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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통계가 없는 나라, 감추는 나라

김병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1994년 러시아 통계청장으로부터 과거 소련의 비밀 통계를 열람하도록 허락받은 그날을 잊을 수 없다. 통계청 무장 경비원의 매서운 눈초리를 느끼며 문서열람실로 직행한 나에게 문서보관원 할머니는 이 비밀문서의 열람을 내국인도 아닌 외국인에게 허락한 것은 수십 년 동안 처음 있는 일이라면서 의아해했다. 그녀가 갖고 있는 공문에는 반드시 지정된 문서만 열람실에서 보도록 하라는 지시가 담겨 있었고 그 밑에는 이를 엄수하겠다고 확인하는 5개의 도장이 나란히 찍혀 있었다. 그러나 마지막 도장을 찍었던 그 할머니는 자신이 은퇴할 날이 가깝고 몸도 힘들다면서 아예 나를 데리고 문 없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의 비밀문서보관소로 내려갔다. 그러고는 자기는 돌아갈 테니 알아서 자료를 보라고 했다. 그동안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소련의 각종 통계문서가 먼지 가득한 보관소에 홀로 남은 내 눈앞에 활짝 펼쳐진 것이다.

 많은 문서에 ‘비밀’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지만 민주 국가에서는 비밀거리라 할 수 없는 자료가 다수였다. 내가 집중적으로 수집한 소련 가계조사 자료는 소련 주민의 소득과 지출 내역이 자세하게 기록된 것이었다. 1950년대부터 해마다 수만 명의 가구를 패널 조사한 이 자료는 미국의 가계조사보다 규모가 몇 배나 컸다. 그러나 이 자료는 막대한 예산을 들였음에도 불구하고 ‘비밀’이라는 딱지가 붙여졌기 때문에 연구에 거의 활용되지 못했다. 그 결과 소련의 생필품 부족이 어느 정도인지 소련 정부도 알 길이 없었다. 하루에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생필품을 사야 하는 소련 주민의 불만이 극에 달하고 있다는 사실을 소련 정부는 애써 감추고 싶었던 것이다.

 생필품의 공식가격을 낮추기 위해 소련 정부가 지급했던 보조금이 1980년대 말에는 국가 재정지출의 20%, 총국민소득의 12%에 달한다는 것도 비밀이었다. 이 통계를 알 수 없었던, 알려고 하지도 않았던 국제통화기금(IMF)은 러시아 정부가 가격자유화를 시행할 경우 소비자 물가가 불과 50% 정도 오를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이 정책이 단행됐던 1992년 1월, 물가는 250% 올랐고 그해 인플레이션은 2500%에 달했다. 이에 러시아는 극심한 정치적·경제적 혼란에 빠졌다. 통계를 감추고 숨긴 결과 소련의 붕괴는 앞당겨졌고 체제이행의 고통은 배가되었다.

 소련이 통계를 감추었다면 북한은 감출 통계마저 별로 없다. 사회주의 계획 경제는 통계로 움직여야 하는 체제인 데 반해, 북한은 사회주의 국가라고 하지만 작성되는 통계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모든 사회주의 국가의 공통적인 간행물인 통계연감을 북한은 1960년대부터 발간하지 않았으며, 심지어는 가장 기초적인 경제통계인 국민소득도 발표하지 않는다. 한국은행이 발표한 2010년의 북한 경제성장률 추정치를 북한은 “잡소리”라고 비판했지만 정작 자신의 성장률 통계를 내놓지 못했다.

 통계가 없으면 경제정책을 제대로 세우고 집행할 수가 없다. 경제 주체가 통계를 알고 행동하기 때문에 얻을 수 있는 경제적 효율성도 누릴 수 없다. 또한 IMF와 같은 국제금융기구에도 가입할 수 없다. 최근 북한이 AIIB 가입을 노렸으나 중국으로부터 거부된 이유 중 하나도 통계 문제일 것으로 짐작된다. 외국투자가들도 북한 투자를 꺼릴 것이다. 각종 경제 및 사회 통계를 제시해 투자에 따르는 기대편익과 리스크를 가늠할 수 있어야 외국인 투자가 들어갈 것이다. 투자박람회에서 통계를 요청하는 외국투자가들에게 북한은 우리를 믿어 달라는 말만 되풀이했다는 이야기는 통계가 없어 북한이 치르는 기회비용을 상징한다. 북한이 경제를 발전시키고자 한다면 국제 사회의 도움을 얻어 경제 통계를 작성, 발표하는 것이 시급하다.

 한국 정부도 사실이나 통계를 숨기려는 경향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이번 메르스 사태 초기에 환자가 발생한 병원들을 공개하지 않은 치명적 실수는 우리 정부의 대(對)국민 인식의 단면을 보여준다. 국민은 모르는 것이 낫고, 알면 골치 아프게 하거나 위험한 일을 벌이기 십상이라는 태도다. 민주주의라고 하는 한국 정부의 의사결정이 아직 소련 수준을 크게 벗어나지 못한 듯하다.

 북한 경제 데이터도 마찬가지다. 우리 정부가 갖고 있는 북한 관련 데이터의 상당수가 비밀로 취급된다. 합리적인 이유를 넘어 “공개되면 피곤해진다”는 공무원의 보신주의 때문이 아닌지 의심스럽다. 북한이탈주민을 조사한 개인별 자료는 공개 불가다. 자료로부터 개인을 특정할 수 없게끔 처리한 다음 연구자에게 공개할 수 있음에도 요지부동이다. 이는 북한이탈주민의 정착을 도울 수 있는 연구의 문을 국민의 세금을 들여 오히려 닫고 있는 셈이다. 통계를 감추는 나라는 쇠하고, 통계가 없는 국가는 망한다.

김 병 연
서울대 교수·경제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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