다. 영하 10도의 늦추위 찬바람이 몰아치는 비행기 활주로 단상에 서서 치사를 하는데, 갑자기 머리에서 ‘쾅’ 하는 굉음이 울리더니 정신이 아찔했다. 그날 총리 공관으로 돌아오자마자 과로로 쓰러져 2주간 요양해야 했다. 그때까진 내가 군부와 접촉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하지만 윤필용 사건 뒤 박 대통령의 태도가 달라졌다. 한번은 내게 “군에 가서 너무 그러지는 마”라며, 걱정인지 충고인지 분간하지 못할 애매한 말씀을 하기도 했다. 내가 친분이 있는 군인들과 만나는 것에 대해 견제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내가 엉뚱한 생각을 품고 군대를 손질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고 경계했다. 내가 군에 끼어들어서 치고 나갈 가능성이 있다고 본 것이다. 나는 ‘아, 대통령이 내가 군과 가까이 지내는 걸 싫어하시는구나’라고 느끼고 73년 윤필용 사건 이후로 군에서 일절 손을 끊고 담을 쌓았다. 75년 말 총리를 그만둔 뒤엔 더 말할 나위 없이 군부와 거리를 두었다. 훗날 권력을 잡게 되는 전두환의 신군부와도 일절 교류가 없었다. 박정희 대통령 시절 내가 접근하지 않은 층은 세 군데였다. 군대·청와대·사법부였다. 청와대와 관계된 사람들과는 만나도 말을 거의 나누지 않았다. 그저 ‘별천지에 있는 사람들’이라고 여기고 거리를 뒀다. 대통령이 경계하고 견제할 걸 알았기 때문이다.

 박 대통령은 이후락·윤필용·하나회처럼 경계해야 할 대상은 옆에 키워놓고서 쓸데없이 나를 경계했다. 대통령 자리를 빼앗은 이집트 혁명가 나세르 같은 인물로 나를 봤기 때문이다. 정작 신경 써야 할 위험한 대상은 따로 있었는데도 말이다. 박 대통령의 약점이 거기에 있었다. 그것이 바로 권력 종말의 시작이었다.


◆하나회=전두환·노태우·김복동 등 육사 11기(정규육사 1기)생이 주도해 1963년 결성한 군 내 사조직. 36기까지 육사 기수별로 경상도 출신 장교를 중심으로 10명 안팎씩 선발했다. 선후배끼리 서로 군 내 요직으로 끌어주면서 세력을 키웠다. 73년 윤필용 사건을 계기로 실체가 드러나면서 관련자들이 처벌받았다. 이후 다시 세력을 확장해 79년 12·12 군사반란, 80년 5·17 비상계엄 확대로 실권을 장악했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 탄생의 기반이 됐다. 문민정부 출범 직후 김영삼 대통령이 김진영 육군참모총장(육사 17기)과 서완수 기무사령관(19기)을 전격 교체(93년 3월)한 뒤 급속히 무너졌다.

◆수도경비사령부=1961년 6월 수도를 방위하기 위해 창설된 군사령부. 창설 당시 수도방위사령부였던 이름이 63년 12월 수도경비사령부로 개칭됐다. 68년 1·21 사태 이후 대침투작전 임무가 추가됐다. 84년 군단급 부대인 현재의 수도방위사령부로 확장됐다. 수경사 30대대(그 후 30경비단)는 경복궁에 주둔한 청와대 근위부대로, 장교들의 출세 코스였다. 전두환 전 대통령은 중령 시절 30대대장을 지냈다. 30경비단은 79년 12·12 사태 때 신군부 세력의 모의·지휘 장소로 이용됐다. 김영삼 대통령 시절인 96년 30경비단은 33경비단에 통폐합돼 제1경비단으로 바뀌었다.

● 인물 소사전 강창성(1927~2006)=경기도 포천 출신으로 육사 8기. 5·16에 가담하지 않았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신임을 받아 1971년 보안사령관에 올랐다. 73년 윤필용 사건과 하나회를 수사하면서 군 내 영남세력과 충돌했다. 73년 8월 3관구사령관으로 밀려났으며 76년 소장으로 예편한 뒤 초대 해운항만청장을 지냈다. 하나회 중심의 신군부가 80년 정권을 잡은 뒤 2년 반 동안 옥살이를 했다. 14대(92년 민주당)·16대(2000년·한나라당) 전국구 의원을 지냈다.

정리=전영기·한애란 기자 chun.younggi@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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