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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딜 가나 긴 줄 … 미국 제재 뒤 기다림 속 희망 찾기 생활화

쿠바에서는 어디를 가든 사람들이 길게 서 있는 줄을 쉽게 볼 수 있다. 그 길고 긴 기다림에서도 쿠바인들은 희망을 찾아낸다. [사진 정승구]
“울티모(ltimo)?”

쿠바에서 본 쿠바의 미래 <9>

나의 외침에 현금인출기에서 한 10m 떨어진 버스 정류장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손을 흔든다. 쿠바에서 무엇인가를 기다리는 줄은 우리가 알고 있는 줄과는 좀 다르다. 물론 쿠바의 줄 역시 기하학적으론 점과 점을 잇는 엄연한 선이다. 하지만 긴 줄과 기다림에 너무나 익숙한 쿠바인들은 자신의 앞사람과 뒷사람을 확인하고 가까운 그늘에서 서성이며 딴 일을 보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쿠바에서 기다리는 줄이 있는 곳에 가면 먼저 “마지막(울티모)?”이라고 물어서 누가 마지막인지 확인하는 것이 에티켓이다.

쿠바에서는 가는 곳마다 줄이고 기다림이다. 그래도 다들 불만 없이 기다린다. 이 나라의 진짜 국민 스포츠는 야구가 아니라 기다림이다. 물론 ‘국민 스포츠’의 가장 큰 원인은 반세기 이상 지속돼 온 미국의 경제제재였다.

시외로 가는 대중교통편이 거의 없는 쿠바에서 주민들은 덤프트럭을 애용한다.
도로의 바닷게는 운전자에겐 ‘지뢰’
내가 쿠바 동남쪽 산티아고로 간다는 얘기를 들은 페페와 다리아나는 자신들을 카마구에이까지 데려다 달라고 부탁했다. 어차피 가는 길이었다. 오래전부터 가고 싶었지만 기회도, 여건도 마땅치 않았다고 했다.

시외로 나가는 대중교통이 거의 전무한 쿠바에서 일반인들이 국토를 가로질러 여행하기란 보통 불편한 일이 아니다. 비행기는 너무 비싸다. 완행열차는 많지도 않고 시간도 맞지 않는 데다 고장까지 잦아서 언제 어디에 도착할지 기약할 수 없다. 만약에 버스를 갈아타면서 아바나에서 카마구에이까지 가려면 사흘 정도는 고생해야 한다.

쿠바의 국도를 달리다 보면 사람들을 가득 싣고 가는 덤프트럭을 볼 수 있다. 이 또한 쿠바인들이 자주 활용하는 ‘대중교통’이다. 하지만 쿠바인들이 가장 보편적으로 이용하는 시외 교통수단은 히치하이킹이다. 그래서 도시 밖으로 나가면 편승을 기대하는 히치하이커들을 종종 만날 수 있다.

도로 사정 역시 큰 문제다. 고속도로는 아바나 서부에서 산타클라라까지만 있고, 낙후된 국도는 제한속도는 없지만 마음대로 달릴 수 있는 상태가 아니다. 표지판도 없는 편도 1차선 도로라서 위험한 데다 차와 마차, 오토바이와 자전거, 버스와 트럭, 때로는 소떼까지 함께 사용하기 때문이다.

아침부터 폭우가 내려서인지 달려도 달려도 도로엔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카리브 해안의 천둥·번개는 실로 천지개벽을 연상시킬 정도로 웅장했다. 먹구름과 장대비를 동반한 폭우는 아침 해를 집어삼키고 비와 빛을 큰 소리로 땅에 꽂아 댔다. 하지만 이보다 더 무서운 존재들은 따로 있었다. 폭우에 쓸려 국도 위로 나온 바닷게들이었다. 내리는 비에 시야 확보가 어려워 그 ‘지뢰’들을 못 피하고 밟아 타이어가 찢어지면 정말 골치 아픈 상황이 될 수 있었다. GPS는 고사하고 전화도 안 되는 허허벌판에서 비 맞는 고생을 감수할 만큼 우리는 바쁘지도 급하지도 않았다.

