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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업화·민주화 다음은 복지사회 통한 ‘공화’

위험은 무조건 피해야 할 회피대상만은 아니다. 슘페터가 지적한 것처럼 사회 발전은 혁신에 따르는 위험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려는 진취적 태도로부터 가능해진다. 영국의 토니 블레어 전 총리는 정부의 핵심 역할을 ‘혁신과 변화라는 한 축과, 충격과 위기관리라는 또 다른 축 간의 균형’에서 찾았다. 위험관리는 정부에 부담이 아니라 혁신을 통해 공공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한다는 뜻이다.

이중불안 한국사회 어디로

 그러나 위험관리 역량이 취약한 2015년 한국은 두 개의 전선(戰線)을 가진 불안사회다. 첫째는 아직 청산하지 못한 과거형 위험이다. 졸속적 근대화 과정에서 빈발한 실패로부터 제대로 배우지 못한 결과,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둘째, 빠른 속도로 다가오는 미래 위험이다. 세계화와 네트워크화로 복잡하게 얽히고 긴박하게 맞물린 세계에서 돌발적 재난이 증가하고, 광범한 기술 진보와 고삐 풀린 자본의 전 지구적 쏠림으로 인해 노동의 종말이 현실화했다. 출산과 진학, 군대 경험, 연애와 결혼, 출산과 부양, 전직과 은퇴 등의 생애 전 과정이 모두 위험으로 인식되는 반면 전통적인 안전장치인 가족과 공동체는 와해되었고, 국가의 복지투자는 아직 초보 수준이다. 그 격차만큼 자살자도 급증하고 있다.

 이중불안사회를 풀어갈 키워드는 ‘함께 사는 능력’이다. 사회적 관계의 수준이라는 점에서 ‘사회의 질(social quality)’이라 불러도 좋다. 그런데 한국의 ‘함께 사는 능력’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들 중 꼴찌다. 사람이나 제도에 대한 불신이 심각하고, 규칙의 공정성도 믿지 않는다. 정치는 냉소의 대상이고, 차별과 배제가 판친다.

 이러한 현실을 뒤집을 거버넌스 개혁의 핵심은 ‘공공성 제고’다. 그리고 그것은 국가개조 수준의 경장(更張)을 필요로 한다.

 첫째, 제도의 공익성을 높여야 한다. 세월호 침몰 상황에서 구조 활동을 포기하고 민간 기업에 구조를 맡긴 해경이나, 메르스 파동 때 공공병원이 부족해 쩔쩔맨 보건복지부의 사례는 공익성 개념이 없는 국가의 민얼굴을 보여줬다. 외부성 효과가 큰 위험일수록 민간이나 시장에만 맡길 수는 없다. 전쟁에 대비해 군대가 필요하듯, 대규모 재난에는 공공방재조직이, 감염병에는 공공병원이 잘 갖추어져야 한다. 사회적 위험에 대비해 복지 지출과 사회서비스도 확대돼야 한다.

 둘째, 제도의 공정성을 높여야 한다. 친소 관계에 따른 연고(緣故) 동원이나, 부패 고리를 통해 불법과 탈법을 눈감아 주는 밀실거래와 야합을 벗어나야 숙성형 재난을 피할 수 있다. 공정한 과세와 복지비 지출이 이루어져야 ‘새로운 사회적 위험’을 정교하고 효과적인 ‘적극적 노동시장정책’을 통해 극복할 수 있고 건전한 재정 균형도 이룰 수 있다.

 셋째, 공개성과 투명성이다. 투명성의 결여는 재난의 원인으로 작용했을 뿐 아니라 사후 처리 과정에서도 반복되었다. 비밀주의는 정부에 대한 불신을 잉태하고, 사회적 증폭 과정을 거쳐 심각한 사회적 갈등을 낳았다. 규칙의 투명성과 기관에 대한 신뢰를 획기적으로 개선하지 않는 한 불안의 사회적 증폭을 막을 수 없다.

 넷째, 시민들의 참여를 확대할 수 있는 정치개혁이다. 승자 독식의 단임제 대통령과 양당 독점체제로는 이중불안사회의 복잡한 문제를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비난의 정치에 몰두하다 보니 과거형 재난으로부터 배우는 데도 실패했고, 미래형 위험에 대한 선제적 대비에도 실패했다. 이중불안사회의 증상들을 치유하려면 시민들이 직접 자신들의 문제에 대해 토론하는 공론장이 활성화돼야 한다. 또한 시민들의 요구에 부응하는 정치인들이 성장할 수 있게 정당 공천의 기준이 비례성 위주로 바뀌어야 한다.

 광복 70년. 산업화로 ‘성장’을, 민주화로 ‘자유’를 구현한 한국이 지향할 다음 단계는 복지사회를 통한 ‘공화’(共和)의 구현이다. 파국적 위험에 대비한 공익적 제도, 공정한 규칙, 높은 신뢰와 개방성, 그리고 시민적 참여의 확대를 통해 우리는 ‘각자도생’을 넘어 ‘함께 사는 안심사회’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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