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많은 문서에 ‘비밀’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지만 민주 국가에서는 비밀거리라 할 수 없는 자료가 다수였다. 내가 집중적으로 수집한 소련 가계조사 자료는 소련 주민의 소득과 지출 내역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이었다. 1950년대부터 해마다 수만 명의 가구를 패널 조사한 이 자료는 미국의 가계조사보다 규모가 몇 배나 컸다. 그러나 이 자료는 막대한 예산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비밀’이라는 딱지가 붙여졌기 때문에 연구에 거의 활용되지 못했다. 그 결과 소련의 생필품 부족이 어느 정도인지 소련 정부도 알 길이 없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생필품을 사야 하는 소련 주민의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련 정부는 애써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소련이 통계를 감추었다면 북한은 감출 통계마저 별로 없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통계로 움직여야 하는 체제인 데 반해,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작성되는 통계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공통적인 간행물인 통계연감을 북한은 1960년대부터 발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가장 기초적인 경제통계인 국민소득도 발표하지 않는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0년의 북한 경제성장률 추정치를 북한은 “잡소리”라고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의 성장률 통계를 내놓지 못했다.
통계가 없으면 경제정책을 제대로 세우고 집행할 수가 없다. 경제 주체가 통계를 알고 행동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효율성도 누릴 수 없다. 또한 IMF와 같은 국제금융기구에도 가입할 수 없다. 최근 북한이 AIIB 가입을 노렸으나 중국으로부터 거부된 이유 중 하나도 통계 문제일 것으로 짐작된다. 외국투자가들도 북한 투자를 꺼릴 것이다. 각종 경제 및 사회 통계를 제시해 투자에 따르는 기대편익과 리스크를 가늠할 수 있어야 외국인 투자가 들어갈 것이다. 투자박람회에서 통계를 요청하는 외국투자가들에게 북한은 우리를 믿어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는 이야기는 통계가 없어 북한이 치르는 기회비용을 상징한다. 북한이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국제 사회의 도움을 얻어 경제 통계를 작성, 발표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국 정부도 사실이나 통계를 숨기려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번 메르스 사태 초기에 환자가 발생한 병원들을 공개하지 않은 치명적 실수는 우리 정부의 대(對)국민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국민은 모르는 것이 낫고, 알면 골치 아프게 하거나 위험한 일을 벌이기 십상이라는 태도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한국 정부의 의사결정이 아직 소련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북한 경제 데이터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가 갖고 있는 북한 관련 데이터의 상당수가 비밀로 취급된다. 합리적인 이유를 넘어 “공개되면 피곤해진다”는 공무원의 보신주의 때문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북한이탈주민을 조사한 개인별 자료는 공개 불가다. 자료로부터 개인을 특정할 수 없게끔 처리한 다음 연구자에게 공개할 수 있음에도 요지부동이다. 이는 북한이탈주민의 정착을 도울 수 있는 연구의 문을 국민의 세금을 들여 오히려 닫고 있는 셈이다. 통계를 감추는 나라는 쇠하고, 통계가 없는 국가는 망한다.
김 병 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