쿠바의 국도는 도로 상태가 그리 좋지 않다. 한쪽이 주저앉아 있는 곳도 많다.
단전 때문에 주유할 수 없는 주유소
“42년산인데 디젤로 개조했군요. 칠도 여러 번 했어요.” 페페는 주유소에 늘어선 차들의 연식과 메이커 등을 내게 가르쳐주며, 쿠바의 올드카들 대부분은 디젤 엔진으로 개조된 차량들이라고 설명했다.

우리가 들른 주유소의 풍경은 아주 기이했다. 아무도 주유를 하지 않고 사람들은 모두 주유소 안 식당에서 하나같이 콘아이스크림을 먹고 있었다.

“아침에 천둥·번개로 전력이 다 끊겨서 펌프가 작동 안 한대. 전기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릴까, 아니면 다음 주유소로 갈까?” 하비에가 내게 물었다.

영업은 하지만 주유를 할 수 없는 주유소. 쿠바에서만 가능한 현상 같았다.

“비도 그쳤는데, 기름 넉넉하면 그냥 가지.”
“많진 않지만, 주유소 직원 말대로라면 20분만 가면 있대.”

주유소가 있다는 갈림길은 20분이 아닌 40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그러나 진짜 문제는 그게 아니었다. 불과 100m 정도 앞의 주유소와 우리 사이에 있어야 할 다리가 보이지 않았다. 무너져 내린 다리 아래로는 강물이 빠르게 흘렀다. 나중에야 들은 얘기지만 쿠바의 시골에서는 폭우로 도로 일부가 움푹 파이거나 꺼지는 수준을 넘어, 작은 다리가 끊기는 일이 간혹 있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차를 돌렸다. 기름이 간당간당했다. 하비에는 별의별 짓을 다해가며 연료를 아끼려고 노력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차는 멈춰 서고 말았다.

태양은 우리 모두를 말려버릴 듯 이글거렸다. 일단 차를 그늘진 곳으로 밀어야 했다. 상태가 안 좋아 보이는 다리아나에게는 차 안에 있으라고 했지만, 그녀는 내려서 걷겠다고 했다. 페페와 내가 차를 밀었다. 페페는 의외로 힘을 잘 못 썼고 요령도 없었다. 짜증이 난 하비에가 자신이 차를 밀 테니까 페페에게 운전대를 잡으라고 했다.

“저…운전면허 없는데요.”
“면허? 장난하냐? 그냥 잡고 걸어가면서 좌우로 조금씩만 틀면 되잖아.”
“그게…운전해본 적이 없어서 좀 자신이 없는데….”
“아까 차에 대해 아는 척 한 건 뭐였어?”
“아, 그건… 친구가 택시를 몰아서요.”

하비에가 페페를 째려보며 다시 운전대를 잡았다. 그늘을 향해 걷는 다리아나를 따라 남자 셋이 차를 밀었다.

나무 그늘 아래도 만만치 않게 뜨거웠다. 커다란 뿌리에 걸터앉자 반바지의 엉덩이 부분이 민망할 정도로 흠뻑 젖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아 보이는 다리아나가 걱정됐지만 휴대전화는 신호가 잡히지 않았다.

아무도 오지 않는 길 위로 피어나는 아지랑이를 얼마나 보고 있었을까. 언덕을 넘어 뭔가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무인도에 조난당한 선원들처럼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잠시 후 모습을 드러낸 고급 관광버스는 손을 흔드는 다리아나 옆에 멈춰 섰다. 버스 운전사와 얘기를 하던 다리아나가 하비에를 불렀다. 세 사람은 몇 마디 더 주고받았다. 하비에가 끄덕이며 뭔가를 종이에 적어서 다리아나에게 건넸다. 다리아나는 우리에게 손을 흔들더니 버스에 올라탔다. 그러자 버스는 다시 출발했다. “유럽 관광객들을 태우고 산티스피리투스까지 가는데 빈자리가 하나 있대. 다리아나가 에어컨 바람이라도 좀 쐬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먼저 가라고 했어. 거기에 사는 우리 누나네 전화번호를 적어줬으니까 괜찮을 거야.”

