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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433>
쑨웨이스는 남편 린뱌오(林彪·임표)와 함께 소련에 와 있던 장메이(張梅·장매)와도 친 자매처럼 지냈다. 장메이와 쑨웨이스는 성격이 비슷했다. 활달하고 사람 모이는 곳을 좋아했다. 영화관과 댄스홀, 어디를 가건 붙어 다녔다. 내성적인 린뱌오가 자신을 좋아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귀국을 앞둔 린뱌오가 쑨웨이스를 찾아왔다. “중국에 돌아가면 장메이와 이혼하겠다. 네가 올 때까지 기다리겠다.” 쑨웨이스는 가타부타 말을 하지 않았다.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대담한 쑨웨이스는 장메이를 불러내 귀국을 만류했다. “네 남편은 딴 생각을 하고 있다. 허즈쩐처럼 되지 않으려면 돌아가지 마라.” 장메이는 무슨 말인지 금방 알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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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웨이스는 태평양 전쟁이 끝날 때까지 6년 간 소련에 머무르며 연극에 매진했다. 일본이 패망하자 소련 공산당 대외연락부에 귀국 신청서를 보냈다. 거절당할 이유가 없었다. 저우언라이는 올해 5월 세상을 떠난 리리싼(李立三·이립산)의 소련 부인 리샤와 함께 동북으로 귀국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하얼빈에 도착한 쑨웨이스는 중공 동북국의 환대를 받았다. 당시 동북국의 최고 책임자는 린뱌오였다. 쑨웨이스는 일행 세 명과 함께 린뱌오의 숙소를 찾아갔다. 한 사람이 구술을 남겼다. “군복 입은 젊은 여자가 문을 빼꼼이 열고 누구냐고 물었다. 린뱌오를 만나러 왔다고 하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동북에서 감히 린뱌오 이름을 직접 거론하는 사람이 없을 때였다. 쑨웨이스가 린뱌오와 잘 아는 사이다, 방금 소련에서 돌아왔다고 하자 들어오라고 청했다. 옆방에 가서 어딘가 전화를 하더니 차를 들고 나왔다.” 젊은 여인은 직접 자신을 소개했다. “나는 린뱌오의 부인이다. 예췬이라고 한다.”
군복을 입고 나타난 린뱌오는 중공 최강의 야전군을 지휘하는 사람답지 않았다. 쑨웨이스를 보자 안절부절못하며 당황했다. 예췬은 총명한 여자였다. 뭔가 이상하다는 낌새를 채자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끝내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옌안에 돌아온 쑨웨이스는 마오쩌둥의 거처로 직행했다. 경호원들이 제지하자 실랑이가 붙었다. 귀에 익은 목소리를 들은 장칭이 밖으로 나왔다. 경호원들에게 단단히 일렀다. “저우언라이 부주석의 딸이다. 앞으로 제지하지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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훗날 쑨웨이스의 남편은 직접 들은 얘기라며 두 사람의 대화를 회고록에 남겼다. “장칭이 먼저 물었다. 네 눈에 내가 어때 보이냐? 웨이스는 인사치레로 좋아 보인다며 웃었다. 장칭은 음험한 표정을 지었다. 좋은 게 눈곱만큼도 없다. 언젠가는 저것들을 쓸어버리고야 말겠다.”
헤어질 무렵, 장칭이 쑨웨이스의 손을 잡았다. 잠시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너는 갓 돌아왔기 때문에 이곳 사정을 잘 모른다. 차차 알겠지만 나쁜 사람들이 많다. 나와 우리 엄마를 형편없는 사람 취급한다. 우리 모녀를 내쫓으려는 사람도 있다. 너는 저우언라이 부주석과 덩잉차오의 딸이다. 나는 주석의 부인이다. 우리가 힘을 합해 저들에게 맞서자.” 쑨웨이스는 장칭의 손을 뿌리쳤다.
국·공 내전이 발발하자 쑨웨이스는 전쟁터를 누볐다. 선무공작을 펼치며 직접 전투에도 참가했다. 어딜 가나 창작 소재가 넘쳤다.
1949년 봄, 베이핑(北平)이 붉은 깃발로 뒤덮였다. 쑨웨이스도 문예공작자들과 함께 베이핑에 입성했다. 한동안 베이징반점(北京飯店)에 머물렀다. 하루는 볼일 보고 돌아오다 1층 로비에서 예췬과 조우했다. 예췬도 같은 곳에 묵고 있었다.
쑨웨이스와 마주한 예췬은 얼굴을 찡그렸다. 독한 말을 내뱉었다. “넓디넓은 하늘 아래, 하필이면 너와 한 곳에 묵다니” 쑨웨이스는 대꾸도 하지 않았다. <계속>
김명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