쿠바인의 국민 스포츠가 된 기다림
다시 한참을 기다렸다. 이번에는 자전거 두 대가 나타났다. 우리는 두 청년의 생수를 받아 마시며 상황을 설명했다. 청년들은 자동차 길이 아닌 사탕수수밭 사이의 지름길로 가면 주유소에 금방 다녀올 수 있다고 했다. 페페는 자기가 자전거의 뒤에 서서 타고 주유소를 다녀오겠다고 했다. 기름을 사 올 사람은 한 명이면 족했고, 어차피 우리는 길가에 세워둔 차를 지켜야 했다. 내가 휘발유 살 돈을 건넸지만 페페는 사양했다.

하비에와 나는 그늘 밑에 자리를 잡고 앉아 다시 기다렸다. 작아져 가던 자전거 두 대가 시야에서 사라졌다. 더위는 짜증을 넘어 건강을 위협하는 수준이었다. 다시 시간이 흘렀다. 아주 천천히.

“우리 쿠바인들이야 더위에 익숙하고 기다림에도 도가 텄지만… 괜찮아?”

“죽기야 하겠어? 기다리면 오겠지.”

“기다림이 있는 인생은 안 죽어. 인생이란 일어나지도 않을 일을 막연하게 기다리는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인생의 본질을 논하며 기다리는데 저 멀리 자전거 두 대가 보였다. 배낭을 멘 페페는 좌우로 살짝 휘청거리면서도 열심히 자전거를 몰고 있었다.

“페페!” 드디어 사우나에서 해방될 수 있다는 기대감에 나는 손을 흔들며 외쳤다. 그러자 신이 난 페페는 안장에서 일어나 페달을 더욱 힘차게 밟았다. 위기 탈출에 크게 기여한 것이 뿌듯한지 표정이 한결 밝아져 있었다. 배낭에서 기름이 든 페트병 두 개를 꺼내며 생색을 냈다. “CUC가 있어서 주유소 직원이랑 흥정을 잘할 수 있었어요. 그래서 아주 싼값에 샀죠.”

CUC는 쿠바인들이 유로화 다음으로 선호하는 현찰로, 외국인 전용 화폐다. 그래서 아마 페페는 주유소 직원이 ‘빼돌린’ 기름을 싸게 구입할 수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데 기름값을 물어보던 하비에의 표정이 갑자기 굳어졌다. “혹시 이거… 디젤 아냐?”

그러자 이번에는 페페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현기증을 느끼며 그 자리에서 쓰러질 뻔했다. “아, 이 차는 렌터카라서 휘발유였죠….”

기어들어가는 페페의 말을 듣던 하비에가 버럭 고함을 질렀다. “아까 내가 말했지! 이 차는 휘발유라고! 뭐?! 차에 대해 많이 안다고 잘난 척하더니 타고 있는 차가 휘발유 차인지도 몰라?”

페페가 가져온 생수로 탈수증은 간신히 면할 수 있었다. 이제 페페와 내가 주유소로 간 하비에를 기다리고 있었다. 왜 다들 떠나는데 나만 기다려야 하나. 쿠바의 국민 스포츠인 ‘기다림’을 왜 이방인인 나만 누리고 있는 걸까.

미국과의 재수교 … 54년 기다림의 결실
모든 기다림에는 기대감 또는 희망이 동반한다. 인내심은 그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꾸준히 버티는 힘이다. 세상에는 애타게 기다려도 오지 않는 사람이 있고, 또 아무리 기원해도 들리지 않는 소식이 있다. 그러나 우리는 만나야 할 사람은 반드시 만나고, 또 이뤄져야 할 일은 꼭 이뤄진다고 믿으며 산다.

며칠 전 쿠바와 미국은 54년 만에 국교 회복에 합의했다. 많은 이가 이 조치가 인내심을 갖고 싸워 온 쿠바인들의 승리이자, 역사적 정의라고 생각한다. 반세기 넘는 기다림에 그렇게 마침표를 찍은 쿠바인들은 이제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 아마 그 여정 어딘가에는 ‘울티모’라고 외쳐도 아무 반응이 없는, 아니 그렇게 외치지 않아도 되는 날들이 분명히 포함돼 있을 것이다.



정승구 영화감독, 작가. 미국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하버드대에서 정책학을 공부했다. 쿠바를 좋아한다. 크리에이티브 논픽션 『쿠바, 혁명보다 뜨겁고 천국보다 낯선』을 썼다.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의 각본을 쓰고 연출하고 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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